하지만 배지를 스캔한답시고 그가 들어 올린 거북이 스캐너를 마주했을 때 에런은 뒷목을 잡았다.
에르테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에런도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애완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유행에 아주 민감한 자신의 친구 제리가 필기구를 거북이 모양으로 싹 다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에런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제리의 거북이 지우개를 빌려 썼다.
하지만 마법펜이 휘갈겨 쓴 글자 하나를 지우는데 1분이 넘게 걸리는 쓸모없는 지우개를 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결국, 불량인 게 틀림없다며 거북이 지우개를 반으로 갈라버렸고 하나뿐인 친구 제리와의 우정까지 갈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 사건 이후로 에런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한 달간 제리가 시키는 대로 온갖 재롱을 부려야 했고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나니 거북이 모양이라면 질색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몇 주뒤, 최신 유행이라며 제리가 달팽이 모양 지우개를 보여줬을 때 에런은 친구 같은 건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달팽이까지 혐오하게 되었다.
에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거북이모양 스캐너와 핑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런 엉터리 성능을 가진 물건을 쓰는 사람이 제리 말고 또 있다니……. 아니, 그보다 하루에도 엄청난 인원이 드나드는 안내소에서 거북이 스캐너를 쓰는 게 말이 되는 건가?
핑은 에런의 가빠오는 숨소리가 귀여운 거북이 스캐너의 귀여움에 반해서 그런 줄 알았는지 기쁜 표정으로 스캐너를 에런에게 들이밀었다. 그가 보란 듯이 등껍질을 두드렸다.
그러자, 등껍질 안에 숨어있던 거북이가 반응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내밀기 시작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에런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너무 느린 거 같지 않나요?”
한참을 애태우듯, 고개를 내미는 거북이를 보며 에런은 자신도 모르게 목과 얼굴에 잔뜩 힘을 주었다. 고개가 거의 다 나왔다고 생각할 무렵, 거북이는 에런과 눈이 마주치자 기껏 내민 머리를 다시 천천히 등껍질 안으로 집어넣었다.
에런은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 어디선가 아주 작고 사악한 요정이 에런에게 환영가루를 뿌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얄미운 거북이가 자신을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물론, 에런이 미쳐 헛것을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 만큼은 절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쓸모없는 스캐너를 만든 사람이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지.
에런은 꽤 오랜 시간을 자신을 조롱하며 고개를 들썩이는 거북이를 째려보며 분노를 참아야 했지만 눈치 없는 핑은 뭐가 좋은지 등껍질을 리듬 있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하하하, 요게, 아주 재밌다니까요. 꼭 애교 부리는 거 같지 않나요? 사실, 어제 도착한 신상품인데 이 녀석이 적응하도록 기존 스캐너랑 번갈아 가며 쓰려고요.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준비운동 같은 거죠.”
에런은 말없이 핑을 노려보았다. 그 준비운동이라는 걸, 왜 하필, 지금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악역은 저 거북이가 아니라 핑이라는 생각과 함께 꽤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설마 갈락시오 러크가 심어둔…….
에런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갈 즈음, 핑이 거북이의 등껍질을 다정하게 문지르며 상냥하게 몇 차례 속삭였다.
스캐너 따위가 반려동물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듯 행동하는 핑을 보며 에런은 한마디 하려 했지만, 핑의 손짓이 통한다는 사실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오, 이제 입을 벌리네요! 새로운 기능인데, 입속에 넣으면 배지를 스캔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에 내장된 청소 마법이 배지를 아주 깨끗이 만들어준답니다”
핑이 자랑하듯 말했지만 에런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에런의 모든 신경은 거북이와 함께 입을 여는 데 쏠려 있었고 너무 집중한 나머지 숨을 못 쉬게 되자, 목을 움켜잡으며 끽끽거렸다.
핑은 그런 에런의 멍청한 모습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배지를 거북이의 입속에 에런의 던져 넣었다. 그러자 거북이가 입을 닫았다.
멍청한 스캐너, 스캔하는데 5분 정도 걸리려나? 아니, 아까 망할 청소까지 해준다고 했으니 10분은 걸릴지도.
에런은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속편 하겠다는 생각에, 안내소 뒤 굳게 닫혀있는 중앙관리국 입구에 시선을 옮겼다.
높고 휑한 돌벽 중앙쯤에 보잘것없는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뛰어가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끝없는 어둠 속에 빠지며 지하감옥에 떨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거북이 스캐너가 에런을 흘끗 쳐다보더니 입을 빠르게 오물거리며 배지를 뱉어냈다.
“착한 녀석” 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에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스캐너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은 에런의 황당한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등껍질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에런은 정말 확신할 수 있었다. 스캐너 따위가 감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에런은 분노로 이를 갈며 본떼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핑이 책상에 스캐너를 내려놓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핑은 에런의 손이 유리막 구멍으로 쑥 하고 들어오자,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바닥 위에 배지를 올려주었다.
축축한 느낌에 에런은 배지를 바라보았다. 배지가 알 수 없는 액체로 번들거렸다.
청소를 하다 말아? 저게 끝까지…….
등껍질 안에서 두 개의 눈이 반짝였다. 에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집게손가락으로 배지를 들어 올려, 망토에 갖다 대었다.
배지가 자석처럼 망토에 척하고 달라붙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미끌거리고 끈적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거북이 스캐너는 마지막까지 에런의 멍청함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흥미가 떨어진 듯 눈을 감아버렸다.
“……확인되셨어요. 에런 시엔스, 몇 번 홀인지 봐드릴까요?”
핑이 전산화면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에런이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 그럼 바로 입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대전당의 조각상으로 연결해 놨어요” 핑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에런이 급히 몸을 틀다 말고 핑을 바라보았다.
“참, 거북이 스캐너 앞으로도 잘 사용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거예요. 그럼, 이만.” 에런은 핑을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멋없는 보랏빛의 나무문을 향해 달렸다.
단언컨대, 오늘이 지나면 적어도 몇 년간은 중앙관리국 안내소를 이용할 일이 없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핑이 저 멍청한 거북이 스캐너를 꼭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야 언젠가 분명 화를 참지 못한 마법사의 손에 처참히 부서질 테니 말이다. 에런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달싹거렸다.
에런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냥한 핑은 에런이 볼 수 있게 거북이 스캐너를 투명 창 바깥쪽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에런, 졸업 다시 한번 축하해요! 거북아, 너도 인사해, 안녕!”
에런은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졸업식의 충격이 착한 핑을 저런 바보로 만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장애물 하나 없는 높고 긴 돌벽에 유일하게 박혀있는 보랏빛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각양각색의 문들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화려한 폭죽이 문들 사이사이에 팡팡 터지며 “중앙관리국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자가 지워질 무렵, 또 다른 폭죽이 터졌다.
하지만 지금의 에런에겐 그저 시끄럽고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에 불과했다.
에런은 바로 앞, 자신을 위해 준비된 다리를 건너, 대전당이라는 팻말이 붙은 흰색의 고풍스러운 문을 향해 뛰었다.
대전당의 문을 열고 나오자 고풍스러운 기둥과, 수많은 환상동물을 본떠만든 조각상들이 에런을 맞이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살아있는 듯한 조각상을 마주 할 땐, 정말 무서웠다. 특히 불과 독가스를 내뿜는 용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지금은 그저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에런이 용의 비늘까지 섬세히 표현한 조각의 손바닥을 가볍게 두어 번 치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조각상이 가만히 에런을 내려다보았다.
에런은 조각상 따위는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괜히 비늘을 잡아당겨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각상이 미로처럼 늘어선 곳에서 익숙하게 길을 찾아 걸어 나왔다.
그러자 깔끔한 대리석 바닥이 깔린, 넓은 대전당의 로비가 펼쳐졌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에런이 급히 자신의 앞을 지나는 중년의 마법사를 붙잡았다.
“저, 오늘 아르테마법학교 졸업식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에런의 다급한 물음에 여자는 잠시 에런을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4번 홀을 가리켰다.
“저쪽이란다.”
“감사합니다”
에런은 여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인 뒤, 여자가 가리킨 4번 홀을 향해 뛰었다.
“거기 학생! 뛰지 마세요!”
에런의 등 뒤로, 순간이동문 담당지기 릭 도어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에런은 “죄송합니다!”라고 말로만 외칠뿐,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릭은 그를 잡기 위해, 무거운 몸을 움직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에런이 4번 홀 앞에 멈춰 서자, 한숨을 내쉬며 제 할 일 계속했다.
4번 홀 앞에는 아르테마법학교 졸업식 팻말이 새워져 있었다. 에런은 그 앞에서 숨을 골랐다.
“천천히, 티 안 나게, 할 수 있어 에런”
에런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한쪽 다리를 집어넣었다. 수업에 늦을 때마다 쓰던 기술이었다. 물론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도와줄 것이다. 무조건 그래야만 했다.
몇 초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에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쪽 팔도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에런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에런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문고리를 놓치지 않아 바닥에 넘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사색이 된 에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자 결국, 오늘 가까스로 참아 온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