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틀 촌장은 지치지도 않는지, 세 사람을 끈질기게 쫓아오며 괴성을 질러댔다.
“저 영감탱이는 도대체 뭘 먹고살길래 저렇게 체력이 좋은 거야! 헉헉!” 파랑이가 질색하며 저린 팔과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정상이 아니긴 하지.”
말두가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평온히 답하자, 파랑이가 땅굴 밖으로 손을 내밀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말두가 내키지 않는 듯 파랑이의 손을 잡아 땅굴 밖으로 끌어당겼다. 거센 힘에 파랑이가 흙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잇 퉤퉤! 야! 누가 숙녀를 이렇게 거칠게 다뤄! 너 때문에 흙 다 먹었잖아!”
“배고팠을 텐데 잘됐네.”
말두가 뒤이어 나오는 소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올리자 파랑이가 기가 찬 듯 숨을 들이켰다.
“너 차별하냐! 어? 차별해?” 파랑이가 말두를 향해 흙무더기를 걷어찼다.
“방향이 잘못됐잖아. 화풀이를 하고 싶으면 여기다 해.”
말두가 땅굴 주변에 가득한 흙무더기 들을 발로 걷어차 땅굴 안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이에 터틀 촌장은 모래와 자갈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네, 네이놈들! 그만두지 못해!” 터틀이 부들대며 소리쳤다.
터틀을 노려보던 소리와 파랑이가 말두와 합세해 터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그를 향해 모래를 흩뿌렸다. 하지만 터틀은 쏟아져 내려오는 모래에 연신 기침을 해도 멈추지 않았다.
말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짓했다.
그러자 파랑이가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를 바닥에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말두가 황당한 듯 파랑이를 위아래로 흘기자, 숨을 고르던 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던져, 파랑아, 넌 할 수 있숴……!”
소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쟤가 할 말이 있나 봐.”
파랑이가 턱짓으로 말두를 가리켰다.
터틀을 바라보는 말두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뭐랄까, 매우 진지했다.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먼저 말을 꺼낸 건 터틀이었다.
“난 너와 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몰라. 그런 의미 없는 것을 나누기에 우리의 정이 그리 깊지 않았다는 거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속삭임의 숲.”
말두의 단호한 말에 터틀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그날처럼 네가 이곳을 벗어날까 싶어 내심 기대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역시 그럴 용기는 없나 보군?”
말두는 끝내 구덩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 터틀 촌장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너 이 자식, 역시 그날 내가 너와 그 미련한 인간들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그 유난을 떨어댔던 거였군!”
말두가 어깨를 으쓱하며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널 그 구덩이에서 꺼내줄 사람은 없어. 결국 네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넌 너무 나약해, 터틀.”
터틀 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실수였다. 차라리 그날, 그날! 네가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터틀이 몸을 떨더니 깊은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소리와 파랑이가 숨을 들이켰다.
“적어도 뭐.” 말두의 깊은 눈이 터틀을 향하자 터틀이 그의 눈을 피했다.
“넌 그날의 일을 겪고도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네가 아주 용기 있다 생각하는 거냐? 착각하지 마라! 넌 저들과 다를 바가 없어. 아니 오히려 더 멍청하고 아둔하지. 내 눈에 넌,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제 발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멍청한 두더지로 밖에 보이지 않아!”
그때, 말두의 뒤로 소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설마, 정말 굴 밖이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어린애도 아니고”
터틀의 이마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간악한 속삭임에게 속은 줄도 모르고 있지도 않은 밤을 찾으러 가는 멍청한 인간주제에……!”
터틀영감이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감히 뭘 안다고 지껄여!”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터틀촌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흥, 너 따위에게 해줄 말은 없다.”
소리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 역시 촌장님과 나눌 말은 없겠네요. 하지만 알아두실 것이 있어요. 우리는 밤을 찾는 즉시, 번을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러니 내 친구 손끝 하나 건드려봐요. 당신을 억지로 끌고 나와 끝없는 강에 밀어버릴 거예요.”
소리의 통하지 않을 귀여운 협박에 말두가 피식 웃음 지었다.
터틀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소리가 두 주먹을 불끈 지었다.
“전요! 지금 이 순간, 처음 보는 촌장님이 절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보다 백배, 천배는 더 내 친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다고 확신해요. 그럼에도 제가 촌장님을 등지고 고요의 땅을 향해 가는 건 그 사랑하는 친구가 내게!”
소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게, 괜찮을 거라고……기다린다고 해줬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번을 향한 제 믿음과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어 촌장님께 해가 되지 않도록……! 제 친구 잘 좀 부탁드릴게요.”
소리가 터틀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소리의 눈물이 흙무더기에 투투둑 떨어져 번져나갔다.
터틀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가 입을 꾹 다문채 소리를 바라봤다.
“말두, 그만 가자.”
꼿꼿이 허리를 세운 소리가 말두와 눈을 맞추더니 미련 없이 끝없는 강기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파랑이가 소리의 뒤를 따랐다.
말두가 소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터틀촌장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터틀?”
터틀 촌장이 기가차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내뱉더니 말두를 바라봤다.
“하나만 묻지, 저 아이…… 혹시 그 멍청이들의 딸인 거냐.”
“그래. 그런데 저쪽 아니고 저쪽이야.”
터틀의 시선이 파랑이에서 소리에게로 옮겨졌다.
터틀과 말두 사이의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밤을 찾는 다라. 저 아이의 부모가 쓸데없는 이야길 남겼군. 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어.”
터틀이 작게 중얼대더니 말두와 눈을 맞췄다.
“그곳에 저들이 찾는 밤은 없어. 그건 너도 알지 않나?”
“고요의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런 일을 당했잖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
말두가 퉁명스레 답하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너도 알다시피 난 그곳에 대해 잘 알아. 애초에 속삭임의 숲엔 고요의 땅이라는 곳은 존재하지도 않고 밤은 이미 옛적에 죽었다고 몇 번이고 말했지. 하지만 넌 그때도 지금도 내 말은 듣지 않아. 그래서 난 고집불통인 네가 싫다. 당연히 무모하고 나약한 인간들도.”
말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 잃은 여행자들을 위해 마을을 만들고 너만 아는 공포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려는 네가 인간을 싫어한다는 게 딱히 믿음은 안 가지만 날 싫어한다는 말만큼은 믿어주지.”
말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말로 저주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할 만큼, 아주 악질인……!”
터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조만간 큰 혼란이 찾아올 거다. 네놈들 때문에 그 시기가 앞 당겨지겠지.”
터틀의 깊은 눈동자에 슬픔과 고통, 아픔이 새겨졌다.
“그때가 오면 난 모든 걸 없앨 거다.”
말두는 그의 의미 모를 말을 제 뜻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퍽이나, 참 그렇게 할 수 있겠군.”
터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해와 초승달이 그려져 있는 목걸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곧, 아침이 밝겠군. 마을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종을 울려야겠어.”
그가 목걸이를 옷 깊숙한 곳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 이상한 녀석은 인질로 잡아두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녀석부터 죽여버릴 테니 그리 알아두고.”
“대단한 협박이군.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협박은 안 통해. 난 그 모지리 녀석이 죽든 말든 별 상관없거든”
말두의 말에 터틀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땅굴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소리와 파랑이는 멀리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두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모지리는 걱정 마. 터틀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이면서 늘 말로만 겁을 주거든.”
말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해하며 내뱉은 첫말이었다.
“그 영감, 관상을 봐서는 개미 한 마리뿐 아니라 개미 구덩이까지 찾아 말끔히 몰살시키게 생겼던데…….”
파랑이가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소리도 같은 생각인지 우울한 듯 입을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말두가 그런 두 사람을 지나쳐 절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네 친구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게 사실이라면 어서 움직여, 바로 강을 건널 거야.”
말두의 말에 소리와 파랑이는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절벽 위, 말두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깎아지른 산에 가려면 이 강을 가로질러야 돼.”
파랑이가 질색하며 말했다.
“그걸 우리가 몰라? 문제는 여기가 끝없는 강이라는 거잖아, 그리고 여긴 절벽이야. 난 수영도 못한다고!”
파랑이가 눈을 크게 뜨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두더지 너 설마, 특별한 길잡이를 부르기 위한 의식을 치를 생각은 아니지? 도대체 그놈은 왜 죽기 직전에야 나타나 도와준다는 건데? 그냥 도와주면 어디가 많이 불편한가? 영웅놀이에 심취한 어린애도 아니고! 야! 길잡이! 너 어디선가 듣고 있지! 당장 안 나와? 너 내가 먼저 찾으면 정말 불편해질 거야?”
파랑이가 팔을 걷어 부치며 고래고래 소리치자, 말두가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흘겼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긴 사람이나 그걸 그대로 믿는 네들이나, 쯧쯧.”
말두가 혀를 차더니 돌멩이 하나를 집어 절벽 아래로 던졌다. 순간 검은 형체들이 물속에서 솟아올라 돌멩이를 끌어올려 다시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소리와 파랑이는 절벽 아래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기에 아쉽게도 그 기묘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
말두가 재차 집어든 돌멩이들을 손 안에서 굴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너네처럼 이름만 듣고 지레 겁을 먹어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지. 하지만 가끔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는 자들도 있어.”
말두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 강물로 몸을 던졌다.
“말두!”
소리와 파랑이가 경악하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둥둥 떠있는 말두의 주위로 수많은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말두는 그 물고기 위에 몸을 얹고 편안히 누웠다. 그가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그저 뛰어내리기만 하면 돼. 끝없는 강을 건넌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잖아? 끝없는 강이라는 건 여행자들이 함부로 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터틀이 오래전 붙여 놓은 이름일 뿐이야.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이 강은 속삭임의 숲을 둥글게 감싸고 있어. 그래서 그저 물길만 따라 걷거나, 방향을 잘 못 잡으면 끝없이 맴돌게 되지. 하지만, 이 물고기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강을 건너는 것쯤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위험한 상황…….”
파랑이는 말두의 몸들 들어 올려 뗏목처럼 떠받치고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이거였어! 이 절벽에 무작정 뛰어내려 강을 건널 선택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이 어디 있겠어?”
파랑이는 말두의 몸을 들어 올려 뗏목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물고기들을 가리켰다.
“바로 저 물고기들이 소리 네가 찾던 특별한 길잡이었던 거야!”
파랑이가 소리의 손을 잡은 채,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러나 소리의 시선은 물고기 뗏목 위에 느긋하게 누워 있는 말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특별한 길잡이는 역시…….”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였구나.”
“응, 뭐라고?”
파랑이가 소리를 바라보자, 소리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파랑이 네 말이 맞아, 이 강을 건너는 건 정말 식은 죽 먹기였어!”
소리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는 말두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말두가 물고기 뗏목 위에서 소리쳤다.
소리가 절벽 끝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지금 갈게! 말두!”
절벽 끄트머리에 서자 파랑이가 잔뜩 긴장한 채 심호흡을 했다.
소리가 그런 그녀의 손을 따스히 잡아주었다.
“파랑아, 우린 무사히 밤을 찾을 거야. 그러니 그에게 사라진 소리를 돌려받고 하루빨리 우릴 기다리고 있을 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자.”
그러자 파랑이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강을 향해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