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성음 Nov 22. 2024

14화, 새벽의 땅

낮과 밤이 사라지자 활기와 포근함을 맛보았던 정령들은 무기력하고 나태해져 자연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어정령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 자연은 하루하루 메말라갔지

때문에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생명체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어그중에는 당연히 인간도 포함되었지

나무와 땅은 더 이상 열매와 곡식을 내어주지 않았고흐르는 물은 그대로 멈춰 썩어버려 엄청난 악취를 풍겼어통제를 잃은 바람은 제멋대로 굴어 인간의 터전까지 망가뜨리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모아둔 곡식들 마저 모두 날려버렸고 불을 구할 수 없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지.

상황이 급격히 나빠짐에 따라 특별함이라고 하나 없는 인간들 앞엔 어느새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어모두가 희망을 잃었지

하지만 한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어. 그녀는 어디선가 듣고 있을 신께 기도를 올렸단다.

제발 모두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소녀를 비롯해인간들에게 소리가 생긴 거야! 그건 분명 지금껏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특별한 소리였지.   

  

끝없는 강기슭의 절벽을 따라 걷고쉬 고를 반복하던 세 사람은 주린배를 쥔 채 땅만 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말없이 말두의 뒤를 따라 걷던 번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신기루야…….” 그의 힘없는 목소리에 소리와 파랑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가던 말두가 번을 힐끗 돌아봤다.

저 마을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에 번이 눈을 크게 떴다그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혹시너도 나처럼 헛개 보이는 거야아니지저게 진짜 마을이란 말이야? ”

땅바닥만 쳐다보며 지친 걸음을 옮기던 소리와 파랑이가 번의 떨리는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나도보여! 분명 마을이야이런 척박한 땅에 마을이 있었다니 우린 이제 살았어!”

파랑이가 기뻐 소리쳤다.

우리 방금 전에도 신기루를 봤잖아쉼터인 줄 알았는데 큰 돌덩이였지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

소리의 침착함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세 사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제발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환영이 아니길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그들의 심장이 거세게 뜀박질했다.

“역시 환영이…… 아니야.”

파랑이가 손가락으로 낡은 간판을 쓸어내렸다.

환영이 아니라고!”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간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그러자 낡은 간판이 힘없이 부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파랑이가 숨을 들이켰다.

“헙, 어떡해설마 물어내라고는 하지 않겠지?”

제발 힘 조절 좀 하란 말이야!” 번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어!" 파랑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소리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칠이 다 벗겨져 오싹한 느낌을 풍기는 조각들을 발로 툭툭 밀며 맞췄다.

새벽의 땅……?” 소리가 간판에 적힌 색 바랜 글자를 읽어 내렸다. "이 마을의 이름인가?"

소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말두를 향했다. 하지만 말두는 말없이 등을 돌리더니 마을 입구에서 가장 큰 고목나무에 올라가 굵직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왜인지 함께 마을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번과 파랑이는 이미 그의 행동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 마을에서 드디어 배고픔과 고된 육체의 피로를 풀 수 있다는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정말 사소한 의문조차 품지 못했다

"소리야! 빨리 들어가자! 분명 길 잃은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줄 거야!"

파랑이가 말두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는 소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편히 쉬라며 쉼터도 마련해 주겠지!" 번도 덩달아 외치며 소리의 나머지 한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양 옆에서 쉼 없이 떠들어대자 덩달아 신이 나버린 소리가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아무런 의심과 경계도 없이 마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을 밖 큰 나무에 걸터앉아 세 사람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말두는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하게 사라지자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저렇게 의심이 없어서야…… 정말 죽기 딱 좋은 먹잇감들이군.”

     

그들이 들어선 새벽의 땅은 매일이 시끄럽고 활력이 넘치는 소리의 땅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용하고 삭막한 거리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았고 어스름한 하늘 때문인지 음산한 기운까지 풍겼다호기롭게 거리를 걷던 세 사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여기 너무 수상하지 않아마을이 너무 조용해

제일 먼저 망상에서 헤어 나온 소리가 어딘가 이상한 마을 분위기에 침을 꼴깍 삼켰다.

맞아그 흔한 싸움 소리도 하나 안 들려!”

파랑이가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사람이 살지 않는버려진 마을이었나 봐…….” 파랑이가 오싹해지는 팔을 양손으로 비볐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우린 너무 지쳤어사람이 있든 없든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잖아버려진 마을이라도 뒤져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번의 말에 누군가의 긍정적 말을 기다렸다는 듯두 사람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마을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다행히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자 확실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눈에 보였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지 흙 묻은 곡괭이나 낫삽 같은 농기구들이 곳곳에 위치한 나무통에 정갈히 꽂혀있었고한 곳에 잘 모아둔 잡동사니나 쓰레기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단합이 잘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마을 주변도 깨끗하고 집들도 잘 수리되어 있어사람이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증거지혹시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집을 비운 걸까……?”

생각보다 넓은 마을이야이 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집을 비울만한 이유가 뭐가 있겠어?”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얘들아방금 떠올린 꽤나 그럴듯한 가설인데 우리 집에 파도소리를 사러 오시던 단골손님, 파츠 아저씨 알지?”

그 선장이라는 분?” 번이 아는 척 재빨리 말했다.

그래정확히 말하면 거의 20년째 항해를 못하고 있는 선장이지그런데 며칠 전 방문하시면서 이제 파도 소리를 끊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알게 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파랑이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분이 항해를 못했던 이유가 해적선을 만났기 때문이래.”

해적선?” 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해적선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배를 노리고 약탈을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 이끄는 배야그런데 아저씨가 만난 해적선은…….”

파랑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유령선이었던 거지.”

소리의 눈이 공포와 호기심으로 커지는 반면번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때 간신히 살아 돌아오고 나서는 그 트라우마로 바다 근처엔 얼씬도 못했대그리움이라도 달래려고 우리 파도소리를 사간 건데,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항해를 향한 용기를 되찾으신 거지. 이제는 그곳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어그렇게 며칠 전 소식이 끊겼지아마 지금쯤 아저씨가 바라던 항해를 마음껏 하고 계시겠지아니면 유령선을 만나 그곳의 일원이 돼버렸거나…….”

파랑이가 무서운 얼굴을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서 이 말을 한 의도가 뭔데?”

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찡그리자 파랑이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이 마을에 꼭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 살라는 법 있어유령들이 사는 마을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유령 마을 같은 거……! ”

파랑이는 혹시 자신이 생각하는 유령친구가 듣기라도 할까 지레 겁먹은 채 쇳소리를 내며 작게 소리쳤다.

이에번이 한심하다는 듯 파랑이를 흘겼다.

괴물이나 유령 같은 것들이 굳이 우리들처럼 집도 짓고 거리도 청소한다고내가 읽은 책에서 괴물과 유령들은 아주 더러운 걸 좋아한다고 했어아마 파츠 아저씨가 놀란 것도 유령들의 해적석이 정말 끔찍하게 더러웠기 때문이겠지그리고 수백 년간 씻지도 못했을 테니 그들이 풍기는 냄새는……!”

번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코를 부여잡았다.

그런데 얘들아, 아까부터 말두가 안 보여. 우릴 따라오던 게 아니었나?” 소리가 그제야 말두가 사라진걸 눈치채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지 갈길 간 거겠지.” 파랑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참을 멀어져 보이지도 않는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겁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 ---!

갑자기 큰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캄캄하기만 하던 창문들에 빛이 하나 둘빠르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이 섬뜩한 상황은?" 파랑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 정말 유령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같은 건 아니겠지? 그 원한이 가득 쌓여 승천하지 못한 악귀 같은 것들 있잖아!” 소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어쩐지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어서 이곳을 나가자!” 파랑이가 다급히 몸을 틀었다그러자 번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황급히 틀어쥐었다.

진정하고저길 좀 봐!”

번이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마지못해 그의 시선을 쫓았다.

그러자 불 꺼진 문 틈사이로 두 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꺄아아악, 유령이야!" 파랑이가 소리치자 번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는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대로 봐!" 

번의 외침에 두 사람이 눈을 끔벅이며 다시금 시선을 던졌다.

문틈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한 소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곧 무슨 괴물이라도 본 듯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어때확실히 사람이었지그것도 꽤 귀여운 꼬마 아이……!” 번이 두 사람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소리와 파랑이는 잠시 멍하니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켜진 집 안에서 사람들의 활기 찬 대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이 사람들 잠이란 걸 자고 있었나 봐!"

번의 말에 어두웠던 소리와 파랑이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얘들아그리고 저기!

번이 말뚝이 단단히 박혀있는 방향표시판을 가리켰다. 그것은 홀로 떨어져 우뚝 솟아 있는누가 봐도 마을에서 가장 크고 오래돼 보이는 집 한 채를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익숙해” 번의 말에 소리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너네 집 같아서?” 소리의 말에 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여기 진짜 마을 촌장 집이야.” 집 앞을 서성이며 기웃거리던 파랑이가 꽤 깨끗하고 고급진 팻말을 가리키며 외쳤다.

소리가 얼른 다가가 팻말에 적힌 글을 한자라도 빼먹을세라읽고 또 읽었다.  

   

마을 촌장터틀의 집 창문의 불이 켜지지 않은 시간엔 방문을 삼가시오만약이를 어길 시 아주 무시무시한 일을 경험해야 할 것이오. 


뒤늦게 다가온 번이 작게 소리를 내며 간판을 읽어 내려갔다.

이 마을촌장이 얼마나 고약하고 고지식할지 벌써부터 느낌이 오는데?” 파랑이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소리와 번도 같은 의견인지 불 꺼진 창문과 간판을 번갈아 쳐다봤다.

심지어 게으르기까지 한가 봐, 가장 먼저 마을을 챙겨야 할 촌장의 집만 불이 꺼져있잖아.”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세 사람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며 날카로운 외침이 그들을 향했다.

당장 손들어어디서 어떻게 온 자들이지?”

열댓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포위한 채 날카로운 농기구들로 세 사람을 위협했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번이 낮게 소리치며 소리와 파랑이를 자신의 등뒤로 밀어 넣었다.

저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파랑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한 발짝씩 다가오며 포위망을 점점 더 좁힐 뿐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세 사람의 등 뒤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마을 촌장의 낡은 나무 문이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여기로 들어가자.”

소리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속삭이자번이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여긴 이 마을 촌장의 집이야멋대로 굴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걸?”

번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기를 든 사람들을 주시했다.

나도 알아그러니까 더 들어가야지우린저들에게 정체 모를 이방인이야흥분한 저 사람들 열댓 명을 설득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보다 이 집으로 들어가 촌장한 명을 설득하는 게 낫지 않겠어그리고 저 팻말에 적혀있는 게 맞다면 이 마을사람들은 촌장을 두려워해.”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그만큼 말이 통하지 않는 괴팍한 자일 수 있다는 거잖아. 괴물같이 몸집이 거대하고 험악한 자여서 두려워하는 거라면 우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파랑이가 주저하자소리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래나 저래나 어차피 저들은 우릴 곱게 대해줄 생각은 없는 거 같아.”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소리가 그들의 눈을 피해 촌장 터틀의 집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얘들아지금이야!”

세 사람이 빠르게 터틀의 집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마을 주민들이 놀라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리가 재빠르게 터틀 촌장의 집 문을 쾅소리나게 닫았다.


다행히 소리의 예상대로마을 사람들은 밖에서 웅성거리기만 할 뿐감히 불 꺼진 촌장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용기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세 사람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한 터틀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괴팍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주제로 짧게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촌장의 집은 단조로우면서 꽤 안락한 느낌을 풍겼다.

소리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벽난로와 푹신한 소파, 식탁과 의자들그리고 소파 위로 빼꼼히 보이는 저 놀란듯한 두 눈……?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집안의 적막감이 세 사람의 신경을 한층 더 곤두세우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크게 들려왔다.

소리가 소파 뒤 정체 모를 남자에게 두 손을 들어보자 파랑이와 번도 얼른 소리를 따라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팻말을 무시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이 마을 그 누구도 없다그건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지하지만 저들은 이 팻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분명 우리의 촌장님께 해를 가하려는 것임이 틀림없지저 극악무도한 자들에게서 우리의 촌장님을 구해내자!”

세 사람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그저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큰 실례를 저질렀어요제발 도와주세요!”

소리의 다급한 외침에 어둠 속 두 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세 사람의 동공이 떨렸다.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소리의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얘들아내 뒤로 피해!”

번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소리쳤다하지만 곧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한 촌장의 모습이 보이자 단숨에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인이 엄청난 힘으로 문을 막고 있던 세 사람을 냅다 바닥으로 밀쳤다세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쯧쯧젊은것들이 저리 힘이 없어서야……!”

노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문밑에 자리한 작은 구멍을 열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감히 나의 시간을 방해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나는 괜찮으니 더 이상 내 집 앞에서 소란피지 말고 밭이나 갈러 가거라!”

하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노동의 재미를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다면 하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게 해 주지!”

노인의 말에 사람들이 놀라며 황급히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촌장님 바로 밭 갈러 가겠습니다!”

“빨리 가자, 난 절대 집에 틀어박혀 있는 벌만큼은 받고 싶지 않아

소리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역정을 내는 노인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때 소리의 뒤로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고약하고 고지식한 영감이지?”

세 사람이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무표정한 표정의 말두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말두! 도대체 어디 갔었어!”  소리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난 네가 말없이 우릴 떠난 줄 알고, 정말 서운했단 말이야.”

“나한테 한마디 말없이 마을 안으로 들어간 건 너네 아니었나?”

말두가 심드렁하게 내뱉자소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너무 간절했나 봐…….”

그때, 내심 말두의 등장이 반가운 파랑이가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툴툴댔다.

그보다 싸가지, 넌 언제 온 거야?”

그러자 말두는 대답 대신파랑이의 머리를 한 대 콩 때리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고지식한 노인 터틀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야터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