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틀 촌장이 원수라도 만난 듯 한참 동안 말두를 노려보았다.
결국 불편한 적막을 참지 못한 번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가 설명을 좀 해드리자면…….”
터틀이 듣기 싫다는 듯 식탁을 내리치자 번이 헙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 소리와 파랑이가 번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가 머쓱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
풀이 죽어버린 번을 보며 말두가 고개를 저었다.
“터틀, 그 괴팍한 성격 좀 죽이라니까, 그러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친구 하나도 없지.”
말두는 터틀의 분노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평온한 얼굴로 식탁에 발을 올렸다. 말두가 터틀과 눈을 맞춘 채 의자를 앞뒤로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파랑이가 경악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도대체 쟨, 저런 깡다구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자 소리의 위로를 받고 기운을 차린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더지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싸가지 없는 두더지 놈.”
번의 중얼거림이 내심 마음에 들었던 터틀의 콧수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놔?”
이때다 싶어 파랑이가 얄미운 흔들리는 말두의 의자를 뒤로 크게 젖혔다.
“그래, 말두! 예의 없게 어른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발 안 내려?”
우스꽝스럽게 뒤로 넘어갈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말두는 잽싼 몸놀림으로 몸을 돌려 완벽한 자세를 선보이며 바닥에 착지했다.
당황한 파랑이가 촌장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자, 촌장이 쯧 혀를 찼다.
번이 파랑이를 향해 몸을 숙였다.
“아쉽네. 손 끝에 망설임이 있었어.”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겼는지 말두가 코웃음을 쳤다.
“저게, 웃어……?” 파랑이의 눈 밑이 부르르 떨렸다.
“진정해, 파랑아. 왜 가만히 있는 말두를 건드려. 이건 네가 잘못했어.” 소리가 파랑이를 향해 작게 속삭이자 파랑이가 얼굴을 굳혔다.
“너 내 친구 맞아? 왜 매번 저 녀석을 감싸고도는 건데! 쟤가 네 친구야? 엉? 엉?” 파랑이의 목청이 높아지자, 터틀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말두를 노려봤다.
“뻔뻔한 놈이 귀찮게 꼬리까지 달고와?”
“뻔뻔한 건 영감이지, 이 땅이 다 영감 거야? 이런 길목에 누가 봐도 들어오고 싶게 생긴 마을을 지어놓은 놈 잘못이지.”
말두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잔뜩 장난기가 섞인 얼굴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
소리와 파랑이, 번은 괜히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말두를 얄밉다는 듯 노려보았다.
“쟤 즈거 지금 일브러 그러는그자나, 우리 엿머그라그!”
파랑이가 입술을 꽉 깨물고 중얼거리더니 터틀을 향해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하, 별로 궁금하시진 않겠지만 참고로 저흰 이 두더지를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니까 아직 공감대를 형성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뭐 그런 거죠! 그러니 저런 싸가지와 친구일 거란 오해는 절대 하지 마세요.”
터틀의 눈꼬리가 들썩였다.
“그, 그런데 이 마을 정말이지 들어오고 싶게 생기긴 했어요. 마을에서 풍겨우는 우암함과 아름다움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달까요? 그치 얘들아?”
소리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친구, 용쓰네…….
“너 이상하다? 아까는 수상하다며! 막 유령들 사는 마을이라고……!” 번이 눈치 없이 중얼거리자, 파랑이가 다급히 손으로 그의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살그시프면 즘 즈용해, 이 므지리야. 뭐라고? 하하, 제 친구도 그렇다네요!” 파랑이가 자신의 이마를 번의 이마에 갖다 댄 체 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다믈어, 제발 그 믕할 입 즘 다믈어!”
번이 몸부림을 치며 그녀를 밀어냈다.
“야, 너 무슨 이중인격이야? 퉤퉤, 손은 뭐 이리 더럽게 짜!”
번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짠맛에 진저리 치며 소매로 벅벅 문질렀다.
터틀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들을 흘겼다.
“흥, 네 취향도 한결같구나. 또 저런 모지란 놈들을 친구로 두다니, 저런 애들과 친구를 할바엔 차라리 혼자가 백번 천 번 낫지.”
“아니지, 모지란 놈들의 생각도 들어봐야지. 쟤들도 영감은 피할걸? 사람이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생긴 것부터 봐, 재미가 없잖아. 고지식한 그냥 늙은 영감탱이지.”
“그놈의 말본새는 변함없이 싸가지가 없군.”
“변하면 쓰나, 변하면 죽어” 말두가 심드렁히 답했다.
“내가 분명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넌 내 신뢰를 저버리고 그 인간들을 택했어. 그래놓고 어째서 다시 뻔뻔하게 내 눈앞에 얼쩡거리는 거지?” 그가 버럭 호통을 쳤다.
하지만 말두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표정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말했을 텐데? 난 그저 길목을 지나다 우연히 재밌는 광경을 목격해 구경 온 거뿐이야, 난 호기심 많은 두더지니까”
터틀 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믿으라고?” 그의 시선이 세 사람을 향했다.
“그래, 이 두더지 놈이 네들을 꼬드겨 이곳에 데려왔겠지.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놈들이라니, 아주 끼리끼리 잘도 어울려 노는구나.”
그러자 그 누구보다 차분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두는 저흴 꼬드기지도, 우리에게 이곳으로 들어가라 등 떠밀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말두가 계속해서 촌장님께 오해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곳에 발을 들였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드릴게요. 물론 들으실 마음이 있으시다면요.”
소리의 말에 터틀의 짙은 눈썹이 꿈틀댔다.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말두가 괜히 안 어울리게 긴장한 얼굴로 소리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말이라니? 말두, 계속 오해받고 싶어? 넌 그저 땅굴에서 위험에 빠진 우리를 구해줬을 뿐이야.” 소리가 터틀을 바라봤다.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그저 끝없는 강을 따라 걷다 우연히 마을을 발견하고 도움을 구할 생각에 기뻐 발을 들였어요. 의심할 것도 오해할 것도 없이 우리도 이 마을에 발을 들이는 수많은 여행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라고요.”
“흥,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다고……?” 노여움이 담긴 터틀의 눈빛이 다시 말두를 향했다.
소리가 얼른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허락 없이 촌장님의 집에 들어온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 점은 저희가 너무 무례했어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위협에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터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곳은 세상의 끝과 같은 곳이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
소리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하지만 분명 이곳엔 마을도 있고 사람들도……!”
소리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당연히 끝없는 강을 따라 걸어왔다는 네 말도 거짓이다. 이곳은 강과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니까.”
소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 점은 소리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언제부턴가 땅만 보며 말두의 꽁무니만 쫒았기에 강에서 멀어졌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끝없는 강이 안 보이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소리가 힘주어 입술을 앙다물더니 깊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저희는 틀림없는 여행자들이에요. 도중에 두더지들에게 짐을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저희도 이렇게 무모하게 위험할지도 모를 곳에 발을 들이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흰 지쳤고 이대로는 절대 강을 건널 수 없을 거 같아 그냥 정처 없이 길을 걸었어요. 그러다 정말 우연히, 감사하게도 이 마을을 발견한 거고요.”
조금 전보단 듣기 좋은 대답이었는지 터틀의 이마 주름이 4개에서 2개로 줄어들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어. 멍청한 놈들이나 우연을 믿는 거지.” 터틀이 말두를 짧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두더지들에게 식량을 빼앗겼다는 것만 봐도 모자란 인간임엔 틀림없군. 이 두더지 놈과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주도록 하지.”
어딘가 이상하게 이해한 촌장의 말에 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파랑이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소리야." 파랑이가 작게 속삭였다.
“매번 식량을 털리는 호구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모자라다는 건지…… 쯧” 말두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터틀은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래서 자신감 하나만 가지고 속삭임의 숲에 발을 들이려는 멍청한 네들은 어디서 왔지? 무슨 이유로 아직 어린 네들이 이런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거냐.”
한껏 누그러진 듯한 터틀의 질문에 세 사람이 놀라 숨을 들이켬과 동시에 앞 뒤로 흔들리던 말두의 의자가 멈췄다.
“그걸, 어떻게…….” 소리가 놀라 묻자 터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숨을 내뱉었다.
“끝없는 강을 건너려는 이유가 단지 이것 말고 뭐가 있을 수 있지?”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세 사람이 눈을 맞췄다. 소리에게 내린 예언, 밤, 사라진 소리…….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어딘가 이상한 마을의 고지식한 촌장이 알고 떠는 것인지 그냥 우연히 끼워 맞춘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확히는 속삭임의 숲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고요……!” 소리가 재빨리 번의 입을 가로막았다.
터틀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가 두 눈을 굴렸다.
“혹시 그 숲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아, 그전에 저희는 소리의 땅에서 왔어요!”
그 순간, 터틀의 이마 주름이 2개에서 5개로 확 늘었다.
말두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터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험악하다 할 수 있는 얼굴로 변했다.
“감히, 감히 다른 땅의 인간들도 아니고 이 마을에, 이 집에…… 소리의 땅 인간들과 발을 들여놔?”
그의 분노 어린 시선이 말두에게 향했다.
처음부터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힐듯한 강한 적의를 내비치자 세 사람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말두가 한숨을 쉬더니 의자 위로 올라가 분노한 터틀과 눈을 맞췄다.
“이봐 터틀, 말은 바로 해야지!”
세 사람은 자신들을 위해 나서는 말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동받은 듯 입술을 꿈틀댔다.
말두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난 얘네들과 함께 발을 들인 적 없어. 정확히는, 얘네가 먼저 마을 안으로 발을 들였고 난 그 뒤를 따라왔을 뿐이야”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내 말이 틀려?” 말두가 해맑게 그들을 향해 되물었다. 하지만 답변 대신 싸늘한 시선을 보내오자 그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니까 짜증을 내려거든 내가 아니라 얘네한테 내란 말이야, 내가 눈에 거슬리면 이만 나가볼게, 그럼 되지?”
말두가 의자에서 뛰어내리더니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세 사람이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그의 말에 하나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먼저 마을을 발견했다고 외친 건 번이었고, 말두를 내버려 둔 채 마을에 발을 먼저 들인 것도 세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만 쏙 빠져나가는 얄미운 말두를 노려보았다.
그때, 터틀 촌장이 탁자를 쿵 내리쳤다.
“장난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또다시 녀석들을 도울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터틀이 노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두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재빨리 다가와 식탁에 펄쩍 뛰어올랐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두 사람의 싸늘한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터틀, 늙어서 잘 안 들리나 본데 다시 말해주지. 난 이 녀석들을 도울 생각 없어.”
터틀의 주름이 살짝 옅어졌다.
“맞아, 방금 전까진 분명 그랬지.”
터틀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영감 반응을 보니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뛰어들려는 이 멍청한 불나방 같은 녀석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막 샘솟았어. 어때? 괜찮은 생각인 거 같지?”
말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터틀이 말했다.
“누가 할 소릴?” 말두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저놈들은 염치없는 소리의 땅에서 온 인간들이야. 심지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인간들이지. 다른 인간들보다도 더!”
“쟤들의 모자람은 영감보다 내가 더 잘아”
“모자란 놈들과 한번 어울려봤다고 이 정도로 멍청이가 된 건가? 내 말뜻을 이해 못 하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저들의 모지람을 포용할 만큼 내가 아주 자비롭고 똑똑하고 아주 대단하고 대담한 두더지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두 사람의 날카로운 대화가 끝없이 오가는 상황에 소리와 파랑이, 그리고 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소리가 이 묘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애써 웃으며 친구들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지금 말두는 앞으로 우릴 도와주겠다는 뭐 그런 진솔한 대화를 촌장님과 나누고 있는 거야…… 정말 잘됐다, 그렇지? 하하”
“그런데 왜 기분이 별로일까?” 번이 고개를 갸웃하자 파랑이가 눈을 부릅떴다.
“왜 별로긴, 저 고지식한 영감과 싸가지 없는 두더지 새퀴가 지적 생명체를 앞에 두고 할 말 못할 말 가려 못하는 모지리들이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한 파랑이가 허공을 향해 날았다.
“파, 파랑아 안돼!”
소리와 번이 다급히 파랑이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분노로 각성해 버린 파랑이의 운동신경은 두 사람보다 한참 앞서있었다.
우당탕쿵탕! 탁자가 모두의 눈앞에서 뒤집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말두와 터틀촌장의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대화가 멈추었다.
씩씩거리던 파랑이가 그들을 향해 기괴하게 웃어 보였다.
“히끼기끽, 어디 그 망할 주둥아리를 더 뻐끔거려 보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