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뻐했어. 그들의 소리는 사랑도, 아픔도, 기쁨도, 슬픔도 표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소리였지만 목소리로는 나무에서 과일을 자라나게 할 수도, 멈춰버린 물을 흐르게 할 수도 없었어.
인간들은 신이 내려준 소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생각하며 다시 깊은 절망에 빠졌단다.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어.
가족들은 서로를 보며 사랑한다 속삭여줄 수 있었고, 친구들과 이웃,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거든.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무섭기만 했던 죽음이 조금은 견딜 수 있게 되었지.
작은 웃음이라도 되찾은 사람들을 보며 소녀는 희망이 생겼어. 분명 이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지. 소녀는 골똘히 생각했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소녀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소리쳤어
“신께서 목소리를 내려주신 이유를 깨달았어요!”
그 한마디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어.
“낮과 밤을 데려오는 거예요! 이 목소리라면 분명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 거예요. 낮과 밤의 오해를 풀어주고 설득해 정령들에게 데려간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요! 제가 그들을 찾아올게요!”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어. 그리고 인간들의 환호소리는 바람을 타고 정령의 숲까지 퍼졌지.
사실을 알게 된 정령들은 작은 소녀에게 힘을 보태기로 했어. 소녀의 여정이 힘들고 외롭지 않도록 생명의 소리, 그러니까 정령의 심장을 항아리에 담아 소녀에게 빌려 주었지.
소녀는 감사히 그것을 받아 모두의 응원 속에 길을 나섰어. 소녀의 여정이 시작된 거야.
소녀가 가야 할 길은 매우 험난했어. 단, 한 번도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는 소녀에겐 한 발짝 한 발짝이 두려운 길이었지.
하지만 소녀는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었어. 바로, 정령들이 빌려준 심장이 담긴 항아리 덕분이었지.
소녀는 무서움이 몰려들면 항아리에서 숲의 심장을 꺼냈어. 그럼 숲의 포근한 소리가 산새들과 동물친구들을 불러모았지. 소녀는 친구들과의 동행 덕분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단다. 또 목이 마르면 물의 심장을 꺼내 메마른 땅에 물길을 만들어냈어.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한숨을 돌리며 낮과 밤에게 전할 인사를 생각했지. 그리고 아름다운 봄의 심장은 꽃을 피우고 나비들을 불러 모아 소녀에게 활기를 더 해주었고 바람의 심장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바람 소리는 소녀의 더위를 씻겨주기도, 지친 소녀의 등을 떠밀어주기도 했지.
항아리는 소녀에게 그 무엇보다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단다. 덕분에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소녀의 여정은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생기가 넘쳤지.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드디어 소녀의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어.
잠에서 깬 소리의 앞에 거뭇한 형체가 보였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니 형체가 점점 뚜렷해졌다.
“말두……?”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깬 거야?” 말두가 말없이 눈만 끔뻑거리는 소리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들 친구 깼다. 시작해”
그러자 말두의 뒤로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 말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소리를 바라봤다.
“차린 건 없지만 배고플 테니 너도 어서 일어나 먹어.”
소리는 무슨 소리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흙바닥 중앙에 잔뜩 놓여있는 음식들을 와구와구 먹어대는 파랑이와 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주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지도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그제야 잠결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소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더라? 말두우?” 소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끝을 늘이자 말두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야, 터틀이 왜 나에게 너흴 도와주지 말라며 그렇게 악을 쓰며 지랄했는지가 궁금한 거지?”
말두가 짧게 큭큭대더니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영감이 쫄보라서 그래. 겁이 아주 많거든.”
이에 소리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녀가 점잖게 말했다.
“그래? 그럼 말두 어디 설명해 봐. 그 쫄보 촌장님 하나 어쩌지 못하고 우리가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소리의 희 번뜩한 눈동자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던 파랑이에게 향했다.
“파랑이 너!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누누이 말했지! 왜 남의 집 식탁을 뒤엎냐고! 왜!”
질긴 빵을 열심히 뜯어대던 파랑이가 깜짝 놀라 켁켁거리자 번이 얼른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야, 천천히 먹어! 아직 많아, 안 뺏어먹는다고!”
파랑이가 사례가 들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불쌍하게 소리를 쳐다보자 소리가 한풀 꺾였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참! 조용히 못해?”
쇠창살 위로 보초를 서고 있는 남자가 쇠창살을 걷어찼다. 그러자 흙먼지가 파랑이와 번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파랑이가 두 눈을 벅벅 닦더니 한껏 짜증 섞인 목소로리로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윽,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터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러더니 다시 풀 죽은 얼굴로 소리를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리와 말두, 번이 질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남자는 왜 자신이 죄인 따위에게 꾸짖음을 들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하지만 곧 죗값을 치르게 될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기라도 하듯 말없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밖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물론 쇠창살 위로는 여전히 변함없는 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말두가 세 사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일단, 기다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종이 열두 번 치는 때가 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 거야. 우린 그때를 틈타서 이곳을 빠져나가면 돼.”
“역시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잠을 자는구나…….”
소리의 당연한 말에 말두가 코웃음을 쳤다.
“소리의 땅에서 온 네들이야 낮의 보호 아래 갇혀버린 운 좋은 놈들이니 잠이 필요 없겠지만 모든 생명에게 잠은 꼭 필요한 과정이야. 하지만 어떤 미친 인간들은 잠을 자는 것 자체가 밤의 저주라며 잠을 거부하는 놈들도 있지. 그렇게 진짜 미치광이가 되어 사람들을 헤치는 놈들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파랑이와 번이 먹던 것을 멈추고 말두를 바라봤다.
“밤의 저주라니? 좀 자세히 말해봐, 두더지.” 번이 놀라 물으며 소리를 바라봤다.
“미친 인간들이 지껄이는 개소리일 뿐이야. 인간 주제에 잠도 못 자는 네놈들이 낮의 저주에 걸린 거라고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지.”
이에,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을 안 자는 게 저주일 리가 없잖아, 이건 축복이지. 에효, 두더지 따위가 뭘 알겠어?” 파랑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딱딱하게 굳어버린 옥수수를 뜯어먹는데 집중하자 말두가 코웃음을 쳤다.
“네 놈들을 보니 확실히 소리의 땅 인간들이 저주를 받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 멍청해져 버리는 저주 말이야.”
파랑이와 번이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말두 그런데 나는 소리의 땅 인간인데도 잠을 자거든…….” 소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아. 아까 잤잖아” 말두가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 난, 혹시 내가 무슨 이상한 저주에라도 걸린 건 아닐까 걱정 돼. 예를 들어 방금 전 네가 말한 밤의 저주라던가?” 소리가 넌지시 묻자 파랑이와 번이 관심 없다는 듯 눈앞에 놓인 음식을 마구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손에 집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 어린 세 쌍의 눈빛이 말두를 향했다.
작위적인 쩝쩝 소리가 감옥 안을 가득 메우고 말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봤다.
“너 말하는 두더지 본 적 있어? 모두가 다 같을 순 없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세 사람은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데?”
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김이 샜는지 먹던 빵도 내려놓고 쇠창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두더지. 정말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야? 이 깊은 구덩이를 어떻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허세 부리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장 실수한 건 바로 저 두더지를 따라온 거야…….”
파랑이가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부여잡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번도 그녀를 따라 드러누웠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번이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두가 그들을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뭐 어떻게 되겠어, 네들이야 이 망할 마을의 과수원의 거름이나 되겠지.”
말두가 겁을 주자 파랑이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이에 번도 질 수 없다는 듯 땅에 몸을 굴리며 흙을 덕지덕지 묻혀댔다.
“아마 저들은 날 찾을 수 없을 거야. 내 위장실력이면 가능하지. 내일이면 난 흙과 한 몸이 되어있을 거야!”
말두가 기가차다는 듯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가장 정상적인 행태를 보이는 소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두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소리가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속으로 말두를 씹어대고 있단 사실을……. 소리는 한치의 기대도 담겨있지 않은 눈빛으로 말도와 눈을 맞췄다.
“네 친구들은 아무래도 다 멍청한 게 틀림없어. 네들은 내가 두더지임을 감사히 생각해야지. 땅굴 파기는 두더지의 주특기니까!”
말두의 말에 크게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세 사람이 눈을 번쩍 떴다.
“맞다! 쟤 망할 두더지였지?” 번이 흙이 잔뜩 묻은 몸을 일으켰다.
“두더지는 당연히 땅굴을 잘 파지!”
파랑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두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네가 사랑스럽구나! 아이고 예쁜 것!”
“다, 다가오지 마!”
말두가 발톱을 드러내며 두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소리는 난리통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라고 지금까지 한 욕을 모두 이곳 마을 촌장님께 바칩니다.”
종이 열두 번 울리자 시끌벅적하던 마을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때가 됐다. 제군들!”
말두가 흙투성이가 된 채, 구덩이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세 사람은 엉망진창이 된 지도 모르고 멋있게 포즈를 취하는 말두의 모습을 보며 힘겹게 웃음을 참았다.
“땅굴이 꽤 길거야. 네들은 나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없어서 가파르면 잘 기어올라가지 못할 테지. 내 나름의 배려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 준비운동 먼저 하고 서두르자고!”
말두의 말에 소리와 파랑이가 가뿐하게 몸을 풀었다.
번도 스트레칭을 몇 번 하더니 배 터지는 저녁식사 대신, 음식으로 두둑해진 파랑이의 가방을 들춰 맸다.
“나가서 맘 편히 배불리 먹자고!” 번은 파랑이의 짐가방을 소중하게 껴안자 소리와 파랑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녁식사시간이 되자 생각보다 자비로운 촌장 터틀은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양의 식사를 두둑하게 내려주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탈출이라는 기쁨과 든든한 한 끼의 행복을 느끼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을 때였다.
말두가 사과 하나를 주워 위아래로 던지고 받으며 쯧쯧 혀를 찼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좋다고 먹는 걸 보니, 머리는 장식용인 게 분명해. 그 난리를 치던 터틀 촌장이 네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많은 식량을 넣어줬겠어.”
그의 중얼거림이 꽤 컸던지 파랑이가 질긴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두를 쳐다봤다.
“우리가 아니라 네가 문제겠지. 그 촌장은 널 싫어하는 거 같던데?”
파랑이가 우물거리며 말하자 말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탁자만 엎지 않았어도 주어진 시간이 이리 촉박하진 않았을걸?”
당근을 베어 물며 소리가 말두를 바라봤다.
“촉박하다니 뭐가?”
말두가 긴한 숨을 내쉬었다.
“됐고,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으니 많이 먹어둬. 이곳 새벽의 땅은 죄인의 마지막 식사를 두둑이 챙겨주는 편이니 말이야.”
세 사람의 손이 일순간 허공에서 멈췄다.
말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긴 손톱을 이용해 바닥에 글을 새겼다.
‘세 멍청이 이곳에 잠들다’
“마지막 식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번이 말했다.
“잠들긴 누가 잠들어? 잠은 얘 밖에 안자” 파랑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가리켰다.
“멍청한 머저리는 내가 아닌데?” 소리가 번을 바라봤다.
“그래서 촉박한 식사라니, 마지막 무슨 소리냐니까?” 밀려드는 두려움에 번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꽤 그럴싸한 질문처럼 들렸는지 말두가 답했다.
“우리가 이곳을 탈출할 기회는 오늘뿐이야. 내가 땅굴을 제시간 내에 못 파면 너흰 다 죽은 목숨이라고.”
그렇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저녁식사는 빠르게 중단됐고. 남은 음식들은 파랑이의 가방에 두둑하게 담겨 앞으로 그들 여정에 일용한 식량이 될 수 있었다.
말두가 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방은 나에게 넘겨. 그 큰 몸으로 짐까지 들고 굴을 오르긴 어려울 테니까. 굴이 생각보다 크지 않거든.”
“무거울 텐데 괜찮겠어?” 번이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네놈보다 몸집만 작을 뿐 힘은 몇 배나 셀 테니 그런 건방진 걱정은 넣어둬.”
“넌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뭐, 그래도 어쨌든 고맙다.”
번이 피식 웃으며 말두에게 가방을 건넸다.
“대신 내가 가장 뒤에서 따라갈게. 덩치가 커서 가방에 음식이 굴러 떨어져도 다 잡을 수 있거든.”
“완전 모지리는 아니군, 그래?” 말두도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두를 필두로 파랑이, 소리가 간격을 두고 땅굴로 몸을 들이밀었다.
번은 소리와의 간격이 어느 정도 벌어지자 굴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좀이 아니라 많이 좋은데?” 번이 불편한 몸을 낮추기 위해 몸을 비틀 때였다.
누군가 땅굴 밖에서 강한 힘으로 번의 두 다리를 끌어당겼다.
“으악!”
번의 외마디 비명소리에 앞서가던 세 사람의 몸이 경직되었다.
어깨가 끼어 이도저도 못하는 번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을 잡아끈 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젠장, 그 영감이야!”
번을 바라보는 터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도망칠 거라고 당연히 예상했다!”
그가 땅굴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망할 두더지 녀석, 네가 늘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내 배려였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보내지 않을 테다. 넌 절대로 이놈들과 고요의 땅을 밟을 수 없어!”
“아악! 안돼!"
결국 생각보다 힘이 센 터틀 때문에 꽉 끼어버린 듯했던 번의 어깨가 빠지며 땅굴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번!” 소리가 놀라 소리침과 동시에 파랑이와 말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 세 사람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작은 구덩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번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별거 아니니까 일단가! 내가 이 영감탱일 붙들어 둘 동안, 어서!”
번이 자신을 발로 걷어차며 땅굴로 몸을 들이밀려는 촌장의 다리를 힘겹게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 그럴 순 없어……!”
소리의 말에 번이 외쳤다.
“밤을 찾아 저주를 끝내겠다며 그 패기는 다 어디 간 거야? 난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거야! 위험한 상황에 빠진 널 구하는 거, 이게 내가 할 일이었어! 그러니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고 넌 네 할 일을 해! 밤을 찾아야지!”
소리의 가는 손이 떨렸다.
어느새 뒷걸음질로 내려온 파랑이가 발끝으로 소리의 팔을 툭 건드렸다.
“소리야, 정신 차려! 번의 말이 맞아.”
소리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파랑이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번은 괜찮을 거야. 여기서 모두가 잡히면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어. 번은 밤을 찾고 난 후에 우리가 다시 구하러 오면 되잖아. 안 그래?”
“하, 하지만 만약 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번을…… 번을, 다시는 못 보게 되면?”
눈물이 가득 고인 두 개의 눈동자가 작아진 입구로 향했다.
노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힘을 가진 터틀촌장을 어떻게든 붙들기 위해 온갖 수를 쓰며 번번이 나가떨어지던 번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 달려드는가 싶었지만 역시나 터틀의 발길질 한 번에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터틀이 혀를 끌 차며 땅굴에 상체를 집어넣었다. 번은 입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으며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영감, 내가 말이야. 한 끈질김 하거든! 영감은 절대 못 올라가!”
터틀촌장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깍지 낀 번의 손가락을 단숨에 풀어 그를 제압했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낡은 밧줄로 번의 손과 발을 꽁꽁 묶었다.
힘이 빠질 때로 빠져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번의 눈빛만은 독하게 터틀을 향했다. 그 순간, 번의 귓가로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바보야! 못 보긴 뭘 못 봐! 무조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와! 나 벌써 이 영감탱이랑 친구도 먹었……!”
털썩-
터틀이 번의 뒷목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번의 몸이 차가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시끄러운 놈……!”
쓰러진 번을 뒤로하고 터틀의 무서운 얼굴이 땅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