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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음 Nov 15. 2024

13화, 특별한 이름

낮과 밤은 오랜 시간 정령의 숲에서의 삶이 매우 만족스러웠어반면정령들은 그들로 인해 불편해지기 시작했지

특히두 사람이 술래잡기라도 하는 날엔 정령들의 소리가 모두 엉망이 돼버렸어.

낮이 시끌벅쩍하게 도망이라도 치는 날엔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러 온 자연에 말썽이 생겼고반대로 밤이 몰래 숨어 들기라도 하는 날엔 모두가 나른해져 하던 일도 제쳐두고 드러누워 버려 때를 놓치기 일쑤였지.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그들의 행태를 참을 수 없던 정령들은 불만을 표출했어. 그들의 입에선 아름다운 생명의 소리가 아닌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흘러나왔지.

특히그중에서도 낮과 밤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정령이 있었는데 글쎄 그의 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차던지 온 세상을 울릴 정도였지

그들의 소리에 깜짝 놀란 낮은 크게 실망했어. 그리고 형이 볼 수 있게 몸짓으로 말했지.

저들은 우리를 미워해다른 땅으로 가자.” 

낮과 밤은 슬픔을 뒤로하고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어. 

    

소리 깼다!”

번의 외침에 파랑이가 소리를 바라봤다.

너 또 잠들었었어혹시 어딘가 안 좋거나 이상한 거 아냐?”

파랑이의 걱정 어린 질문에 소리가 눈을 비볐다.

난 괜찮아!”

소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파랑이가 그녀를 뒤따라 일어났다.

방금 깨어났잖아조금 더 쉬어도 괜찮아.”

번의 말에 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몸이 엄청 가벼워너희한테 미안할 정도로…….”

소리가 초췌해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잠깐 쉬기로 했던 건데 내가 잠들어 버려서……심심했지?”

소리가 미안한 듯 얼굴을 찌푸리자 파랑이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 썩 나쁘지 않았어아주 현란한 말솜씨로 번과 저 망할 두더지를 욕하고 있었거든겁 줄 땐 언제고저 뻔뻔한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무슨 속셈인지일부러 들으라고 욕 몇 바가지를 퍼붓는 데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니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 지랄 맞은 두더지가?” 

파랑이가 소리의 등 뒤를 향해 머리를 빼꼼 내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넌 도대체 왜 따라오는 거니?”

그러자 두더지가 그녀를 흘겼다.

쓸모없는 머리를 달고 있으니 주둥이도 방정맞군.”

두더지의 덤덤한 중얼거림에 번이 파랑이를 얄밉게 쳐다보며 비웃었다.

너도 마찬가지다모지리

뭐라고?”

번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진정해얘들아그래도 두더지가 따라와 준다면 우리에게 나쁠 건 없잖아? 쟤는 이곳 지리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야.”

소리가 파랑이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지어 우리가 찾는 길잡이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파랑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두더지를 노려보았다.

우리를 가지고 놀기 위해 모르면서 아는 척한 것일 수도 있지영악한 두더지 같으니라고”

그러자 두더지가 콧방귀를 뀌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칫국 마시긴그저 네들과 가는 길이 우연히 겹칠 뿐이야그러니 나한테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네들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거든.”

파랑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너 갑자기 귀가 참 밝아졌다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니? 반응하라고 할 때는 안 하고 입다물 어야 할 때는 꼬박꼬박 대화에 끼지 못해서 안달이네?”

파랑이가 부들거리는 입꼬리로 애써 억지웃음을 짓자, 두더지가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모지리의 열등감 따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아도 다 보이니 굳이 애쓰지 말도록.”

애초에 인간이 두더지 따위에게 열등감 따위를 느낄 리가 없지 않겠니이 망할 두더지 새퀴야?”

파랑이가 또다시 욱하며 그를 향해 삿대질하자, 소리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하하진정해파랑아너도 그만해.”

네들이야 말로 내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마.” 두더지가 심드렁히 말하자 파랑이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네 말대로 우리가 가는 길이 같은데 어쩌겠어?” 소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두더지가 눈알을 굴리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소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두더지를 매섭게 노려보는 파랑이의 눈알이 혹시 빠지기라도 할까등으로 그녀의 시야를 자연스레 가렸다.

그래서 넌 이름은 뭐야?”

이름난 네들에게 불릴 만한 이름 같은 거 없어.”

두더지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파랑이가 아휴재수 없어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두더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는 몸짓으로 표현해그게 우리의 언어니까그들은 날 왕 두더지라고 불러.”

그렇겠구나!”

생각해 보니 너무나 당연했던 말에 소리가 눈알을 굴리더니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그럼우리가 널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예를 들어, 말하는 두더지를 줄여서 말두 같은 거 말이야잠깐만 말두말두 입에 착착 감기는데어때?”

짧은 순간 그의 몸이 움찔했다.

대충 지은 거 치고 잘 어울리는데?”

앞서가던 번이 몸을 돌려 맞장구쳤다.

그러자 파랑이가 눈을 희번뜩하게 뜬 채 소리쳤다.

말두라는 귀여운 이름이 저 망할 두더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너희 빨리 세상 어딘가에 말두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귀여운 생명체들에게 사과해!”

말두라는 이름이 흔하진 않을 거 같긴 한데…… 충분히 기분 나쁠 수는 있겠다.” 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두를 흘겼다.

누가 지어 달래난 이름 따위 필요 없어. 그리고 그런 성의 없는 이름이라면 더더욱.”

그가 뾰루뚱한 표정으로 말하자소리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에이세상에 성의 없는 이름이라는 게 어딨어너 혹시 내 이름 뭔지 알아?”

소리의 말에 말두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차피 얼마 안 가 죽어버릴 인간의 이름 따위 알 게 뭐야.”

말두의 퉁명스러운 답변에 파랑이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말두를 노려봤다.

저 싸가지말하는 것 좀 보라지?”

……에이너무 그러지 마. 말두는 우리랑 다른 종족이잖아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다분하고 불순한 대화가 두더지들에겐 일상적일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문화 차이 같은 거?”

짧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소리에게 향했다.

파랑이는 고개를 저었고 번은 기가차다는 듯 소리를 바라보았다.

소리가 민망함을 애써 삼키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소리야참소리소리의 땅에서 이름이 소리면 얼마나 놀림을 많이 받는 줄 알아그런데 더 웃긴 건 난 특별히 타고난 소리가 없었어그래서 엄청 놀림을 받았지.”

번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난 내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어내가 사랑하고 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나만을 지칭하는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그 행복감은 정말 엄청나거든. 그래서 난 절대 평범한 이름은 없다고 생각해어떤 이름이든지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특별함이 담겨있잖아.”

그런 이유라면 너와 내가 이름을 주고받을 이유는 더욱이 없겠군난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너 같은 못난이를 곁에 존재하게 두고 싶지 않거든물론너도 날 특별히 생각할 필요 없어날 네 곁에 존재하게 만들어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

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야?” 번이 미간을 찌푸리자 파랑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두를 바라봤다.

귀찮게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우리 그냥 쟤 먹자.” 파랑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사막 언덕 어딘가 쯤에서 꽤 오랫동안 모래 바람을 마셨더니 입이 텁텁해기름칠 좀 해야겠어.”

말두가 흠칫하며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소리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냥 별거 아니야이름에는 마법 같은 신비함이 깃들어 있어서 부르면 부를수록 특별함이 생긴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거든.”

말두가 별 관심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 이름을 불리는 게 싫으면 그냥 애칭 정도는 어때난 널그냥 두더지라고 부르고 싶진 않거든대신너도 우릴 편하게 불러어때?”

말두가 걸음을 멈추더니 무표정하게 소리를 쳐다봤다곧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던지

소리의 눈이 커졌다.

고마워말두혹시나중에라도 우리 이름이 궁금해지면 언제든…….”

“그럴 일 없어그저 네가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걸 들어주는 게 귀찮아서 허락했을 뿐이야.”

말두의 대답에 파랑이는 혀를 찼고번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소리는 보았다빠르게 앞서 나가는 말두의 짧은 꼬리가 기분 좋게 들썩이는걸…….

소리가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벌써 특별한 마법이 발동되는 걸까요?” 소리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말두를 향해 소리쳤다. “말두같이가자!”

     

시간이 흘러 모래 언덕 끝자락에 도착한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방금까지 넘어온 곳이 사막이 맞았나 싶을 정도로 모래 언덕 위쪽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끝없는 강인가?”

그런데 강물로 내려가는 길이 안 보여. 강물과 맞닿아 있는 곳은 모두 절벽이라고…….” 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을 돌린 소리가 말두를 바라봤다.

말두 이제 말해봐어디로 가야 돼?”

말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릴 도와주고 싶어서 야단 난 거 아니었어?”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빼꼼 내밀자 말두가 코웃음 쳤다.

네 친구 많이 아픈 거 같은데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내가 땅굴수레 정도는 인당 사과 한 박스로 퉁쳐줄게어때?”

소리가 말두의 손을 냉큼 잡자말두가 벌레라도 붙은 것 마냥 손을 휘적거리며 털어냈다.

그럼 길잡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만이라도 알려줘말두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소리가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놈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두가 퉁명스레 답했다파랑이가 혀를 차며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두더지 따위가 뭘 알겠어됐고어차피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 길잡인지 손잡인지 하는 놈이 나타나서 구해준다며우리가 지금껏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또 한 번 위기에 처한다고 죽기야 하겠니?”

파랑이의 용기 있는 말에 번과 소리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말두의 귀가 그녀의 다음말을 기다리는 듯 쫑긋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 좋게도 위험에 처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야다들 무슨 말인지 알지?”

관심 없는 척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말두의 털이 곤두섰다

난 두더지고기 맛이 아주 궁금한데 너넨 어때?”

그러자 소리가 이미 가방을 뒤적이고 있는 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말두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가 모지리들 아니랄까 봐, 위험이 이런 식의 위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위험이 아니라 위협이지날 협박해도 소용없어도대체 평범한 두더지한테 뭘 바라는 거야, 고요의 땅에 가겠다면서 최소한의 준비도 안 하고 오는 네들 잘못이란 생각을정말 그 쓸모없는 머리로는 깨닫지 못하는 거냐고!” 말두가 답답한 듯 외치자파랑이가 무언가 깨달은 듯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두더지 너 수영 잘하지? 네가 저 강물에 떨어져 보면 되겠다!”

그거 꽤 괜찮은데? 떨어뜨려 줄까, 아니면 알아서 떨어질래?” 번이 그물을 들고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말두를 놀리는 건 이제 그만해그러지 말고 우리 지성인들 답게 지도를 보자.


소리가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갖은 수고를 함께했기에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지도의 상태는 무척 양호했다.

말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고요의 땅으로 가는 지도를 갖고 있는 거야?”

말두가 소리의 지도를 빼앗아 펼쳤다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파랑이와 번이 묘하게 기대감에 찬 눈길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말두가 못 볼 거라도 본 듯 지도를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마구 짓밟았다.

-

네들은도대체무슨자신감으로고요의땅에가겠다는! 거야! 차라리! 그냥죽으러간다고!”

그러지 마!”

소리가 모래에 반쯤 파묻힌 지도를 얼른 주워 들고는 흙먼지를 털어냈다.

말두의 행동을 내심 응원하던 파랑이와 번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쟤라면 곧바로 찢어버릴 줄 알았는데……그때 홧김에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

"쿠로할아버지, 취미도 참 고급지시지. 낙서를 저런 고급 가죽에 하시고……."

소리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도가 조금 허접해 보여도 크게 부족함은 없어!”

그럼 안내해 봐”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그러니까, 이 지도를 보며 알 수 있는 사실은 끝없는 강을 무사히 지나야 만 깎아지른 산에 당도할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끝없는 강을 건너기 위해선…….”

파랑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또다시 죽을 위기에 처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죽을 위기라는 건 위기일 뿐죽는다는 게 아니잖아?”

그녀의 발언에 파랑이와 번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두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저 녀석을 믿고 싶은 내가 너무 싫어.

번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 싸가지가 희망이라니…….”

파랑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엄마아빤 길잡이에게 이 강을 건너는 방법을 전해 듣고 쿠로할아버지에게 끝없는 강을 건너는 것쯤 식은 죽 먹기라고 했대물론그 방법이 쓰여있지 않지만…….”

소리가 절벽 너머 수평선을 가리켰다.

식은 죽 먹기라고 했으니 어쩌면 길잡이의 도움 없이도 우리끼리 건널 수 있지 않을까?”

” 어느새 그들 틈에 껴있던 말두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퍽이나네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리가 없지.”

말두가 답도 없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네들을 땅굴에서 구해준 건 내 최악의 실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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