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은 수많은 땅을 여행했어. 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 어려웠지. 그렇게 수천, 수만 개의 땅을 떠도는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먼저, 동생인 낮은 모든 만물의 활기를 깨워 그들의 아름다운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어.
이 황홀하고도 아름다운은 활기의 소리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지. 낮은 이 아름다운 소리를 형에게 들려줄 생각에 무척 신이 났단다.
그럼, 밤의 특별한 능력은 뭐였을까? 밤은 힘들고 지친 만물들에게 고요함과 포근함을 주어 깊은 잠에 빠지게 할 수 있었어.
그가 지나가는 길은 그 어떤 두려움도, 괴로움도 잊을 만큼 아주 고요하고 포근했지.
밤은 이 능력으로 동생의 가장 좋은 휴식처이자, 안식처가 되어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자신의 능력이 가장 사랑하는 상대에게만큼은 전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름다운 소리들이 밤의 손에선 침묵했고 낮은 꺼지지 않는 활기로 인해 편안히 잠에 들 수 없었거든.
슬픈 일이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두 손을 꼭 맞잡았어.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함께잖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며 웃음을 지었지.
그렇게 얼마 후 두 사람은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땅을 찾아냈어. 하지만 그곳은 이미 따로 주인이 있었단다. 바로, 인간들이었지.
낮과 밤은 차마 그들의 터전을 빼앗을 수 없었어.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지.
다행히 얼마안가 또 다시 마음에 쏙 드는 곳을 발견했단다.
그런데 웬걸, 그곳은 생명의 소리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정령들의 안식처였어. 낮과 밤은 크게 실망했지. 그 순간, 어디선가 튀어나온 정령들이 낮과 밤에게 말했어.
“우리와 함께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아!”
낮과 밤은 기쁘게 받아들였어. 비록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는 아니었지만 모든 게 마음에 들었지.
왜냐하면 그곳은 정령들이 생명의 소리로 만들어낸 아주 아주 특별한 땅, 정령의 숲이었거든. 퍽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야.
푸아-
“켁, 컥컥!”
소리의 몸이 얕은 물에 의해 부드럽게 밀렸다.
소리가 모래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바닥에 철퍼덕 몸을 뉘었다.
뒤이어, 파랑이와 번의 인기척이 들리자 소리는 급히 몸을 돌려 그들을 살폈다.
다행히 물을 조금 마신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괜찮아?”
소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주 좋아.”
파랑이가 물과 모래를 뱉어내며 답했다.
이어 소리가 번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도 괜찮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을 뱉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잔잔한 호수에 발을 담가보았다.
얕은 바닥이 느껴졌다.
“분명 이곳에서 나온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리가 옆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깊은 호수 중앙에 던졌다.
첨벙하는 소리와 동시에 푸우 소리를 내며 호수가 돌멩이를 얕은 물가로 밀어냈다.
이에, 번이 믿기 어렵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솔직히 나는 모험가들은 다 허풍쟁이인 줄 알았어. 이제 그들이 나를 허풍쟁이라고 생각하겠는걸? 사람을 뱉어내는 웅덩이라니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소리가 손을 탁탁 털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듬성듬성 나무가 자라 있는 호수를 황폐한 사막에서 보기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지평선까지 펼쳐진 드넓은 모래들은 이곳이 황폐한 사막 어딘가의 위치한 오아시스일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내심 황폐한 사막을 벗어났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일까, 소리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파랑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좀 봐, 언덕이 있어! 소리야, 저게 네가 말한 그 모래 언덕 아니야?”
“설마 또 죽음의 모래 폭풍은 아니겠지?” 번이 지레 겁먹은 표정으로 말하자 파랑이가 쯧쯧 혀를 찼다.
“저렇게 가까운 위치에 모래 폭풍이 있었으면 네가 그런 모자란 말을 뱉기도 전에 널 덮쳐버렸을걸?”
파랑이의 말에 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리가 꽤 높은 언덕배기를 쳐다봤다.
“황폐한 사막의 모래 언덕을 넘으면 끝없는 강이 나온다…….”
작게 중얼거리던 소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리는 호수가 자기와 함께 뱉어낸 젖은 가방을 잽싸게 집어 들었다.
“느낌이 좋아, 올라가 보자!”
그러자 파랑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곁을 지나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그래, 설마 어디 다친 거야?” 소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파랑이를 살폈다.
그러자 파랑이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야. 이건 그러니까, 생사가 달린 문제니까…….”
파랑이의 심각한 얼굴에 번과 소리의 얼굴에 두려움이 한가득 담겼다.
“왜, 왜 그래. 또다시 죽음의 모래폭풍이 나타난 거야?”
번의 호들갑에 파랑이가 얼굴을 구겼다.
“그게 아니라! 우리 뭐 좀 먹으면 안 돼? 나 배가 고파서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고!”
파랑이가 얼굴을 붉히며 뱃가죽을 부여잡았다.
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놀랐잖아! 배가 고프면 그냥 고프다고 하면 되지. 뭐 그리 쓸데없이 사설이 길어! 그리고, 넌 이 상황에서조차 배가 고프냐?”
“이 상황이 뭐! 나도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배가 고픈 걸 어떡해, 안 먹으면 죽을 거 같은데 어떡해! 나 오늘 밥 한 숟가락 밖에 안 먹었단 말이야!”
파랑이가 짜증스럽게 외치자 소리와 번이 놀라운 듯 눈을 맞췄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했네? 올파랑, 많이 참았구나?” 번이 놀리듯 깐족대자 소리가 울먹이는 파랑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곧 굶어 죽을 뻔했겠어.”
그 순간, 번과 소리의 뱃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들려? 네들 뱃속 그지들이 욕하잖아, 제발 그 입 좀 닥치라고…….”
잠시 후, 파랑이가 모래 위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신경질적이게 흩뜨렸다.
“그 난리를 쳤으면 적어도 소리의 가방을 들고 왔어야지, 왜 쓸모없는 내 가방을 들고 오냔 말이야!”
파랑이가 소리쳤다.
“기껏 목숨 걸고 들고 왔더니,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해? 먹을 건 없지만 나름 쓸모 있는 것들도 있어!”
번이 빈 가방을 탈탈 털며 소리쳤다.
“그래,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런데 내 말은, 굳이! 그 난리를 치며 들고 온 게 왜 하필 이런 옷가지만 잔뜩 든 가방이냔 말이야……!”
소리가 잔뜩 굳은 번의 표정을 살피며 파랑이에게 눈짓했다.
“저 파랑아…….”
그러자 파랑이가 두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아, 몰라 몰라. 나 배고프면 예민해 진단말이야!”
파랑이가 울상을 지으며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신이시여, 듣고 계신가요?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시나이 까아!”
그러더니 갑자기 파랑이가 두 눈을 부릅떴다.
“파랑아, 일단 진정을 좀…….”
소리가 이상한 낌새에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하지만 파랑이는 아랑곳 않고 꼿꼿이 허리를 세우더니 무릎을 꿇어앉았다.
“신이시여, 딜을 청하옵니다. 불쌍한 저에게 먹을 걸 떨어뜨려주시면 앞으로 부모님 말씀 자알-듣겠습니다!”
소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게를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소리병들을 일부러 깨뜨리는 잘못된 행동 따위 앞으로 저얼대 하지 않겠습니다! 일이 하기 싫어 엄마의 차디찬 버섯국을 먹고 목이 데어 소리가 안 나온다는 말 같지 않은 핑계도 더 이상 대지 않겠습니다! 아, 엄마께 사죄하는 의미로 아빠가 몰래 숨겨놓은 비상금의 위치를 엄마에게 모두 발설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아빠 몰래 비상금에 손을 대고 있었단 사실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안 되겠죠, 저 올파랑 한점 부끄럼 없도록 이 죽어 마땅한 죄 부모님께 모조리 다 고백할 것입니다!”
“네가 참 잘도 그러겠다.”
번이 심드렁하니 중얼거리자 파랑이가 도끼눈으로 번을 노려봤다.
“저를 시험하고자 하는 저 추악한 놈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따악! 이번 한번만큼은 웃어넘기겠습니다! 으하하하하하하!”
“쟤 아무래도 미쳤나 봐.” 번이 관자놀이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소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정말 놀랍게도, 턱-
파랑이의 손바닥 위로 사과 하나가 떨어졌다.
“음?”
파랑이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정확히 떨어진 한 개의 사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소리와 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얘들아, 이거 신기루는 아닐 거잖아. 그렇지?”
파랑이가 떨리는 손으로 사과를 박박 문지르더니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그작- 와그작-
“이거 지, 진짜야!”
파랑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와 번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들이 어딘가에서 듣고 있는 게 분명한 신께 저마다의 기도를 올리려 할 때였다.
“푸흡, 크크 크큭! 정말이지 멍청함의 끝을 모르겠군.”
세 사람의 눈동자가 멍청히 허공에서 만났다. 하지만 곧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엄청난 스파크를 일으켰다.
"두더지 새퀴?" 파랑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의 무서운 얼굴이 한 곳으로 향했다.
말하는 두더지는 눈치 없이 사과를 베어 물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지금 내게 너무 고마울 거 아는데, 감사인사는 사양할게. 오글거리는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러면서 파랑이의 손에 들린 사과를 보란 듯이 가리켰다.
“그 사과는 배고픔에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는 모자란 인간에게 자비로운 두더지가 베푸는 아량 같은 거니까 넣어두고.”
자신에게 한껏 취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자꾸만 개소리를 시전 하는 두더지를 보며 세 사람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 순간, 번의 눈이 번뜩였다.
“야 올파랑, 너 배고프다고 했냐?” 번이 물었다.
“응”
“어느 정도?” 번이 다시 물었다.
“아마 두더지도 먹을 수 있을 만큼?”
파랑이가 진한 미소를 그리며 소리를 바라봤다.
“어떻게 가능하겠어?”
“아주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지. 생각해 보면 아주 쓸모없는 가방은 아니었어. 저 단백질 덩어리를 잡을 그물도 있고, 불을 붙일 수 있는 라이터도 있거든.”
소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모래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그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두더지는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를 눈치채고 손사래 쳤다.
“이, 이봐, 모지리들. 니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거 아니야.”
두더지가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싸더니 그들을 노려봤다.
“정신 차리라고 이 야만인들아!”
하지만 이미 세 사람에게 두더지는 차오르는 분노와 허기짐을 동시에 달랠, 아주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잡아!”
번의 외침과 동시에 소리와 파랑이가 잽싸게 튀어나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히, 나에게 이런 모욕감을 주다니……!”
말하는 두더지가 자신을 덮친 그물을 짜증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두더지 별거 없네? 그렇게 빠르다고 잘난 척을 하더니 결국 우리에게 잡혔잖아. 그것도 배가 몹시 고픈 우리에게 말이지?” 번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달렸어야지. 넌 너무 오만해. 왕두더지.” 소리가 라이터에 불을 껐다 켰다 하며 그를 노려봤다.
이에, 말하는 두더지가 작게 몸을 떨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 따위, 역시 도와주는 게 아니었어!”
두더지는 신나게 술래잡기에 응하던 자신을 넘어뜨린 나뭇가지를 발로 걷어찼다.
“너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했는데, 으은혜?”
파랑이가 말하는 두더지에게 삿대질을 하며 윽박지르자, 두더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지! 나 아니었으면 벌써 아까 머리가 터져 죽어 버렸을 놈들이, 이런 배은망덕한……!”
두더지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세 사람을 노려보자 그들은 동시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그럼 도와주려면 끝까지 제대로 도와줬어야지! 모래두더지들은 말 못 한다며! 걔네들이 다 같이 소리를 내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내릴 때, 우리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파랑이의 말에 두더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두더지들이 소리를 냈다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심드렁히 답했다.
“동굴이 무너져 깔려 죽는 것보다 쫓기는 게 훨씬 낫지 뭘 그래?”
“그, 그건 생각해 보니 맞는 거 같기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파랑이가 짜증 섞인 얼굴로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 잡았다.
“아, 짜증 나. 나도 모르게 인정했어!”
두더지가 코웃음을 치며 그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래서, 네들은 그 모자란 머리로 도대체 어느 땅에 가려고 이 위험한 사막에 발을 디딘 거야?”
두더지의 질문에, 소리가 뜨끔하며 그와 눈을 맞췄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뭐 네들이 도망자라 해도 그저 내 재미없는 일상에 유희거리가 된다면 뭐든 상관없거든. 하지만…….”
말하는 두더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리를 바라봤다.
“길잡이를 찾는다는 건,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거거든. 멍청한 네들이 범죄자는 아니라는 거지.”
“우리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단지, 그뿐이야.”
두더지의 검은 눈동자에 세 사람이 담겼다.
“이 사막에 발을 들이는 멍청한 인간들은 모두 한 번씩 알게 모르게 그 길잡이의 도움을 받아.”
“이 사막에서 말이야? 끝없는 강이 아니고?"
"그래."
세 사람이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두더지를 바라봤다.
"혹시 너, 그 길잡이를 아니?”
소리의 말에 두더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잘 알지.”
“그럼 우리를 그에게 데려다줄 수 있어? 우린 꼭 그 특별한 길잡이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글쎄, 조금 전 나에게 부린 패악질만 아니었다면 사정사정하는 네들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쉽게 됐어.”
말하는 두더지가 히죽 웃어 보였다.
“저게, 또 우릴 갖고 놀려고 밑밥을 아주 정성스럽게 까네?”
파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자 두더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쟨, 인간의 탈을 쓴 동물인가?”
두더지가 말에 번이 재빨리 말했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파랑이가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소리가 등으로 파랑이의 시야를 가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나는 어, 소리야. 그 넌 누구니, 아니 누구세요?”
두더지가 미간을 좁혔다.
“도저히 그 질문의 뜻을 유추할 수 없군. 넌 내가 뭘로 보이지?”
“음, 두더지?” 소리가 말했다.
“대답이 된 건가?” 두더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아니 아마도요?”
두 사람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소리가 코를 훌쩍이며 두더지를 쳐다봤다.
“그런데 다른 두더지들에 비해 어려 보이던데, 그러니까 제 말은 다른 두더지들에 비해 몸집도 좀 작고 인간으로 치면 우리랑 나이도 비슷할 거 같은데 서로 편하게 대하는 건 어때요?”
“난 그들의 왕이지”
“아, 네.”
“하지만 너희들의 왕은 아니지.”
“그, 렇죠?” 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러니까 그 말은 서로 편하게 해도 된다는 뜻……?”
두더지가 한심하다는 듯 소리와 눈을 맞췄다.
“아니, 네들이 날 어떻게 대하든 내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지.”
두더지의 말을 들은 파랑이와 번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거만하고 오만한 데다가…….” 번이 말했다.
“싸가지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파랑이가 말했다.
소리가 그들을 노려보는 두더지를 달래려는 듯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그, 그래. 그럼 말을 좀 편하게 할게. 물론 당연히 너도 그렇게 해!”
“난 원래 나보다 모자란 사람에겐 존대하지 않아. 그 말인 즉, 난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존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에게도.”
“와 진짜 먹은 것도 없는데 왜 이리 듣기 거북하지? 내가 쟤 아빠였잖아? 진짜 털 다 뽑아버렸어.”
“불효막심한 놈, 난 아까 먹은 사과가 올라오려고 해.”
두더지가 이빨을 드러내자 소리가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관심을 끌었다.
“저, 두더지야. 말은 가끔 저렇게 못되게 해도 심성은 착해. 진짜야? 하하, 일단 우리를 간단히 소개할게. 우린 소리의 땅에서 왔어. 이 사막과 멀지 않은 곳이지.”
소리의 말에 말하는 두더지가 조금 놀란 듯 그들을 바라봤다.
“소리의 땅에서 온 여행자라고……?”
“그래, 이 사막에 발을 들이는 여행자를 보는 게 설마 처음이니? 하하, 그럴 수도 있지. 자, 봐 인간은 이렇게 생겼어. 예쁘기보단 귀엽고…… 조금 멋있게.”
두 사람을 가리키는 소리의 손끝이 떨렸다. 그러자 두더지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 거짓말쟁이들이 틀림없군. 황폐한 사막은 수많은 땅과 연결된 곳이야. 다른 땅으로 가기 위해 사막을 지나치는 인간들은 수두룩하지. 덧붙여, 난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 네들이 인간나부랭이들의 미의 기준에서 얼마나 덜떨어진지 정도는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단 소리야.”
두더지가 자신을 한껏 뽐내 듯 어깨를 들썩였다.
바닥에 드러누워 이상한 포즈를 취하던 파랑이와 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면, 소리의 얼굴엔 작은 희망이 깃들었다.
“그, 그럼 혹시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지났던 사람들의 얼굴도 기억할 수 있어? 한, 10년 전 이곳을 지난 여행자라던가…….”
“당연히 기억해.” 두더지가 심드렁히 말했다.
파랑이와 번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그럼 혹시 소리의 땅에서 이곳을 찾은 여행자 알아? 그러니까 두 사람이었는데…… 아, 어떻게 생겼냐면……!” 소리의 손이 작게 떨렸다.
소리가 무언갈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파랑이의 가방을 보고 실망감에 휩싸였다.
“아…….”
가족사진이 담긴 가방은 아마, 지금쯤 두더지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쓰레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파랑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세는! 너 다시는 지랄 맞게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알았어?”
파랑이가 두더지를 짜증스럽게 흘기더니 소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소리야, 10년 전이야.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 해도 누구도 한번 본 사람을 기억해 내긴 어려울 거야. 그게 두더지라면 더더욱……!”
파랑이가 이를 악물며 두더지를 흘기자 번도 짜증스럽게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재수 없는 놈…….”
싸늘해진 분위기 속, 묘한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던 두더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멍청이들을 만나 재미 좀 보려 했는데 네들은 그럴 가치도 없어. 그러니 고요의 땅에 가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접고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난 늘 그곳에 발을 들이려는 멍청한 여행자들에게 이 말을 해주지. 그곳에서 네들은 절대 무사할 수 없어.”
“우리가 고요의 땅에 가려는 걸 어떻게……?” 번이 놀란 듯 묻자, 두더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았냐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해? 난 그저 네들에게 오만하고 재수 없는 두더지일 뿐인데.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두더지가 그들을 지나쳐 사막을 향해 걸어갔다.
“네놈들이 찾는 그 특별한 길잡이 녀석도 네들의 목적지가 고요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꽁지 빠지게 도망갈걸? 그 녀석은 아주 비겁하고 나약한 겁쟁이거든. 그러니 지금이라도 날 따라온다면 내가 특별히 소리의 땅 입구정도까지는 데려다…….”
뒤를 돌아본 두더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겁을 먹고 자신의 뒤를 따라올 거라 생각했던 세 사람은 언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소리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두더지와 눈을 맞췄다.
“저기 별로 궁금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난 꼭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그곳에서 꼭 밤을 만나야 하거든!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위험에 빠진 우릴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어! 있지, 아마 난 평생 널 잊지 못할 거야! 잘 있어, 두더지야!”
두더지를 향해 인사를 마친 소리가 다시 씩씩하게 사막의 모래언덕을 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두더지의 까만 눈동자가 소리의 걸음걸음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