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의 시도 끝에 몸의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일으켜 세운 소리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더지들의 눈치를 살피던 파랑이가 무릎을 끌며 슬금슬금 소리에게 다가갔다.
“아까 잠깐 쉬고 있는 사이 네가 또 잠들었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저 모지리가 죽은 거 아니냐고 설치류처럼 설쳐대잖아. 소리소리 질러가며 호들갑을 떨어대는데, 진짜 꼴 사나워서!”
“아니거든? 내가 언제 난리를 쳤다고!”
번이 부끄러운지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 그 듣기 싫은 엄청난 고성방가에 두더지들이 짜증이 나서 몰려온 거 아니야! 이 두더지 대가리 보다 못한 돌 대가리야!”
“무어어어? 돌, 대가리이이?”
번이 짜증스럽게 끝음을 올리며 억울한 하다는 듯 소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파랑이의 작명센스에 무언의 감탄을 표하는 소리를 보며 번은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저 녀석 때문에 이 이상한 곳에 끌려온 건 확실해."
"솔직히 친구가 죽은 듯 쓰러졌는데 안 놀라는 네가 이상한 거 아냐?”
“그게 생각이라는 걸 하는 나와 너의 차이지.”
이에, 소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두더지 한 마리가 파랑이와 번의 머리를 동시에 콩 하고 때렸다.
순진한 두더지의 귀여운 행동에 파랑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두더지들을 욕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배실 배실 웃었다.
“얘네들 꽤 귀엽지 않아? 나름 조용히 하라고 머리를 때리는 거 같은데 하나도 안 아파, 그래서 더 귀엽고 사랑스럽달까?”
오, 그걸 눈치챘단 말이야? 소리는 또 한 번 파랑이의 센스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번이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쟤네가 귀여워? 다 네 친구들 같아서 동질감 같은 거라도 느끼나? 뭐 파랑이 너라면 쟤네들이랑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긴 해. 암, 그렇고 말고. 푸하하하”
“너? 진짜 죽어볼래?”
파랑이가 무릎을 세우더니 도끼눈을 뜬 채 번을 향해 기어갔다. 그러자 번이 얄밉게 혀를 쭉 내밀더니 재빠르게 달아났다.
“푸하하하? 파랑돼지는 느리쥬? 무겁쥬? 절대 못 쫓아오쥬?”
“저, 저 개 xx가! 내가 살이랑 작별인사 한지가 언젠데! 너 오늘 나한테 죽어 볼래?”
두 사람의 괴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두더지들은 맑은 눈으로 파랑이와 번의 경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두 사람이 자신들의 앞을 지나 칠 때마다 응원이라도 하듯 그들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소리는 그때를 틈타, 두더지들 사이에 놓인 두 개의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 가방을 왜 두더지들이 갖고 있는 거지?”
소리가 가방을 가져오기 위해 무릎을 세울 때였다. 소리의 뒤로 검은 형체가 빠르게 접근하더니 그녀의 밧줄을 잡아당겼다.
알 수 없는 힘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소리는 이어 꽁꽁 묶인 손목 위로 낯선 손길이 느껴지자,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호, 혹시 두더지 요정님? 아 그러니까, 도망치려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제 가방이 저기 있길래……실망하신 두더지 요정님들께 사과 대신 다른 음식을 드리면 어떨까 싶어서……!”
소리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보다 조금 더 빨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당장 네 친구들한테 입 다물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머리가 깨져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소리의 눈이 커졌다. 우리 말고 이방인이 또 있었단 말이야?
“호, 혹시 여행자세요?”
소리는 손목을 꽉 동여맨 밧줄이 느슨해지자, 재빨리 상체를 돌려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보이는 검은 눈동자, 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혹시 방금 네가 말한 거니?”
소리의 눈앞에 소리가 찾던 이방인은 없었다. 대신 그녀 몸집의 반 정도나 될까 싶은 작은 크기에 두더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를 흘기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두더지가 사람 말을 할리가 없잖아”
소리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손가락 하나로 두더지의 배를 쿡 찔렀다. 그러자 작은 두더지가 표정을 굳히며 그녀의 손을 쳐내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네 멍청한 친구들을 죽게 둘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
“그, 그게 무슨?”
소리는 어느 순간 울리지 않는 진동에 불안함을 느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날 선 공기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발을 구르며 저들끼리 대화하던 두더지들은 가만히 멈춰 선채 파랑이와 번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들의 단단한 손톱은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갈가리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날카롭게 서있었다.
소리가 황급히 파랑이와 번을 향해 소리쳤다.
“두, 두 사람 다 조용히 해!”
하지만 파랑이와 번은 소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가볍게 무시한 채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곧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두더지가 한 발자국 떼자, 다른 두더지들이 똑같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를 본, 소리가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터져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입 다물라고!”
소리의 고함에 놀란 두 사람이 합하고 입을 다물고는 씩씩 대는 소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소리가 말없이 떨리는 손끝으로 두더지들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마……!”
두 사람은 뒤늦게 순진할 줄만 알았던 두더지들이 무서운 살기를 내뿜으며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순간 조용해진 땅굴 안, 소리의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터진다는 건 꽤 끔찍한 일이지. 크큭”
소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다행히 두더지들은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다시 손과 발을 사용해 바닥과 몸을 치며 그들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파랑이와 번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엎드린 채 슬금슬금 소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과 발을 풀어준 범상치 않은 두더지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소리야, 이 두더지, 아니 우릴 구해준 이 천사 같은 두더지님은 누구셔?”
파랑이가 일부러 들리라는 듯 두더지를 의식하며 묻자, 소리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두더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은…….”
“뭐야, 이 두더지 말도 할 줄 알잖아?”
번이 놀라 큰 소리를 내자, 근처에 있던 두더지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다시금 그를 향했다.
“입 다물어. 이 모지리야.” 말하는 두더지가 번의 머리통을 조금 세게 내리쳤다.
“풉, 어쩜, 두더지님도 네가 모지리인걸 한눈에 알아보시네?” 파랑이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번을 향해 깐족거리자 번이 억울하다는 듯 머리통을 부여잡고 파랑이를 노려보았다.
“그만 까불어라?” 번이 이번에는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두더지가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그리고 이번엔 작게 말했다고!” 번이 미간을 좁히며 두더지를 노려보자 두더지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번과 눈을 맞췄다.
“두더지들은 자신들의 대화를 방해하는걸 가장 싫어해. 머리를 손으로 찍는다는 건, 조용히 하지 않으면 정확히 10초 후, 네 머리를 박살 내 버리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지. 아까는 아슬아슬하게 9초였고 지금 나도 너에게 경고한 거야. 그 망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네 쓸모없는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겠다고 말이지.”
말하는 두더지가 흰 이를 드러내며 경고하자 번이 놀라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두더지가 쯧쯧 혀를 차며 세 사람을 흘겼다.
“곧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멍청한 네놈들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어, 저들의 대화를 직역해 주지.”
“아니, 그러지 않아도…….”
분명 들어도 정신적으로 이롭지 않을게 분명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소리보다 두더지가 조금 더 빨랐다.
“녀석들은 우리를 속였다. 부대장에게 자신들은 두 명이라고 우겨대며 사과를 2개밖에 주지 않았지.”
말하는 두더지가 그들을 한심스러운 얼굴로 힐끗 쳐다보자 세 사람이 뻘쭘한 듯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저 거짓말쟁이 녀석들을 죽음의 우물에 던져 버리자. 그럼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하지만 우린 저 녀석들의 가방을 가져왔다. 저 가방엔 신기한 물건도, 음식도 많이 들어있다. 자비를 베풀어 손과 발은 풀어서 던져주자.”
“지금 저 두더지들이 우리 가방을 훔치겠다고, 아니 훔쳤다는 거야?” 번이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두더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먼저 저들에게 거짓말을 한건 너희잖아. 순서가 조금 바뀐 거뿐이야. 그 자리에서 너희를 바로 죽였다면 저 가방은 그냥 부산물이었을 뿐이지.”
이에 번이 할 말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자 두더지의 친절한 통역은 계속되었다.
“그건 안된다. 극악무도한 거짓말쟁이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파랑이가 사색이 된 채 중얼거렸다.
“뭐, 극악무도한 거짓말쟁이? 지들은 사과 한 개 모자라다고 우리 가방까지 빼앗아간 주제에! 심지어 우릴 죽음의 우물인가 뭔가에 던져 죽여 버리겠다고? 저 양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몸집만 큰 두더지 녀석들을 어떻게 손봐주지?”
“아까는 귀엽다며?”
번이 비아냥 대자. 파랑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주제로 두더지들은 한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을 거야. 어쩌면 네들이 굶어 죽는 게 더 빠를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네들의 손과 발 정도는 풀어줄 자비정도는 베풀어도 괜찮다는 의견이라서 했던 행동이니까 오해는 말도록.”
말하는 두더지의 말에 세 사람이 멍하니 두더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말하는 두더지가 혀를 찼다.
“내 얘기를 듣고도 멍하니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네들의 결말이 어떨지 뻔히 예상되는군. 재미없긴…….”
말하는 두더지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자 잠시 우물쭈물하던 소리가 벌떡 일어나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그렇게 가버리면……!”
두더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를 쳐다봤다.
“뭐야”
소리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당신 맞죠?”
말하는 두더지가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자 소리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 맞잖아요! 위기에 처한 여행자들의 앞에만 나타나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설마 소리 쟤, 저 두더지가 특별한 길잡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파랑이의 중얼거림에 번도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맞죠? 특별한 길잡이”
파랑이와 번이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말하는 두더지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내 흥미롭다는 듯 소리를 바라보았다.
“뭐가 동아줄인지는 아는 걸 보니 너는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닌가 보군. 하지만 틀렸어. 난 그딴 게 뭔지 모를뿐더러 이미 네들에게 흥미가 식어버렸거든.”
두더지가 미련 없이 팔을 홱 빼내더니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스러운 건 알겠는데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 아닐까? 방금 전 두더지 말대로, 쟤들은 우릴 신경도 안 쓰는 거 같거든.”
번이 턱끝으로 슬쩍 두더지들을 가리켰다.
두더지들은 죄인들이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열심히 발을 굴러댔다.
"그래, 일단은 살고 봐야지."
세 사람이 최대한 몸을 낮춘 채, 두더지들 사이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소리야, 그런데 어째서 넌 아까 그 두더지가 특별한 길잡이라고 생각한 거야? 쿠로할아버지가 특별한 길잡이에 대해 뭔가 더 하신 말씀이 있는 거야?”
파랑이의 물음에 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생김새나 특징 같은 건 적혀있지 않았어. 하지만 낯선 여행자들을 돕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건 알아. 그래서 우리를 도와준 저 두더지가 혹시 특별한 길잡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소리의 말에 파랑이가 어딘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난 특별한 길잡이가 우리와 같은 인간일 거라 생각했는데, 소리 넌 편견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구나. 아주 훌륭해.”
“그런데 내가 착각한 게 맞아. 생각해 보니 특별한 길잡이는 끝없는 강을 건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기적처럼 어디선가 나타난다고 하셨거든. 아마, 부모님이 끝없는 강에서 죽을 뻔했던 모양이야.”
파랑이의 표정이 굳었다.
“죽을 위기라니?”
하지만 소리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파랑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우리가 그곳에서 죽을 위기에 처할 일은 없겠다. 불행히도 지금 닥쳐버렸으니 말이야. 특별한 길잡이를 기대할 수 없는 황폐한 사막 어딘가에 있는 이 땅굴 속에서 말이야.”
“맞아. 그게 중요한 포인 트지.”
소리가 빠르게 답했다.
“너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지?”
파랑이의 신경질 적인 목소리에, 소리가 모른 척 앞으로 기어나갔다.
그때, 뒤따라오던 번에게서 짧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와 파랑이가 놀라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번, 너 뭐 해!” 소리가 놀란 듯 작게 쇳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번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두더지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두더지들 틈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번의 그림자를 찾으며 소리와 파랑이는 적잖이 당황했다.
“야! 너 당장 이리로 안 와?”
파랑이가 몸을 한껏 낮춘 채 작게 포효했다.
그녀의 엄청난 존재감에 번이 두더지들 발 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걱정하지 마"
번이 작게 입모양으로 떠들더니 덩치 큰 두더지를 가리켰다.
"거기, 아니고 저기"
번의 손끝이 두더지의 발 밑, 소리와 파랑이의 여행가방으로 향했다.
이제야 그의 이상행동을 이해한 소리와 파랑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번을 쳐다봤다.
하지만 번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응원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씩 한번 웃어 보이며 금세 다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저 모조리, 왜 데려온 거야. 아까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파랑이가 이를 악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실수야."
“아마 우린 여기서 죽을 거야, 시체도 찾을 수 없는 황폐한 사막 어딘가에 있는 땅굴속에서.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난 이런 죽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엄마 아빠 이 못난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얘와 저 모지리는 용서할 필요 없어요.”
파랑이가 원망스럽다는 듯 소리를 흘겼다. 이에 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랑이 넌 너무 비관적이야."
번은 두 사람이 자기로 인해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가 된 줄도 모르고 가방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기어갔다.
사막에 무작정 따라온 뒤로, 두 사람에게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번의 조금, 아니 꽤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
“소리를 돕기로 했잖아, 가방을 가져다주면 분명 좋아할 거야.”
번은 점점 가까워지는 가방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방과의 거리가 불과 1미터도 되지 않았을 때 작은 설렘과 함께 손을 쭈욱 뻗었다.
그때였다.
두더지 한 마리가 두더지들의 다리 틈 사이로 번을 향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재밌네! 이 상황에 가방까지 챙기시려고, 용기가 가상한데?”
말하는 두더지였다.
번의 심장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엄청난 비명이 꽤 길게 한참을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는 괴성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보다 못한 두더지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번의 입을 탁 소리 나게 때렸다.
“용기는 가상한데, 담력은 없네. 입 좀 닫아.”
한편, 번을 돕기로 한 소리와 파랑이는 그의 비명 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순간, 수많은 두더지들의 시선이 번에게 쏠렸다.
소리와 파랑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젠 정말 우리만이라도 튀어야 할거 같거든?”
파랑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래야 하겠지?”
하지만 말뿐일 뿐, 공포로 뻗뻗하게 굳은 몸은 쉽사리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번의 뒷모습만 바라볼 때였다.
말하는 두더지가 혀를 끌끌 차더니 세 사람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두 번 말 안 한다. 지금부터 살고 싶으면, 뛰엇!”
"뛰엇?"
"뛰, 뛰어!"
거짓말처럼 소리와 파랑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필사적으로 땅굴 입구로 보이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 순간 소리는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 틀림없다고.
두더지들의 시선이 도망치는 소리와 파랑이에게 쏠렸다.
그러자 그때를 틈타 번이 눈앞에 있는 가방 하나를 낚아챘다.
“가, 같이 가!”
번이 두더지들 틈 사이로 발 빠르게 내달렸다.
그러자 말하는 두더지가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자, 네들은 어떤 선택을 할 거지?"
헉헉 대며 도망치고 있는 소리의 옆으로 말하는 두더지가 바짝 뒤쫓아왔다.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 중, 참 안타까운 말이지만 어디로 도망치든 네들은 두더지들 손바닥 안이야.”
말하는 두더지가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평온히 말했다.
“도, 도와주세요!”
소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말하는 두더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눈썹을 들썩였다.
“물론, 내가 도와주면 네들이 살아나갈 확률이 100퍼센트이긴 해……. 하지만 아주 큰 문제가 있지.”
“그, 그게 뭔데요? 헉헉” 소리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내가 너흴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거? 이걸로 너네가 살아나갈 확률은 0퍼센트가 됐어. 아니 그냥 쭈욱 0퍼센트였지.”
말하는 두더지가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소리는 당장이라도 작은 두더지 녀석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꽉 붙들어 맸다.
“사, 사과! 사과 좋아하죠? 저흴 무사히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사과를 잔뜩 가져다 드릴게요, 정말이에요!”
“흠, 별로 안 당기는 데에- 그리고 두더지의 선의에도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네들의 말 따위를 내가 어떻게 믿지?”
말하는 두더지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목숨 가지고 장난칠 만큼 지금 그렇게 한가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소리가 이를 꽉 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랑은 상관없어. 난 너무 지루해서 벽에 코라도 갖다 박을 수도 있을 만큼 한가한 데다가 우리에겐 매번 사과를 잔뜩 갖다 바치는 호구 녀석 하나 가 있거든.”
참다못한 파랑이가 험악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저, 저 두더지 새퀴, 소리야 말 섞지 마, 전 새퀴는 우릴 살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그냥 갖고 노는 거라고! 저 사이코 새퀴! 너 내가 죽으면 가만 안 놔둬?”
그러자 말하는 두더지가 무심히 답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너, 너 이새퀴! 내가 귀신이 돼서도 쫓아다닐 거야! 내가, 내가 못할 거 같아?”
파랑이가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두더지를 노려봤다.
“그럼, 어디 한번 죽어봐. 난 내 인생이 정말이지 너무 따분하거든. 평생 나 따라다니는 뚱보 귀신 하나쯤 있었으면 했어. 근데 나 달리기 엄청 빠른데, 만약 그게 너의 가장 빠른 속도라면 날 따라다니는데 좀 무리가 있을 거야. 귀신도 관절염이 생길 수 있나?”
어느새 그들의 뒤를 쫓고 있던 번이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랑이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보란 듯이 두더지의 앞을 치고 달려갔다.
“오?” 두더지가 재밌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잠시 후,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파랑이는 점점 밀려나 결국 제일 뒤에서 힘겹게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말하는 두더지가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느려터져서야, 쯧쯧"
그제야 소리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두더지는 절대 보통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인간의 말을 하는 것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지 않은가.
번은 아직도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수많은 두더지들을 돌아봤다.
“소리야, 아무래도 저놈들 이걸 놀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우릴 잡을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고 있어.”
번의 말대로 그들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래, 저들은 걷고 있었다. 심지어 세 사람을 쫓으며 그림을 그리거나? 음료를 즐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하는 두더지들도 보였다.
번의 말에 소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완전 돌대가리는 아니잖아?”
말하는 두더지의 비아냥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닭대가리쯤은 되는 거 같군."
소리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두더지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나가게만 해준다면 뭐든, 뭐든 들어 줄게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리는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물론, 인간이 두더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특이한 두더지라면 분명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아직까지 자신들을 쫓아오는 이유일테니까.
소리의 예상대로 말하는 두더지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소리를 바라봤다.
“뭐든?”
“그래! 뭐든! 그걸로 당신의 지루함쯤, 잠깐은 달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빨리 방법을 찾아줘요! 이제 더는 못 달린다고요!”
소리가 원망 섞인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두더지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흔쾌히 말했다.
“좋아, 따라와”
그제야 세 사람의 어두웠던 낯빛이 조금 밝아졌다.
말하는 두더지는 지금 까지 보인 속도는 맛보기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멀리 보이는 둥그런 입구를 가리켰다.
“아까 네들이 있던 방이야. 저 동굴 안에 있던 우물 봤지? 그곳으로 뛰어내려!”
“우물 속으로 뛰어들라고요?”
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네들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야. 그곳은 두더지들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곳이거든”
“저 돌도 씹어먹을 거 같은 두더지들이 우물 따위 무서워한다고? 두더지들은 수영 못하나?”
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랑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우리가 본 그 우물, 재들이 아까 우릴 던져 죽이겠다고 한 죽음의 우물인가랑 같은 곳은 아니겠지?”
두려움에 가득 찬 파랑이를 향해 말하는 두더지가 얄밉게 히죽 웃었다.
“네들이 가끔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는 게 신기하군. 약간의 흥미가 생겼어.”
말하는 두더지의 말을 들은 파랑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나, 난 수영 못해!"
“파랑이 말대로 저기가 두더지들이 말한 죽음의 우물이라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소리가 겁에 질린 파랑이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그냥 저들 손에 죽던가, 난 네들이 무슨 선택을 하던지 상관없어”
“만약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 가만 안 둬요. 난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거든요.”
소리의 엄포에 두더지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날 따라다니는 귀신 세 마리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소리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확실히 지금으로선 저 두더지가 세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떠드는 사이, 조만간 그들의 눈앞에 죽음의 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구멍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그림자는 점점 더 거대해져 괴물의 형상을 그렸고 그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모한 그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두려움에 질려 보이는 환영 따위 굶 주린 늑대의 뱃속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아닐 테고, 그 또한 두더지들의 날카로운 손톱에 머리통이 터져 죽는 것보단 백번 천 번 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