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늘 똑같은 일상 속 드디어 그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찾아왔다
마일과 레나, 쿠로할아버지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 곳을 응시했다.
“아버지 보셨어요? 입꼬리 들썩이는 거? 제가 옆에 있는 걸 알고 웃은 거예요.”
“실없는 소리, 할아비인 줄 알고 웃은 거지!”
레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아기의 앞에서 철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부자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여보, 너무 고생했어.”
“아가, 너무 수고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곧 가게의 문이 열리며 멈췄다.
덜컹-
한 노파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마일이 난감한 얼굴로 노인을 향해 말했다.
“어이쿠 손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개인적인 이유로 영업을 하지 않거든요…….”
그러자 쿠로 할아버지가 마일을 향해 작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팻말을 조금 크게 써붙이지 않고……! 손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째선지 노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니 곧 작은 침대 안에서 곤히 잠든 소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직 밤만이, 자신이 내린 저주를 끝낼 수 있다.”
레나는 어딘가 이상한 낌새에 지친 몸을 이끌고 재빨리 소리를 안아 들었다.
“아, 아가 아직 그렇게 움직이면!”
“뭡니까?”
마일이 소리를 안아 들고 숨을 헐떡이는 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이만, 나가 주시죠.” 마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이번엔 쿠로할아버지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쫓아낼 거요!”
그러자 노파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문이 열리면 생명의 소리는 사라질 것이고, 모든 만물의 불행과 고통, 두려움을 받아 힘을 얻은 저주의 근원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하지만 잠든 밤의 심장을 꺼낼 소녀가 제 할 일을 다하면 그와 함께 저주를 몰아낼 것이다!”
노인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마일이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쿠로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분명해요. 아버지 뒤로 물러나세요!”
그 순간, 노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가게 중앙에 서서 우두커니 시계를 쳐다보더니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 아이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신의 숨결이 닿은 사명이 더해져 아주 강력하지. 때문에 한낮 인간이 그 아이의 운명을 바꾸려 한다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나의 말을 새기고 있는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여라. 물론, 그러지 못할 테지만…….”
노파가 끌끌 혀를 차더니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이곳은 그 아이가 열게 될 문, 그곳에서 밤을 찾아라.”
새하얀 빛이 노인을 감싸더니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시계는 정확히 10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세 사람은 바닥에 새겨진 낯선 문양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
소리가 들려준,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번과 파랑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엔 믿지 못하셨대. 하지만 다음날 그 문이 열리고, 또 열리고, 결국 직접 그곳에 발을 들인 부모님은 노파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지.”
“동시에 소리 네가 어떤 위험에도 빠지질 않길 바라셨을 거고”
파랑이가 슬픈 듯 중얼거리자 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하늘을 보며 빌고 또 빌었대. 제발 그 사명을 도로 가져가 달라고, 하지만 그 비밀통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늘 같은 시각만 되면 조금도 틀림없이 열렸지. 할아버지는 절망에 빠진 부모님과 아무것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어대는 나를 보며 무척이나 괴롭고 가슴이 아프셨대.”
소리가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부모님은 내 빌어먹을 운명을 대신지기로 하셨지. 소리시장을 찾은 수많은 여행자들을 통해 정보를 긁어모으고 그들에게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했대. 두더지들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정보도 그때 알게 되신 거 같아. 그렇게 몇 달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드디어 비밀통로를 이용해 황폐한 사막에 발을 디디셨지. 그리고 준비한 대로 이곳에 들어오셔서 땅굴 조사를 시작하셨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두 분 다 성격이 꽤 신중하셨던 모양이야. 그렇게 며칠에 걸려 조사를 끝마치고 무사히 가게에 돌아온 두 분의 첫마디는 두더지가 굉장히 친절하다였대.”
“그럴 리가” 번이 얼굴을 굳히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떠나시기 전에도 두 분이 가게에 자주 없으셨구나?”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소파 위에 있는 모빌 봤지? 별 조약돌로 만든 거야. 이걸 누가 줬겠어?”
“자신들에게 사과를 준 이방인에게는 그래도 인간 대접은 해주나 보네.” 파랑이가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여러번 방문끝에 두분은 특별한 길잡이를 만났고, 그와 함께 고요의 땅에 갈 수 있다며 확신했대. 할아버지는 두 분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드디어 날 구할 수 있다며 기뻐하시는 두 분을 차마 말리지 못했대. 그렇게 두 분은 호기롭게 떠나셨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지.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난 마지막까지 할아버지를 원망했어. 부모님도…….”
파랑이가 소리의 손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해”
“너한테 사과를 들을 이유는 없어. 번, 이건 너와 전혀 관계없는 문제니까.”
소리가 어깨를 들썩였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난 지금껏 네 아버지가 우리 부모님을 사지에 내몰았다고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그 반대였지. 어린 널 두고 친구를 찾겠다며 고요의 땅으로 떠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네가 받았을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오늘에서야 알게 돼서 내가 더 미안해.”
소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난 아버지가 네 가게를 뺏으려고 마을사람들을 선동해 너와 할아버질 힘들게 하는 걸 알면서도 방관했어. 그리고 널 지켜주기는커녕 괴롭혔고 상처 줬지. 그런데도 내게 널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소리가 번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우린 친구잖아, 기회라니 그런 말은 옳지 않아. 내가 너에게 실망하는 일도 없을 거야. 오늘, 날구하러 달려와줘서 고마워. 번”
소리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파랑이가 작게 흐느끼는가 싶더니 결국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내가 네들 사이에서 얼마나 상처였는지 알아? 내 성격을 받아주는 친구들은 딱 너희 둘 뿐이었는데, 네들이 그렇게 되고 나 정말 외로웠다고! 소심한 소리, 모지리 번과 함께 하는 그날이 너무 그리웠단 말이야 흐앙!”
파랑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이제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번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래, 뚱보 너 없이 혼자 딸기케이크를 먹으러 갈 때마다 한 조각을 다 먹을 수 있어도 행복하지가 않았어. 웃기게도 늘 내 반조각을 빼앗아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먹던 남은 반조각이 더 맛있었거든.”
번이 살짝 눈물을 훔치며 피식 웃었다.
“넌 한 조각을 다 먹은 적이 있구나? 난 아직까지도 반쪽밖에 못 먹어봐서……. 한 조각은 맛이 별로니?”
소리가 파랑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자 파랑이가 팔을 휘저으며 두 사람을 떨어뜨렸다
“너희 진짜 죽는다? 흑,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내가 뭐 반쪽만 먹으라 그랬어? 네들이 나보고 먹으라며! 배부르다며! 내가 어릴 적 그렇게 뚱뚱했던 건 사실 네들 때문이야! 흑흑”
파랑이가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찔린 듯 다시 정정했다.
“아니, 네들 때문 이기도 해. 네들이 보태준 거지! 요만큼만 찔 거 더 찌도록!”
소리와 번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파랑아, 울든 화내든 한 가지만 하는 게 어때?”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안 주냐? 그래도 네가 먹는 걸 보면 없던 식욕도 돌아오곤 했지. 괜히 나도 전투적으로 변한달까?”
번이 파랑이를 힐끔 쳐다보며 놀리듯 말하자 파랑이가 씩씩거리며 그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러자 소리가 급히 두 사람을 막아섰다.
“됐고,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게 뭔지 잊었어……?”
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팔을 벌리자,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파랑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 행복을 다시 찾았다는 거지!”
세 사람은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깊은 오해와 애써 내색하지 않은 마음의 상처들에 딱지가 생기며 빠르게 아물었다.
끈끈한 우정의 꽃이 피어올라 아름다워지는, 세 사람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할 지금 이 순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는 눈앞에 보이는 캄캄한 어둠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잠깐 쉰다는 게 또 잠을 잔 게 분명했다.
그때, 파랑이가 쇳소리를 내며 발끝으로 소리의 팔을 세게 툭툭 밀쳤다.
“참소리! 지금 잘 때가 아니야, 어서 일어나라고!”
이어, 번도 쇳소리를 내며 소리의 머리를 자신의 손끝으로 툭툭 쳤다.
“소리야, 그러니까, 주, 죽은 게 아니라면 어서 눈을 떠! 지금 눈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소리가 그들을 향해 짜증을 표출하려 할 때였다. 차가운 바닥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놀란 소리가 슬며시 눈을 떴다.
“얘들아, 땅이 좀 울리는 거 같지 않아……?”
“어? 소리야, 정신이 좀 들어? 파랑아, 소리 살았어!” 번이 기쁜 듯 몸을 흔들자 파랑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아까부터 잠든 거라고 했잖아!" 파랑이가 소리쳤다.
“근데 나 몸이 안 움직이는 거 같은데!” 소리가 버둥거리며 그들을 향해 소리치자, 파랑이가 쇳소리를 내며 발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쉬잇! 조용히 해!”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소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리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야?"
"뭐긴 뭐야, 우리가 흥분한 저놈들의 발에 잼처럼 짓이겨 질지도 모를 상황이지."
파랑이가 눈앞에 상황에 체념한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었고 덩치 큰 수많은 두더지들은 그들의 주변을 에워싼 채, 흥분한 듯 발을 구르고 있었다.
두 사람과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 분명한 소리는 위기를 직감하고 밧줄을 풀기 위해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파랑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소리를 바라보았다.
"그 무의미한 행동 다음에 함께 등을 맞대고 풀어 보자 할 생각이라면 관둬. 이미 쟤랑 해봤어. 이 매듭은 절대 우리 힘으로 풀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