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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음 Oct 27. 2024

7화, 사과를 줄게, 살려줘

후덥지근한 바람이 세 사람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그 이상한 놈이 소리가 받은 예언이 저주받은 예언이라 그랬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재앙을 몰고 온다니!”

파랑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같지도 않은 소리지. 하지만 아버지는  이상한 놈이 정말 신의 대리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

파랑이가 숨을들이켰다.

자비의 신께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인간을 제물을 바치라고 했겠어? 그놈 어딘가 수상해, 그놈이야말로 밤의 저주와 연관된 자가 분명하다고! 당장 지금이라도 마을로 돌아가서 놈의 정체를 낱낱이 까발리자.”

하지만 소리는 말없이 입을  다물고 을 뿐이었다. 파랑이가 그런 소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참소리, 너 또 괜히 이상한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소리가 어깨를 들썩였다.

“…… , 어차피 지금 돌아가서 전부 얘기한다고 한들 마을사람들은 우리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야.  세상에 저주를 퍼부은 밤이 세상을 구할 거라는데 누가 믿겠어.”

소리의 말에 두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도 쿠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기  그 자를 만났다면 그자의 말대로 제물이 되는  선택했을거야.”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아마 그런 상황이 닥치면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을걸?”

“나도 마찬가지야.”

번이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자의 말대로 세상이 파괴되도록 돕는 꼴이라면?”

“굳이 그 미친 소리를 이해하려고 내 뇌가 노력이란 걸 해야겠지? 어디서부터 세뇌를 시켜볼까, 네가 밤의 저주로 인해 잉태됐다는 그 미친 소리부터?” 파랑이의 말에 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일아저씨와 레나아줌마가 서로 눈 맞아서 결혼을 한 거, 더 나아가 서로 사랑을 나눈 날과 어쩌면 횟수까지……!”

“번!”

“이 미친놈아! 입 다물어!”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자 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번 네가 매대를 부숴준 게 다행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난 지금 이곳에 있지 못했을 테니까.”

소리의 말에 번이 뚝딱거리며 부자연스럽게 소리와 눈을 맞췄다.

,  일은 정말 미안해.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쿠로 할아버지의 소리병들이 모두 깨져버렸잖아.”

“오히려 고마운걸?”

소리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 소리야.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말자. 하루아침에  생각 없는 녀석이 저렇게 변했다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어떠면 저놈이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잖아!”

파랑이가 툴툴거리며 번을 흘기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나 이런 얘길 지어낼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거든? 그건 네들도 잘 알잖아! 나 엄청 단순하고……!”

“멍청하지.”

단순한 번은 파랑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는 상상도못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파랑이가 웃음을 기 위해 입술을 꾹 물었다.

“네가 그렇게 너의 멍청함을 인정한대도 네가 소리를 그 미친놈에게 데려가려는 수작일 거란 의심은 도저히 안 멈추는데?”

번이 마간을 찌푸렸다.

“그럼, 이 사실을 전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애초에 맘만 먹었으면 내가 얼마든지 그자에게 소리를 데려갈 수 있었을 거란 생각 안 해? 소리와 난 늘 같은 곳에 있으니까!”

그만해, 올파랑!” 보다못한 소리가 한소리 하자 파랑이가 혀를 쭉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소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도 진지하게 파랑이를 바라보고있는 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우리가  같은 곳에 있었던가?”

그러자 번이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저것봐, 수상하게 얼굴을 붉히잖아! 뭔가 숨기고 있는게 분명해. 얻어맞다보면 사실을 불지 않을까……?”

파랑이가 팔을 걷어 부치자, 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 궁금하긴 해. 어째서  그자의 말을 믿지 않았어?”

소리의 질문에 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난해? 믿고 말고   있어?  솔직히 네가 정말로 재앙을 몰고 온다고 해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저,  친구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이 견딜  없을 만큼 괴로웠고, 그래서 달려왔어.”

번의 말에 소리와 파랑이가 숨을 들이켰다. 번이 두사람을 바라봤다.

너희에게 미움받는  익숙해. 하지만 네들이 위험에 처하는  절대 견딜  없어. 당장이라도 소리  데리고 어디든 도망치려고 했어. 오해는  깊어지겠지만 나에겐  지킬  있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  놈의 명령을 받은 경비들이  방에 가두고  앞을 막아버렸거든.”

“그런데 어떻게 나왔어?”

파랑이의 물음에 번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창문으로 뛰어내렸지.”

소리와 파랑이가 입을 떡 하고 벌렸다.

  3 아니?”

파랑이가 놀란 듯 묻자, 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소를 지었다.

맞지. , 혹시  함께 맞추던 퍼즐 기억해? 파랑이  그거 맞추면서 엄청 짜증 냈었잖아. 내가 완성해 놓은  보면 깜짝 놀랄걸? 소리가 없으니까 엄청 오래 걸리더라. 괜찮다면 나중에 보러 올래?” 번이 멋쩍은  한쪽 볼을 긁적였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소리가 빠르게 번의 몸을 훑었다. 그의 바지 위로 피 얼룩이 잔뜩 묻어있었다. 소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모지리도 아니고…….”

“그건 파랑이 쟤가 지어준 나랑 가장 안 어울리는 별명이고……. 이거 별거 아니야.”

번이 무릎을 흔들어 보였다. 바지에 쓸려 쓰라릴 텐데도 번은 흰 이를 드러내며 애써 괜찮은 척 미소 지었다.

“그냥 조금 쓸린 거야. 그리고 나 나무 잘 타는 거 알잖아! 원숭이처럼 나뭇가지를 탁 잡았지!”

“그리고 네 무게를 못 이긴 나뭇가지는 힘없이 부러졌을 테고?”

걱정스러운 듯 번의 무릎을 살피는 소리의 말에 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기다려 봐. 내가 약을 챙겨 온 게 있어. 일단 상처가 덧나지 않게…….”

소리가 자신의 큰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파랑이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미소 짓더니 멀리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밝았던 파랑이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더니 곧 창백해졌다.

그녀가 사색이 된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난 네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지금이라도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거 같아. 더 늦기 전에 말이지…….”

파랑이의 말에 소리와 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소리의 가게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해 황폐한 사막에 왔잖아.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하”

 갑자기 상태  그러냐?”

번이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에게 다가가 이마의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러자 파랑이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따갑게 눈을 비춰야 할 햇살 대신 자리한 불그스름한 하늘과 황폐한 사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생명이라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넓은 사막을 지나 모래 언덕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파랑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멀리 보이는 모래 언덕쯤으로 생각했어. 그런데 점점 높아지고 가까워지더라? 그래서 사막에서 흔히 본다는 신기루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저건 오아시스가 아니잖아?!”

파랑이가 횡설수설하더니 곧 입꼬리를 올렸다.

결국  심신안정을 위해 내 뇌를 속이는데 실패하고 말았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려줄까? 저건 앞으로 보나 뒤로보나 눈깔을 뒤집어서 보나?  눈깔을 뒤집으면 안보이려나? 어쨌든  정도로! 완벽하게 실제하는 모래폭풍이라는 거야.”

그러자 번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다.

설마, 주, 죽음의 모래 폭풍?”

이에, 파랑이가 재밌어 죽겠다는  손뼉을 쳤다.

“와, 딩동댕, 정답입니다! 얘들아, 우린 곧 죽음의 모래 폭풍에 휩쓸려 이 사막 그 어딘가에 파묻혀 죽을 거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긴 시간 쌓였던 오해가 풀리는 이 중요한 시점에! 아하하하하!”

파랑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변을 방방 뛰어다녔다.

“엄마, 아빠 집에서 파도소리만 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싫다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역시 부모님 말 들어서 나쁠 건 하나 없나 봐요! 집 나온 지 30분도 안 돼서 죽는다니 이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다음생엔 저 같은 딸 말고, 꼭 말잘 듣고 착한 딸 만나세요. 부디, 흡!”

번이 숨을 고르더니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이 척박한 땅엔 몸을 숨길만한 큰 바위나 동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기 전에라도 내 진심을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소리야, 지금 전하긴 늦었지만, 내가 너 많이 조, 좋아……!”

파랑이와 번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소리의 귀를 괴롭혔다. 참다못한 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그- 만!”

“응? 분명 중요한 부분인 거 같았는데?”

파랑이는 잠시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싶어 다물었던 입을 다시 크게 벌리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아이고, 아이고! 아직 연애도 한번 제대로 못해 본 내가 이렇게 가야 한다니! 억울해, 억울해! 정말 너무 억울해!”

“소, 소리야 그러니까 방금 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면…….”

번이 헛기침을 하며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소리가 지끈거리는 이마에 미간을 찌푸렸다.

됐고! 다들 주접 그만 떨고, 집중해!”

소리가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자신의 짐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 혹시  가방에 들어가려고? 좋은 생각은 아닐  같은데 나쁘지 않은 생각 같기도 ! 세상에서 제일 좁고 부드러운 관짝이잖아!”

파랑이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리는 반쯤 미쳐버린 게 분명한 파랑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짐가방에서 사과 두 개를 꺼냈다. 소리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가 부족한데…….”

그때, 침착한 소리와 눈이 마주친 파랑이가 쏜살같이 튀어오더니 눈치껏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사과 하나를 빠르게 낚아챘다.

“역시 네가 날 그냥 데려올 일은 없지”

파랑이가 사과를 품에 꼭 껴안더니 번을 바라봤다.

“번, 네 마음 잘 알았어. 죽기 전에 네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거잖아. 네 사과는 소리가 잘 받아줄 거야. 그렇지 소리야? 혹시 우리가 다음 생에 만난다면 그때는 너도, 나도, 소리도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파랑이가 영혼 없이 씩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번의 어깨를 두어 번 쳐주었다.

“뭐, 뭔데! 자, 잠시만……!”

번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소리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껴안아!”

“뭐, 뭐라고?”

번이 당황한 듯 외쳤다.

“살고 싶으면 당장 파랑이 껴안으라고!”

두 사람의 눈에 가득 찬 두려움이 혐오감으로 바뀌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싫어!” 번과 파랑이가 서로를 노려보며 동시에 외쳤다.

“차라리 널 껴안……!” 번이 소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이대로 죽고 싶은 거라면 말리진 않겠어.”

소리가 곧장 무릎을 꿇더니 노크를 하듯 땅바닥을 내리쳤다.

딱딱딱, 딱-, 딱-, 딱- 딱딱딱

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어서, 날 따라 해! 사막의 두더지 요정에게 신호를 보내야 돼!”

“두더지? 뭐? 무, 무슨 신호?”

파랑이가 코 앞까지 다가온 모래폭풍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소리가 다시 한번 땅바닥을 치며 외쳤다.

“사과를 줄- 테- 니- 살려줘!”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바닥 밑으로 큰 구멍 하나가 뚫렸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소리의 몸이 구멍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꺄아아악! 소, 소리야!”

파랑이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번은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운 듯 보이는 파랑이를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야, 너 뒤진다!”

파랑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지만 번은 파랑이의 격렬한 움직임에도 그녀를 꽉 껴안은 채 한쪽 발로 땅바닥을 내리 쳤다.

딱딱딱, 딱-, 딱-, 딱-, 딱딱딱

“파랑이 껴- 안- 기- 싫어요”

번이 씩 미소 지었다.

동시에 파랑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채 분노를 표출하기도 전에 그녀의 분노는 비명이 되어 황폐한 사막을 울렸다.

잠시 후, 거대한 모래폭풍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리고 폭풍이 지나간 사막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소리는 꽤 오랜 시간 어둠 속, 미끄럼틀을 타듯 떨어져 내리는 몸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온몸으로 전해지는 둔탁한 느낌에 소리는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때, 뭔가가 소리의 머리를 툭하고 건들었다.

소리의 발버둥이 멈췄다.

소리는 순식간에 밀려드는 엄청난 두려움에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곧 마주한 상황에 다시 한번 삐져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내고 큰 눈으로 그것과 눈을 맞췄다.

소리의 앞에 서있는 그것은 사람보다 두, 세배 정도는 큰 덩치를 가진 두더지였다. 하지만 덩치에 맞지 않는 순둥 한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눈동자가 착해

소리는 눈앞에 있는 두더지가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틀림없다는 것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혹시 당신이 이 황폐한 사막을 지키는 두더지 요정이신가요?”

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두더지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두더지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번 톡 건드릴 뿐이었다.

“몸집에 비해 행동은 다소 귀여우시네요. 하하”

그렇게 소리가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두더지를 살필 때였다.

소리의 등 뒤로 비명소리와 함께 서로를 부둥켜안은 파랑이와 번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꽤 긴 땅굴 미끄럼틀 밑에 놓인 푹신한 방석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튕겨냈다.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악!”

그들은 아직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건지 쉴 틈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시끄러운 그들의 비명소리에 보다 못한 소리가 나서려던 찰나, 두더지가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이제 안전하다고 알려주려는 듯 상냥하게 그들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소리는 두더지가 보이는 사랑스러움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두더지 요정님이 젠틀하기까지!”

소리가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는 사이, 파랑이와 번은 갑자기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두더지에 놀란  다시 한번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명을 끄집어내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두더지의 착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입을 다물고 두더지를 살폈다.

“이 눈동자 어디서 본 적 있어. 거울 속에서 보던 내 맑고 순수한 눈동자…… 나랑 비슷해.”

파랑이의 말에 번이 짜증 난다는 몸서리쳤다.

“지랄하지 마!”

잠시 서로를 잊고 있던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떨어뜨렸다.

번이 짜증스럽게 몸을 털어내며 뒤늦게 소리를 발견하고는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어차피 둘이서 내려오는  가능했으면 네들 둘이 껴안고 내려왔으면 됐잖아!”

“나도 가능한지는 몰랐어.”

소리의 말에 파랑이와 번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파랑이가 무서운 눈빛으로 소리를 노려보자, 소리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내 말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기까진 미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뭐 그런 거지. 하하…….”

소리가 두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덩치 큰 두더지 뒤에 숨자, 두더지가 소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소리가 잔뜩 기대 어린 시선으로 두더지를 바라보았다.

“두더지도 사람 말을 할 줄 아나?”

파랑이의 멍청한 질문에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 사람은 뭔가 잔뜩 기대한 듯 두더지의 입에서 튀어나올 어떤 귀여운 울음? 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두더지의 행동에 그들은 실망했다.

두더지가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둥 한 얼굴과 거대한 몸짓으로 열심히 땅바닥과 몸을 쳐가며 항의하듯 발을 굴렀다.

그들은 동시에 헛웃음을 흘렸다.

“몸으로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파랑이의 말에 번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아무래도 사과를 달라고 하는  같아. 이곳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이 사과였거든.”

소리가 두더지를 향해 사과를 내밀자, 파랑이도 얼른 두더지를 향해 사과를 내밀었다.

그러자 소리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듯 두더지가 잽싸게 사과 두 개를 채갔다.

하지만 이내 못마땅한 듯 다시 땅바닥을 쳐댔다.

“이번엔 왜 그러는 건데?”

번의 말에 소리가 말했다.

인원수에 비해 사과가   모자라는 부분에 해 불만을 표현하는중일걸?

소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두더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두더지 요정님. 저 인간들이 두 명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잘못 보신 거예요. 그렇지?” 소리가 눈짓을 하자, 파랑이와 번이 내키지 않는 듯 어깨동무를 한 채 각자 반대쪽 팔을 휘둘렀다.

 만족스러운 친구들의 연기에 소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셨죠? 그냥 보통 사람들과 달리 머리와 몸통, 손, 다리가 많은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두더지는 소리의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러자  강도는 점점  커지더니  땅굴이 흔들리며 머리 위로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번이 두려운 눈빛으로 머리를 감쌌다.

파랑이와 소리는 얼른 무거운 가방을 번쩍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그 순간,

두두두두두-

엄청난 진동에 세 사람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기도 전에 수많은 통로에서 거대한 두더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그들의 눈동자는 앞서  두더지 못지않게 무척 순하고 착해 보였다. 반면, 그들의 몸짓은 성난 황소가 와도 막지 못할 정도로 매우 저돌적이었다.

“도, 도망쳐!”

번의 외침에 소리와 파랑이가 몸을 틀었다.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난  막힌 벽에 파랑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디로?”

세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점점 포위를 좁혀오는 두더지들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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