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소리를 쳐다보던 파랑이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고요의 땅에 가겠다니?”
소리가 흥분한 파랑이를 말없이 바라보자, 파랑이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니까?”
소리가 눈을 굴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의 땅에 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어.”
“하, 누가 들으면 고요의 땅이 너희 집 안방인 줄 알겠다?”
파랑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기가 막히겠지. 황당할 수 있어. 그런데 이 일을 해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무슨 일?”
소리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하루아침에 모두에게서 소리가 사라진 일.”
그러자 파랑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아직도 막 죄책감 같은 거 느끼는 거야? 내가 어제도 말했잖아. 그건 참소리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파랑이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황당한 대화에 말문이 막힌 게 틀림없었다.
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느긋이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소리가 사라졌는데 하루아침에 해결할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이 네가 고요의 땅에 가는 거라는 거지?”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랑이가 이마를 짚었다.
“너 저 밖에 뭐가 있는지 몰라?”
“사막?”
소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자 파랑이가 사색이 된 채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지. 밤의 저주가 있지.”
“그건 그저 전설일 뿐이잖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 그건 사실이야. 굳이 반박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진짜 이곳을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참소리, 잘 들어. 밤의 저주는 늘 우리가 마을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 소리를 빼앗기 위해! 마일삼촌과 레나이모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저주 때문이라고!”
파랑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이 하시는 얘길 들었어. 너에게 말하지 못해 미안해. 슬퍼하는 널 보고 싶지 않았거든……."
"마을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을 향해 떠드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하나이기도 하고."
소리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파랑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어?"
“내 귀가 두 개나 달려있는 게 신의 실수가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지. 그러니 그 전설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밤의 저주가 소리를 빼앗기 위해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난 빼앗길 소리가 없잖아.”
소리의 말에 파랑이가 적잖이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나만큼 적격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그것만 문제야? 고요의 땅에 가려면 황폐한 사막을 거쳐, 끝없는 강을 건너고, 깎아지른 산을 넘어 속삭임의 숲을 지나야 돼.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곳들은 여행자들도 넘기 힘든, 아니 발도 들이지 않을걸? 그런데 여행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가는 길도 모르는 네가 그 위험한 곳들을 거쳐 고요의 땅을 밟겠다고?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다!”
파랑이가 모자란 호흡에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고요의 땅에 있는데 모른 척 하란 소리야?”
파랑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그 여자 다녀간 거야? 그 여자가 널 이렇게 부추긴 거냐고!”
“그럴 리가.” 소리가 무표정한 파랑이를 바라봤다.
“좋아, 그럼 네가 하루아침에 이러는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정말 고요의 땅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어른들과 상의해. 그게 맞아.”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소리가 시선을 돌리며 짧게 답했다.
“밤”
“밤?”
파랑이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래, 고요의 땅에 저주를 내린 당사지인 밤이 있어. 그가 해결해 줄 거야.”
파랑이가 기가 차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진짜 돌겠네”
파랑이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 시계만 힐끔거리는 소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아름다운 소리를 시기한 포악한 밤이 모든 땅에 저주를 내렸어. 모두가 위험에 빠진 순간, 인간을 사랑했던 낮이 나타나 밤을 고요의 땅에 봉인했지. 하지만 이미 퍼져나간 밤의 저주를 막기란 불가능했고 밤과의 전투로 쇠약해진 낮은 자기 심장을 바쳐 아직 저주가 닿지 않은 이 땅과 소리를 지키고자 했지. 그 결과 그의 희생으로 유일하게 이곳은 무사할 수 있었어. 그런데 저주를 내린 당사자를 찾아가 도와달라 하겠다고? 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파랑이가 소리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네가 눌러서 아파!”
소리가 그녀의 손을 쳐내자 파랑이가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드러누웠다.
“밤의 저주가 내리기 전, 고요의 땅으로 가는 길은 사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길이었대. 넓은 들판엔 식물들이 가득하고 시냇물과 아름다운 폭포는 늘 무지개를 만들었지. 죽은 영혼들이 가득하다는 속삭임의 숲도 실은 정령들이 지키는 아름답고 신비한 숲이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밤의 저주로 인해 지금과 같은 척박한 땅이 돼버렸지. 소리가 없는 인간들은 다행히 밤의 저주에 크게 연관이 없지만 우린 아니야.”
“난 빼앗길 소리가 없다니까?”
파랑이가 얄미운 듯 소리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특별한 소리를 시기해 빼앗아 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것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는 파괴자! 그게 바로 밤이라는 얘기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좀 진정해.”
소리의 말에 파랑이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그래, 그럼 이제 이런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하고 일탈을…… 잠시만, 설마 이 얼척없는 상황이 실은 날 놀리기 위한 서프라이즈 빈둥빈둥 계획?”
파랑이가 반짝 눈을 빛내자, 소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파랑이를 바라봤다.
“꿈도 야무지다.”
“진짜 적당히 해!”
파랑이가 참지 못하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디서 이상한 말을 주워듣고 와서는……참소리, 죽으러 가겠다는 친구 말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이상한 말이 아니야.”
소리가 씩씩대는 파랑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게 바로, 엄마와 아빠가 밤을 찾아 고요의 땅으로 떠나신 이유였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부모님은 밤의 저주가 사라진 거 같다는 반촌장 님의 말에 소리의 땅 밖을 나갔다가 봉변을…….”
소리가 피식 웃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 욕심 많은 부부가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딸까지 버리고 다른 땅으로 가서 소리를 팔려다 밤의 저주를 받아 죽어버렸다고 하던데?”
파랑이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소리를 바라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난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알지?”
“알아, 그래서 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마을사람들이 미웠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의 말이 맞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겁이 났지. 난 점점 생기를 잃어갔어. 그리고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 할아버지는 결국 부모님이 떠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 부모님은 날 버린 게 아니라 어떤 조사를 위해 고요의 땅으로 떠나신 거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반촌장은 알고 있고. 그래서 그가 우리를 도울 거라 하셨지. 난 그때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너도 알다시피 반촌장은 우릴 돕지 않았으니까."
"자, 잠깐만 나 지금 매우 이해가 안 되거든? 너희 부모님이 고요의 땅에 가신 거라고? 아니, 그보다 반촌장 님이 마일과 레나를 그곳에 가도록 그냥 내버려 뒀단 말이야? 죽을 수도 있는대? 마일 아저씨와 반촌장 님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잖아!" 파랑이가 놀라 묻자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늘 그 부분이 의문이었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눈을 감으셨지. 그렇게 난 홀로 이 가게를 지켰어. 하지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 반촌장의 목적이 이 가게라는 걸, 그래서 또 생각했지. 우리 부모님이 고요의 땅에 가신건 부모님의 의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파랑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너 지금 반촌장 님이 굳이 이 낡아빠진 가게를 빼앗으려고 하나뿐인 친구를 사지로 몰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맞아, 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알면서도 이 가게를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더 비참했지. 그런데 내가 어제 뭘 발견했는지 알아?"
소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우연히 쿠로 할아버지의 상자를 발견했어. 번이 매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영영 이 편지의 존재를 몰랐을거야.”
소리가 마루 밑에 밀어둔 상자에서 종이를 꺼냈다.
“쿠로할아버지의 편지에 모든 게 적혀 있어.”
파랑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편지와 소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소리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괜찮다면 읽어볼래?”
잠시 후, 파랑이가 편지를 읽다 말고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마을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지는 게 네가 태어난 날, 한 노파에 의해 이미 예언된 일이라는 말이야? 문이라는 게 열리면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질 것이고, 모든 만물의 불행과 고통, 두려움을 받아 힘을 얻은 저주의 근원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파랑이가 되묻자,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리는 이미 사라졌으니까 문이라는 건 이미 열린 걸 테고 여기서 말하는 저주의 근원은 밤의 저주라는 거야? 밤의 저주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여기 소리의 땅까지?”
파랑이가 놀라 소리쳤다.
“아마 그렇겠지, 뒷부분을 계속 읽어 봐.”
소리에 말에 파랑이가 애써 침착하게 다시 한번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잠든 밤의 심장을 꺼낼, 소녀가 제 할 일을 다하면 그와 함께 저주를 몰아낸다? 심장을 꺼내? 심장을 꺼내면 보통 죽지 않나?”
파랑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자, 소리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몸을 밀착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해석해 보자면, 마음은 심장이잖아? 잠든 밤의 심장을 꺼내라는 건 인간에게 나쁜 마음을 가진 밤을 설득하라는 거 같아. 그래서 그의 저주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밤이 직접 저주를 거두게 해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다. 뭐 이런 좋은 취지지.”
파랑이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소리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네 말은 세상에 저주를 내린 포악한 밤을 말로 설득해서 갱생시킨다는 거네? 맞아?”
“어. 왜, 이상해?”
“어. 정말 모든 게 이상해! 솔직히 말할까? 난 레나이모와 마일삼촌이 수상한 노파의 말만 믿고 고요의 땅으로 갔다는 사실조차 믿어지지 않아. 너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 쿠로할아버지는 더더욱!”
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너도 나도 당연히 하는 의심을 그분들이 안 했을까? 그 당시 우리 부모님께 이야기를 들어 유일하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반촌장 님도 부모님이 고요의 땅으로 가는 걸 허락하셨어. 그분들껜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거든. 그것 좀 줄래?”
소리가 손을 내밀자 파랑이가 멍한 표정으로 편지를 건넸다. 소리가 편지를 도로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안 지금, 내가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해. 결국 엄마와 아빤, 날 지키기 위해 그곳에 발을 들여 돌아오지 못하신 거니까. 어쩌면 그곳에서 부모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소리의 진심 어린 말에 파랑이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래, 그러니까 넌 내가 말려도 무조건 고요의 땅을 밟겠다는 거잖아. 그치?”
소리가 입술을 말아 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파랑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았다.
“포악한 밤을 설득하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일단 무사히 살아서 고요의 땅에 도착해야 돼. 하지만 그 과정은 여행 경험이라곤 한 번도 없는, 이제 막 성년이 된 15살짜리 소녀가 감당할 수준이 아닐 거야. 쉽게 생각해서는 안돼.”
“물론이지. 쉽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소리의 눈에 강한 의지가 담겼다.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시계를 쳐다봤다.
“황폐한 사막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어. 그리고 그게 바로 부모님과 쿠로할아버지, 그리고 그 깐깐한 반촌장마저도 노파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던 이유였지. 아직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틀림없이 존재할 거야.”
파랑이가 눈을 크게 떴다.
“비밀통로가 존재한다고? 그럼 잘된 일이야! 차라리 다른 어른들께 알려서……!”
소리가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파랑이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파랑아 너도 알다시피 반촌장은 우리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봐. 그는 이 예언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아니 어쩌면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지.”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부모님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소리가 숨을 들이켰다.
“반 촌장이 이 낡아빠진 가게를 사려고 했던 이유, 그 불편한 이유를 이제 정확히 알아. 그래서 그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된 사람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반촌장 님이 이 가게를 사려고 한 이유가 뭔데?”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여기 계속 있을 거지?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없어.”
소리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랑이는 단호한 소리의 등을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파랑이의 고함에 소리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파랑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어차피 잃어버릴 소리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 아냐?”
“그래.”
소리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짧게 답했다.
참소리 가게에 어딘가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평온한 표정의 소리와는 달리 적잖이 당황한 듯한 파랑이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겠다고? 대부분 이야기 속 주인공은 친구가 위험에 처할까 봐 걱정돼서 막 말리고 그러지 않나?”
소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파랑이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그렇다고 날 말리라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소리 네가 내가 생각했던 겄보다 조금 더 쿨하달까? 하하……!”
파랑이가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당연히 혼자보다 둘이 낫지 않겠어?”
“뭐 또 그것도 그렇지.”
파랑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걸음질 쳤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줄래? 집에서 짐을 챙겨 와야 할 거 같거든.”
파랑이가 소리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문으로 향하자 소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옷가지들을 비롯해 있을 만한 생필품은 우리 가게에 다 있잖아. 내가 어제 다 싸놨어.”
소리는 파랑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마루 밑, 모퉁이에 큼지막한 짐 덩이를 가리켰다.
파랑이는 이게 맞나? 싶은 얼굴로 소리를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또 저 순진한 얼굴에 속았지.”
소리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우정에 난 또 한 번 감동을 받았고 말이야.”
파랑이가 마루에 걸터앉더니 끙끙거리며 짐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소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방에 두 팔을 번갈아 끼워 넣었다.
“무서운 년…….”
소리가 씩 웃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보다 부모님 걱정하실 텐데 그냥, 오늘 말고 내일 갈까?”
그러자 파랑이가 헛웃음을 쳤다.
“뭐라고, 말하고 올까? 너랑 고요의 땅에 간다고?”
“잘 설명해 드리면…….”
“됐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안절부절인데 퍽이나 잘 다녀오라 손 흔들어 주시겠다. 지금 소리의 땅 주민들 생각보다 예민해. 당연히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우리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여러모로 난리가 날걸?”
파랑이는 마루에 놓인 종이와 펜을 들어 짤막하게 끄적이더니 낡은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쪽지를 남겼으니 크게 걱정하시진 않을 거야. 그거 알아? 조금 전까지 걱정이 한가득이었는데 막상 마음먹으니까 나 엄청나게 설레……!”
파랑이가 배시시 웃으며 잊지 않고 소라 모양 목걸이까지 빼 종이 위에 올려두었다.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괜찮겠어? 내일 출발해도 괜찮…….”
“방금 전까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더니! 너 내 반응 떠보려고 연기한 거구나? 이 나쁜 계집애!”
“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우리 엄마가 알게 되는 순간 내 다리가 모두 분질러져 꼼짝도 못 할 텐데 네가 즐겁게 여행하는 동안 나 혼자 집에서 감옥살이하라는 거야? 막 너 저주하면서?”
“너 되게 비관적이야.”
“도파민에 절여진 거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싱글벙글하며 들떠있는 파랑이를 보며 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자, 가. 편지에 적혀있는 대로라면 오전 10시, 황폐한 사막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고 했어. 지금이 59분이니까 1분 뒤 열리겠네.”
파랑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밀통로가 어디 있는진 모르겠지만 1분은 무리 아니야?”
“아니, 우린 꽤 여유롭게 도착했어.”
소리가 빽빽이 들어선 매대 중 유일하게 비어있는 바닥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해, 얼른 내 옆으로 와서 서!”
파랑이는 순간, 할 말이 많았지만 토 다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파랑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루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소리의 옆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비밀 통로였다니... 그래, 또 나 혼자만 진지했지. 날 놀린 대가가 꽤 클 거야. 이따 모라 이모네 식당에 있는 식재료가 거덜 날 정도로 먹을 테다.”
파랑이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뭐 라건 관심 없다는 듯 소리는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펼쳤다.
“뭐 그건 고요의 땅으로 가는 비밀지도라도 되세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비꼬던 파랑이가 궁금하긴 했는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소리가 재빨리 지도를 다시 품속에 쏙 집어넣었다.
“치사한 계집애”
벽면에 붙어 있는 동그란 시계가 어느덧 10시까지 약 10초가량을 남겨 두고 있었다.
소리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키자 파랑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끝까지 연기하는 것 좀 봐. 야 이제 그만해! 이 계집애야!”
그때였다.
파랑이가 미처 닫지 못한 문에서 갑자기 한 형체가 튀어나오더니, 한 마리의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나, 나도 같이 가!”
소리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를 보며 경악했다.
“번?”
소리의 격양된 목소리에 놀란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네, 네가 왜 여길! 오, 오지 마! 멈춰, 멈추라고 이 얼간아!”
너무 놀라 몸이 굳어버린 파랑이의 외침과 동시에 번의 몸뚱이가 두 사람과 부딪혔다.
세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나무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 순간, 시곗바늘이 정확히 10시를 가리켰다.
초승달 문양의 흰색 선이 일렁이며 새하얀 빛을 뿜어내더니 세 사람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덜컹-
활짝 열려있던 문이 닫힘과 동시에 떠들썩하던 가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