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야”
소리가 고통에 신음하며 자신을 모래바닥에 처박은 원흉을 찾기 위해 눈을 흘겼다.
그 순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파랑이가 번을 향해 분노를 뿜어냈다.
“야, 너 미쳤어? 그 큰 몸뚱이를 어따가 들이 밀어, 너 때문에 우리 다 죽을 뻔했잖아!”
그러자 번이 자신의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모래를 털며 말했다.
“넌 황소가 들이박아도 끄떡없을 거 같은데?”
“뭐, 뭐야?”
파랑이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곧 보이는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보다 잠시만 여, 여기가 어디야?”
파랑이가 소리를 쳐다보자 소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할아버지의 말은 진실이었어.”
파랑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말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그것도 네 가게에? 대체 어디에? 난 그냥 서있었고 저 사람 아닌 것 한테 들이 박혔을 뿐인데? 다행히 멀쩡한 난 누구? 아, 난 올파랑이지? 그럼 여긴 어디? 모래밖에 안 보이는 사막……. 사막?”
믿을 수없다는 듯 소리치는 파랑이를 내버려 두고 소리가 번을 노려봤다.
“넌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멋대로 따라왔으니 집에는 알아서 가.”
소리가 등을 돌리자 번이 당황한 듯 외쳤다.
“자, 잠시만! 그래, 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해. 그런데 난 널 돕고 싶어서 왔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 봐…….”
소리가 헛웃음을 쳤다.
“위험? 여기까지 온 마당에 연기는 그만해.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질 걸 미리 다 알고 있었으면서 숨긴 것도 모자라 고요의 땅에 간 부모님을 욕보인 이유!”
소리가 씩씩 거렸다.
“고작 이 비밀통로가 욕심 나서였니? 이깟게 뭐라고! 나와 할아버지를 그렇게 까지 괴롭힌 건데? 왜!”
번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너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소리가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모른 척하지 마! 가서 네 아버지에게 똑똑히 전해. 난 절대 가게를 팔지 않을 거라고.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마을 사람들은 좋든 싫든 이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니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지금까지 그랬든 마을 사람들을 속인 것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겠지.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소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는 파랑이를 바라봤다.
“파랑아, 가자.”
“그, 그래” 파랑이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짐가방을 들춰 맸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등뒤로 번이 소리쳤다.
“……그래! 이제 와서 너에게 뭘 숨기겠어. 맞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정말 아니야!”
소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파랑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침을 튀기며 번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야! 너 그입 안 다물어? 한때는 그래도 친구라고 봐줬어! 다시 한번 그 주둥아리 놀려봐? 너 내가 이 사막에 묻어버릴 거야?”
파랑이가 씩씩 거렸다.
“오래전, 두 분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어…….”
번의 말에 짐가방을 들춰 매려던 소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소리가 번을 바라봤다.
“두 분의 대화라니?”
“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말랬지! 소리야, 더 들어볼 것도 없어. 그냥 가자!” 파랑이가 소리의 짐가방을 질질 끌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소리가 꼼짝도 하지 않자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자니까?”
“……10년 전, 너희 부모님이 고요의 땅으로 떠나시기 전날 밤이었어. 난 아버지의 서재에 숨어 깜빡 잠이 들었었지. 그러다 대화소리에 잠에서 깼어. 마일아저씨와 레나아줌마였지. 두 분은 아버지에게 내일 고요의 땅으로 떠난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이 사실을 자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꼭 비밀로 부쳐달라고 당부하셨지. 아버지는 그런 두 분에게 마을의 촌장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도 고요의 땅에 함께 가겠다고 했어. 하지만 두 분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촌장이 자리를 비우면 모두가 걱정할 거라고, 그리고 어린 나에겐 아버지밖에 없지 않냐며, 소리 너에겐 돌봐줄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분이 함께 다녀오신다고 했어. 널 잘 부탁한다고 하셨지.”
소리의 숨이 가빠지더니 곧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가장 사랑하는 딸을 두고 어떤 부모가 죽을지도 모르는 고요의 땅으로 떠나겠어! 우리 가게의 비밀을 알고 욕심이 난 반촌장이 도움 대신 부모님을 사지로 내 몬거겠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리를 바라보던 파랑이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주려다 이내 손을 떨궜다.
지금으로선 어떤 위로나 공감도 그녀에게 닿지 못할 거 같았기에…….
“아니,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그때 네 가게의 비밀을 알지 못했어. 정말이야, 믿어줘. 그가 알고 있었던 건 단지 밤의 저주가 이 땅을 집어삼킬 거라는 무시무시한 예언뿐이었어.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걸 지켜볼 수 없으셨겠지. 그건 마일아저씨와 레나아줌마도 같은 생각이셨을 거고. 네 부모님이 고요의 땅으로 떠나고 소식이 없던 1년 동안 우리 아버지도 제정신이 아니었어. 친구를 사지로 내 몬 나쁜 놈이라고 자책하며 나날을 보냈지. 너희는 몰랐을 거야. 내가 의도적으로 너흴 피했으니까”
소리와 파랑이의 눈이 떨렸다.
“날 보는 그 눈빛엔 생기가 없었고 늘 날 향해 미소를 짓던 아버진 폐인처럼 변해갔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 마음에 소리 네가 너무 미워졌어.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 없었어. 네가 나보다 더 힘들 거란 생각을 그때는 미쳐 하지 못했으니까. 너에겐 정말 미안해. 파랑이 너에게도……. 내 비겁함을 용서해 달라는 말 같은 거 하지 않을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세 사람이 동시에 허공을 바라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급하게 닦아냈다.
잠시 후, 옷소매로 대충 눈을 비비던 파랑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도 용기내서 고백할게. 미안해…….”
파랑이의 말에 소리와 번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들이 그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혼자 서운해해 하고 변해버린 네들을 미워했어. 내가!” 파랑이가 코를 훌쩍이며 말하자 두 사람이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냥 이쯤에 말할 타이밍이었던거같았는데 아니었나봐. 난 신경쓰지 말고 하던 얘기 마저해.”
파랑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먼 하늘을 봐라봤다.
소리가 번을 봐라봤다.
“한 가지만 물을게. 그럼 반촌장 님이 우리 가게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언제 알게 된 거야?”
번이 조심스럽게 입을열었다.
“일단 내가 비밀통로에 대해 알게 된 건 오늘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래.”
소리의 말에 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일아저씨와 레나아줌마가 고요의 땅으로 떠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어. 아버지는 결국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두 분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셨지. 그런데 때마침 쿠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찾아왔어.”
소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쿠로 할아버지가?”
“그래, 쿠로 할아버지가 다녀가시고 거짓말처럼 아버지 상태는 매우 좋아졌어. 내가 1년 동안 너무 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지.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셨지. 고요의 땅으로 가겠다고 하셨어.”
“뭐?” 조금 전부터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파랑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드디어 두 분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며 좋아 하셨지. 내 생각이지만 아마 그때 소리 네 가게의 비밀을 아셨던 게 아닌가 싶어.”
파랑이가 저게 맞아?라는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자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어낸 말은 아니지 싶어. 그 맘 때쯤 반촌장 님은 진짜 마을을 비우셨으니까.”
소리의 말에 번의 얼굴이 밝아졌다.
“맞아, 기억하는구나. 아버지는 곧바로 고요의 땅에 갈 채비를 하셨지. 친구를 구해오겠다며 말이야. 하지만 난 불안했어. 나에겐 한 번도 너희 같은 자상한 어머니가 없었는데 아버지 마저 잃는다면 살 수 없을 거 같았거든. 그래서 울며 매달렸지. 제발 날 떠나지 말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친구가 더 우선이었던 모양이야. 다음날 바로 나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어. 꼭 다시 보자며.”
그제야 파랑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반촌장 님이 마을의 안전을 위해 주변을 살핀다며 한 달 정도 마을을 비웠던 날! 그 일 이후로 반촌장 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가 하늘 높이 치솟았잖아!”
“그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걱정할까 그런 명분으로 마을을 떠나셨지. 그리고 한 달 뒤, 무사히 돌아오셨어. 하지만 그분의 옆엔 사랑하는 친구 대신, 한 남자가 있었지. 봉변을 당해 죽을뻔한 아버지를 위기에서 구해준 정체 모를 여행자. 그 후로 그 남자는 쭈욱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됐고.”
파랑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촌장 님의 목숨을 구해준 여행자와 소리의 땅에 발을 들였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던거 같아. 관심이 없어서 까마득히 잊고있었어. 그런데 번, 난 네 말을 들으니 더 이해가 안 돼. 두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며 떠나신 분이 왜 돌아오고 나서는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며 소리와 쿠로 할아버지를 그렇게 못살게 군거야?”
그러자 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그때부터였어. 늘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했지. 미련한 내가 그걸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야.”
“무슨 말이야?”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정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갑자기 소리가 없는 어린 네가 가게 운영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그러셨어. 가게에 정을 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하셨지. 내가 너에게 망나니처럼 굴었던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기도 해…….”
소리가 황당하다는 듯 짧게 숨을 들이켜자 파랑이도 어이없는지 하! 하며 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번이 당황한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저 그때의 난 무언갈 판단하기엔 너무 어렸어. 난 여정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고 너무 기뻤고, 그분이 다시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거든. 그래서 늘 기도했어.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무슨 말이든 잘 듣겠다고.”
“그래서 네 말은 반촌장 님이 소리를 괴롭히라고 시켰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너는 그걸 곧이곧대로 실천했다는 거네?”
파랑이가 기가 차는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소리는 쉽게 번을 나무라 할 수도 없었다.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그 간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버진 네 가게를 비싼 가격으로 매입하면 너와 쿠로 할아버지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 어린 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중요하지 않았어. 널 돕는 일이라 생각했고 아버진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알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보다 친구를 더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널 위한다는 말이 거짓일 거라고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어. 그래서 모질게 굴었어. 네가 가게에 미련을 버리고 편해지길 바랐지. 그리고 모든 게 잘 마무리되면 그때가 되면 예전처럼…….”
번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얘를 어떡하지……? 너 진짜 바보야?” 파랑이의 목소리도 떨렸다.
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내 잘 못이고 내 탓이야. 그래도 그렇게 했으면 안 됐던 거였어. 내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면 안 됐던 거였어”
“됐고, 지금 당장 돌아가! 네가 정말 우리에게 미안하다면,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파랑이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번이 모래바닥을 응시한 채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 그 남자에게서 소리를 지켜야 돼…….”
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 아침, 네 부동산 계약서를 아버지에게 가져다줬어. 그리고 멍청한 난, 염치없게도 너네와 다시 예전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한껏 마음이 들떠있었지. 아버지에게 계약서를 전해드리고 서재를 나왔어.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더라, 그런 낯선 기분은 처음이었어. 그렇게 난 다시 아버지의 서재로 걸음을 돌렸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소리 널 도와줄 방법이 정말 이거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게 서재에 문을 열 때였어. 혼자 계셔야 할 아버지의 방 안에서 다른 이의 말소리가 들리더라…….”
파랑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두 팔을 빠르게 비볐다.
“뭐야, 갑자기 공포물이야?”
“드디어 이 빌어먹을 가게를 빼앗았군요.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남자의 말에 반촌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제 이 가게만 없애버리면 재앙이 우릴 비켜가는 거요?” 반 촌장이 말했다.
“이미 늦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가 버럭 소리치자 반촌장의 눈이 커졌다.
반촌장이 두 손을 책상에 내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이보시오! 분명 그 가게를 없애면 재앙이 우릴 피해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자 남자는 책상에 올려진 위쪽이 텅 비어버린 모래시계를 툭툭 치며 말했다.
“소리가 사라진 건 재앙이 아니라는 겁니까, 이미 소리는 전부 사라졌고 재앙은 시작됐어요. 이제 그 쓸모없는 가게 따윌 없애버린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겁니다.”
그의 말에 반촌장이 입을 꾹 다물더니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한단 말이오!”
“이 나약한 인간 같으니라고!”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반 촌장을 위협하듯 어깨를 움켜잡았다.
반촌장이 놀란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사라진 소리를 다시 찾아야지. 이 멍청한!”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모래시계를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바닥에 흩날렸다.
“……!”
반촌장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바, 방법이 있는 거요?”
남자가 숨을 고르더니, 입술을 잘근 씹었다. 곧 생각을 마친 듯 남자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소리가 사라졌다는 건 밤의 저주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걸 뜻합니다. 저주는 그 아이가 태어나며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낮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밤의 저주가 모두의 소리를 앗아갔지요. 그 말은 또 한 번 이런 일이 생기면 이제 당신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저주의 예언이 실행될 수 없도록 원흉을 없애면 되는 겁니다.”
반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밤의 저주를 우리가 무슨 수로…….”
남자는 무서운 얼굴로 반촌장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반촌장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방금 전, 너무 답답한 나머지 흥분을 한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소.”
반촌장의 말에 남자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당신은 악의 속삭임을 이겨내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거 없습니다. 난 신의 대리자로서 끝까지 축복을 따라 당신과 이 마을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물론 당신이 날 믿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날 테지만요.”
“믿소. 그러니 도와주시오. 뭐든 하겠소.” 반촌장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남자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슬며시 손을 빼냈다.
“이것이 저주를 막을 마지막 방법이 될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겠죠.”
“물론이오.”
반촌장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친구가 받았다던 저주의 예언을 역이용하는 겁니다. 두 인물이 만나지 않는다면 저주가 이 땅을 덮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우린 쉬운 길을 선택할 수 있지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굴리던 반촌장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호, 혹시 그 아이에게 해라도 끼치겠다는 거요?”
“어렵다면 제가 대신해 드리죠. 촌장님은 그저 그 아일, 제 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됩니다.”
남자가 벽에 걸린 칼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이어 말했다.
“재앙의 씨앗이 될 계집애를 신께 바치는 건 제 몫이니까요.”
“자비의 신께서 인간 제물을 원하신다는 거요?”
반촌장의 말에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촌장을 노려보았다.
“그,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그 제물이 될 순 없겠소? 그 아이는, 그 아이만큼은 꼭 지켜주겠다고 마일에게 약속했소. 우리가 부족해 저주의 예언 따위에 놀아난 것일 뿐!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죄가 없다니요, 그 저주의 힘으로 잉태된 것이 그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존재 자체가 죄악입니다. 그러니 재앙을 몰고 올 그 계집애를 제물로 바치세요. 그것이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킬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후회하시겠습니까? 자비의 신만이 그 아이의 저주를 씻겨 낼 수 있고 이 땅과 모두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낮이 심장을 바쳐 이 땅과 당신들의 소리를 지켰듯이 밤도 꺼져가는 자신의 심장으로 모두를 파괴할 저주를 만들어냈어요. 결국 그 저주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을 죽일 겁니다. 당신의 친한 친구가 꾐에 빠져 죽어버린 것처럼요. 그들의 앞에 나타난 그 예언자란 노파가 저주가 만들어낸 괴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당신은 보지 않았습니까, 속삭임의 숲에 있던 그것들을! 밤이 만들어낸 저주의 실체들을! 다행히 신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나는 당신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이미 당신도 똑같이 그 끔찍한 것들의 먹잇감이 되었겠죠. 안타까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애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을 거고 막지 않으면 저주의 예언대로 이 세상을 파괴할 존재가 될 겁니다.”
“……당신의 말대로하면 빼앗긴 우리들의 소리는 다시…… 찾을 수 있는 거요?”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요. 당연하고 말고요. 모든 죄악을 씻어내고 신의 사랑이 이 땅을 향하면 그분은 당신들의 소리를 허락하실 겁니다. 어쩌면 전보다 더 좋은 소리를 낼 수도 있을 테지요. 크크큭”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살짝 열린 문틈 사이, 두려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번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이 희번뜩하게 변하자 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드님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눈치가 없군요.”
남자는 번과 눈을 맞추며 기괴하게 웃어 보이더니 악을 쓰듯 외쳤다.
“이 모든 것을 지키고 싶다면 당장 그년을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남자의 듣기 싫은 쉰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쾅-
세차게 문을 닫았다.
번은 쿵쾅대는 가슴을 쥐어잡았다.
다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오싹한 느낌과 함께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주저 앉아 버릴 수는 없었다.
‘소리, 소리가 위험해……!’
사랑하는 친구를 지켜야한다는 의지가 두려움보다 더커졌을때,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섬뜩한 시선이 번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철저히 무시하며 창문을 모조리 막아 빛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속 복도를 가로질렀다.
“조금만 기다려, 참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