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세 사람의 양팔과 다리를 붙잡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악! 소리야 어떻게 좀 해봐!” 파랑이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으악, 이건 나도 예상 못했어. 아무래도 사람보다 사과가 적어서 그런가 봐!” 소리가 두더지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곧 엄청난 힘에 의해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자 체념한 듯 두더지들에게 몸을 맡겼다.
세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거세게 흔들렸다.
“이거 승차감이 영 별로야”
“승차감 좋아하시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어떡할 거야!”
파랑이가 버럭 소리치자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모래에 파묻혀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둘걸 그랬어.”
“뭐, 뭐라고? 이 모지리 자식이!”
“모오지리? 넌 내가 아직도 유령이 무서워 벌벌 떨던 겁쟁이 꼬만 줄 알아? 이 뚱보, 아니 뚱뚱 뚱보야?”
“뚜웅보? 너야말로 내가 아직도 케이크라면 사족을 못쓰던 사랑스럽고 미치도록 귀여웠지만 조금은 통통했던 꼬만 줄 아니?”
말문이 막힌 번을 보며 그녀가 흡족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때, 두 사람을 들어 올린 채 바삐 움직이던 두더지들이 파랑이와 번의 머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아, 시끄러울 때마다 건드는 걸 보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구나!”
우연히 두더지들의 행동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소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얘들아, 진정 좀 해.”
다행히 때맞춰, 두 사람의 논쟁이 막을 내린 덕분에 시끌벅적했던 동굴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남의 집에 와서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방인으로써 예의를 지키자는 결론에 도달한 소리는 자신을 들쳐 올린 두더지들에게 얌전히 몸을 뉘었다.
점점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던 두더지들은 곧 어느 동굴 속에 도착하자 세 사람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아얏!”
엉덩방아를 찧은 세 사람이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
드르르르릉- 쿵!
두더지들은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를 이용해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뭐, 뭐야! 설마 우릴 이곳에 가둔 거야?” 번이 소리쳤다.
아픔도 잊은 채 세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기 잠시만요! 두더지 요정님들!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희 얘기 좀 들어주세요!”
소리의 절망스러운 외침이 동굴 안을 울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닿지 못했는지 두더지들의 경쾌한 발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갈 뿐이었다.
어둠 속에 갇힌 세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돌덩이를 밀어보았다.
하지만 절대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하고 동시에 손을 뗐다.
“우리 갇힌거겠지? 여긴 두더지들 감옥 같은 건가?” 소리가 미련 가득한 얼굴로 돌덩이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큰 돌덩이로 입구까지 막았는데 편히 쉬라고 손님방에 던져둔 건 아니겠지.”
“성인이 되자마자 감옥에 갇히는 인생이라니……. 내가 어른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늘 상상해 봤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어.”
번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번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에 의아한 두 사람이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입에서도 이따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두운 동굴벽에 박힌 작은 돌멩이들이 하나 둘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곧 수많은 빛이 어두웠던 동굴을 밝게 비췄다.
“이건 별 이잖아!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별!”
번이 소리치자 파랑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지리가 허세는, 네가 별을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아는 척은?”
파랑이가 아니꼽게 중얼거리자 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몰라? 어릴 적, 내가 갖고 놀던 돌맹이었는데?”
그의 말에 두 사람이 의심스럽게 번을 바라봤다.
“진짜야, 여행에서 돌아오신 아버지 주머니를 뒤지다가…….”
두 사람이 눈을 가늘게 뜨자, 번이 헛기침을 했다.
“어릴 적 호기심은 그게 뭐든 가리지 않지.”
“잘났다. 잘났어” 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파랑이의 말에 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머니에 웬 돌멩이가 들어 있길래 별생각 없이 바닥으로 던져버렸거든. 그런데 그게 책상 밑으로 굴러간 거야. 도로 넣어놓긴 해야 할거 같아서 주우려는데 옅게 빛을 뿜어내더라고, 신기해서 바로 방으로 가져왔어. 그리고 침대 밑에 들어가서 확인해 봤지. 그런데 정말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더라. 그래서 내가 별이라고 이름을 지어줬어. 너희와 같이 이야기를 듣던 때가 떠올라서…….” 번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파랑이가 땅바닥에 철퍼덕 드러누었다.
“도둑질은 아무리 미화시켜도 도둑질일 뿐이지. 어떤 감동도 없는 이야기 잘 들었어."
"도둑질 아니고 호기심이거든?"
"그래, 네 생각이 중요하지, 내 생각 따위 뭐 중요하겠니? 그래도 별 이야기라면 나도 기억해. 레나 아줌마가 그 이야기만 시작하면 우리 하던 숨바꼭질도 멈추고 아줌마 곁으로 갔잖아. 캄캄한 고요의 땅에서만 볼 수 있다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들떠서는 나중에 커서 가자고 약속했잖아.”
“그리고 실제가 됐지.”
번의 말에 파랑이가 짜증스럽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젠장, 말이 씨가 돼버렸어.”
“대신 우린 별을 볼 수 있잖아.”
소리의 말에 파랑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야 멋모르고 믿었지. 이젠 저런 빛들이 하늘에 떠있다는 말을 믿기엔 너무 커버렸어. 하지만 정말 떠있다면 아름답긴 할 거야.”
그러자 번이 눈치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앞서 가지 말고, 이거라도 많이 봐둬. 우리가 보는 별은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거든.”
번이 눈치 없이 중얼거리자, 파랑이가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널 데려왔니, 꼭 초를 친다니까?”
그러자 번이 눈썹을 들썩였다.
“난 그저 우리가 두더지들한테 납치 당해, 감옥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을 너희가 잊고 있는 거 같아서 상기시켜 준 거뿐이야.”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소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흔들더니 밝은 빛을 뿜어내는 조약돌을 천천히 매만졌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모빌이, 모두 이 조약돌로 만든 거였구나……. 그냥 예쁜 돌인 줄로만 알았는데.”
소리가 조약돌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빛을 낼 줄 아는 신비한 돌이 소리의 땅에서만큼은, 무용지물이었네.”
소리가 씁쓸한 듯 미소 지었다. 소리가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할 때였다.
“참소리! 조심해!”
번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를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야! 너 미쳤어? 소리야, 괜찮아?” 놀란 파랑이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게 아니라, 바닥을 봐!” 번이 바닥에 부딪힌 팔뚝을 매만지며 소리쳤다.
고개를 돌린 소리와 파랑이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이게 뭐야…….” 사색이 된 소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세 사람은 경계 섞인 눈으로 한 곳을 바라봤다.
“웬 구멍이지?” 파랑이가 천천히 다가가자 번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제지했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내가 먼저 갈게”
번은 혹시 바닥이 무너지기라도 할까 확인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구멍의 앞에 섰을 때 꽤나 큰 구멍 크기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번은 침을 꼴깍 삼키며 구멍 안으로 고개를 쭉 뺐다. 곧 그가 소리쳤다.
“이 밑으로 물이 흘러!”
“뭐?” 놀란 파랑이와 소리가 겁도 없이 달려오자, 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뛰, 뛰지 마!”
다행히 동굴 바닥이 꽤 튼튼했던 건지 무너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번의 말에 소리가 구멍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구멍 속엔 깊이도, 그 끝도 알 수 물길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발 디딜 지반은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구멍을 요리조리 살피는 소리를 보며 파랑이가 말했다.
“설마 여기가 그곳 아닐까? 끝없는 강.”
“뭐?” 번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소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쩌면 이곳이 우리의 탈출구가 돼줄 수 있을 거야.”
꽤 오랜 시간 구멍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곳으로 탈출하는 건 너무 위험해.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이 전혀 없고 깊이도 알 수 없어. 저 아래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거야.”
소리의 말에 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거고 이곳이 정말 끝없는 강일 경우엔 아주 위험하지.”
“하지만 잠깐 내려가서 살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소리의 조심스러운 말에 파랑이가 몸서리쳤다.
“난 절대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수영 잘하는 네들 중 한 명이 꼭 그래야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너 수영 못해? 우리 옛날에 같이 수영 배웠었잖아?” 번이 의아한 듯 묻자 소리가 대신 답했다.
“파랑이는 우리가 열심히 수영을 배우는 동안 우리가 싸 온 도시락을 티 안 나게 빼먹는 법을 익혔을 뿐이야.”
번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파랑이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내가 수영하는 날이면 유독 배가 더 고팠구나? 도시락에 매일 소시지가 한 개밖에 없었거든.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범인이 여기 있었네?”
그러자 파랑이가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내, 내가 언제!”
그녀는 민망한 듯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당당히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크흠, 됐고! 수영 잘하는 당신들께서 내려가 살핀다 하더라도 밧줄을 내려주지 않는 이상 올라올 수 없을 거야. 목숨 동아줄이 누구 손에 있는지 기억해.”
이에, 두 사람이 매끄러운 동굴벽을 보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내려갈래? 네가 아니면 소리가?”
파랑이의 말에 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내려갈게!”
그때, 갑자기 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만 얘들아!”
소리의 다급한 외침에 파랑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너 설마 여행자들에게 필수품목인 밧줄을 안 챙겨 온 거야?”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밧줄이 언제부터 여행자들의 필수 품목이 된 거야?”
“그거야 여행을 하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나에게 해를 가하면 기절시켜 기둥에 매달아 나의 강함을 뽐내야 하고, 또 나쁜 사람을 만나면 발목에 돌을 감아 물에 빠뜨려 나의 무서움을…….”
번과 소리가 눈을 마주쳤다.
“파도소리를 사러 오시는 손님들 중 항해사였던 분들이 꽤 많거든, 그분들은 대부분 자신이 바다에서 펼친 영웅적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셔.” 소리의 작은 중얼거림에 번이 혀를 끌끌 찼다.
”딱히 좋은 일들을 하시던 분들은 아니었나 봐?” 번의 말에 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항해의 가장 기본 덕목 중 하나가 약탈이라나? 맞지, 파랑아?”
“오, 참소리 네가 뭘 좀 아는구나? 맞아! 바다에서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돼!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소리는 혼자 허공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파랑이에게 시선을 거두고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아까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곳이 끝없는 강일 확률은 없어.”
그 말에 번이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두더지들이 우릴 언제까지 이곳에 가둬둘지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경우를 염두해 잠시 보류하자. 두더지 요정님들은 사과를 좋아하시긴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음식들도 많이 있으니까, 조금 진정이 됐을 때 거래를 제안해 보는 거지. 어때?”
“아주 좋은 생각이야!” 파랑이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아잇, 깜짝이야!” 번이 파랑이를 흘겼다.
“그러니까 누가 나 말하는데 무시하래, 엉?”
소리의 눈동자가 구멍 속 잔잔한 물을 향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메모와 지도를 보면 끝없는 강은 황폐한 사막의 끝자락에 위치한 모래언덕 너머에 위치하거든.”
번이 눈을 크게 떴다.
“지도가 있다고?”
소리가 손에 들린 지도를 내보였다.
“이거야, 그리고 난 어쩌면 이 물이 끝없는 강과 이어졌을 가능성도 보고 있어.”
번이 눈을 반짝이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소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도를 펼쳐 보였다.
어느새 희망이 깃든 파랑이와 번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지도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곧 지도를 쳐다본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지도를 쳐다보는 파랑이의 눈 밑이 세차게 떨렸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지도가, 지도가 어떻게 이렇게 불성 할 수 있어? 너, 장난하는 거지? 지금까지 이런 걸 지도라고 보고 있었다고?”
“응, 왜?” 소리가 모르겠다는 듯 묻자 번이 믿기지 않는 듯 지도를 홱 빼앗아 들었다.
“말도 안 돼…….”
번의 손과 함께 지도가 세차게 떨렸다.
지도엔 정확히 네 개의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제일 큰 원은 황폐한 사막, 그 안으로 점점 작아지는 세 개의 원을 지나 그들의 목적지인 고요의 땅이 엑스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파랑이가 소리 치치자 번도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소리에게 지도를 넘기더니 굵은 기둥에 상체를 기댔다.
“끝났어.”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어. 매우 불안해졌거든…….”
파랑이가 슬픈 듯 떨리는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원망스러운 눈길로 소리를 쳐다봤다.
“이제 어쩔 거야!”
소리는 눈을 굴리더니 그들을 향해 살포시 지도를 들이밀었다.
“얘들아, 물론 이 지도가 너희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중요한 내용은 다 들어가 있어. 어느 지도에도 설명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잖아? 하지만 여길 봐”
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 보면 원래 사과를 이용해 두더지들의 땅굴 수레를 이용하여 끝없는 강으로 이동한다라고 써져 있잖아? 하지만 우린 감옥에 갇혔지. 그 말은 네들의 연기가 순진한 두더지들도 속일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는 거야.”
소리의 뻔뻔함에 두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순진하긴 무슨, 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랬냐! 엉?” 파랑이가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번도 이번만큼은 소리의 편이 되고 싶지 않은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내 말은, 지도만을 탓할게 아니다 뭐 이런 말이었지…….”
소리가 약간은 예민해져 버린 두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좋든 싫든, 힘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어?”
파랑이가 표독스럽게 번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모지리 너 때문이잖아! 괜히 따라와서, 너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두더지들 수레를 타고 편안히 끝없는 강에 도착했을 거 아니냐고!”
이에, 번이 헛기침을 하더니 억울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지도가 조금만 성실했다면 다른 길을 찾는 게 조금은 쉬웠을 텐데…….”
두 사람의 시선이 지도를 향하자 소리는 저들의 분노에 찢길지 모를 지도를 돌돌 말아 얼른 품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조금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우리 그래도 힘내보자, 그럼 특별한 길잡이가 나타나 도와줄 거야!”
“특별한 뭐?”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특별한 길잡이! 그 길잡이만 만나면 고요의 땅으로 가는 것쯤, 식은 죽 먹기일 거야. 그리고 지도는, 쿠로 할아버지가 직접 그리신 거라 부족한 건 사실이야. 그 점은 미안해.”
두 사람이 놀란 듯 소리를 바라보자 소리가 얼른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분명 이 지도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드신 거라고 하셨으니까 믿어도 좋아, 설마 쿠로 할아버지가 내가 볼지도 모를 이 지도를 대충 만드셨겠어?”
그러자 번이 파랑이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쿠로할아버지랑 소리가 별로 안 친했나?”
파랑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소리를 괴롭힌다는 걸 알고 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려고 했을 정도?”
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보다 쿠로 할아버지가 그린 거라 하니 이제야 이해가 되네……. 세상에 저딴 지도가 어딨겠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소리가 불편한 듯 짐가방을 툭 걷어찼다.
그러자 파랑이가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하하, 쿠로 할아버지는 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셨지? 어릴 적 날 그려 주신 그림도 아직 집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너도 아직 갖고 있지?”
파랑이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번에게 눈치 했다. 하지만 눈치랑 거리가 먼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아버지가 그림을 보자마자 무슨 이런 기괴스러운 그림이 다 있냐며 창고에 처박아 뒀을걸? 그, 그림 속 남자애가 나인 줄도 모르고 묘하게 나와 닮아 기분이 나쁘다고 하셨지. 태워버리려던 걸 내가 말려서, 악!”
파랑이가 냅다 번의 뒤통수를 갈겼다.
“이 미친놈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파랑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용하니까 좀 낫다, 그렇지?”
소리가 말없이 조약돌을 만지작 거리며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