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마루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도저히 빈둥빈둥 계획을 세울 기분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고 다니자 소리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잡생각은 이제 그만! 파랑이 말대로 이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그러자 소리의 눈에 정리가 안돼 어수선한 가게 내부가 훤히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가게가 마치 지금 소리의 머릿속 같았다.
“주변이 지저분하니까 머릿속도 지저분해지는 거야.” 소리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마음이 복잡할 땐 역시 육체노동이 최고지. ”
소리는 깨진 소리병은 옆으로 치워놓고 상태가 양호한 소리병들을 정성껏 호호 불어가며 상자에 담았다.
“소리는 전부 사라졌지만, 온기는 느껴져.”
소리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낡은 나무 바닥에 나뒹굴던 소리병들을 말끔히 치우자, 이번엔 처참히 부서진 매대가 소리의 눈에 들어왔다.
“번 너는 언제 철들래? 어째, 커가면서 더 말썽이니?”
소리는 늘 자신을 짜증 나게 하는 번을 떠올리며 부서진 나무 파편들을 차곡차곡 상자 안에 쌓아 올렸다.
“생각보다 큰 상자가 필요하겠는데? 모딕 삼촌에게 상자를 더 달라고 해야겠어.”
소리는 허리를 펴기 전, 잽싸게 파편하나를 주워 올렸다. 그 순간, 부서진 매대의 흔적이라기엔 뭔가 이질적인 물체의 한 면이 눈에 들어왔다.
경계하듯 가만히 그것을 노려보던 소리가 조심스레 파편을 옆으로 치워냈다.
그러자 고동색의 고급스러운 상자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의 눈이 커졌다.
“이건……쿠로 할아버지의 비밀 상자잖아!”
재빨리 상자를 들어 올린 소리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의 상자를 발견한 후, 한층 경계가 풀어진 그녀는 곧바로 나무바닥에 그려진 정체 모를 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건 뭐지?”
나뭇바닥에 그려진 흰색 선은 반원보다는 얇고 굴곡진 모양이었는데 그림이라고 하기엔 단순했고 낙서라고 하기엔 정교했다.
소리가 흰 선의 모서리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자, 침을 묻혀 박박 문질러도 보고 손톱으로 선의 가장자리를 긁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그려놓은 그림인가? 하지만 그때는 분명 못 봤는데 어두워서 못 본 건가?”
소리는 어릴 적, 술래인 파랑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매대 밑으로 숨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참을 매대 밑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던 소리는 답답함에 매대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쿠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할아버지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숨은 소리를 눈감아주는 대신 괴담 속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달려와 그녀를 매대 밑에서 잡아끌었다.
뒤늦게 두 사람을 발견한 파랑이가 쿠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무서워 울먹일 정도였으니 그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그날 할아버지가 왜 화가 난 건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사색이 된 채로 다시는 매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몇 번이며 반복적으로 얘기할 뿐이었으니까. 혹시 낡은 매대가 무너져 자신을 다치게 하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일까?
어쨌든 그날 이후로 쿠로할아버지는 소리를 혼내지 않았다. 덕분에 소리는 일주일 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쿠로 할아버지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적 낙서를 들킬까 봐 쑥스러우셨던 걸까?”
소리는 본인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픽 웃음을 흘렸다.
“입 모양 같기도 하고……아니, 끝이 뾰족한 바나나인가? 그런데 분명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소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상자를 들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보다 어떻게 이 상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할아버지가 늘 옆에 끼고 계시던 상잔데 말이야…….”
소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상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역시 열리지 않자 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던져볼까?”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을 줄 알고 함부로 던진단 말인가…….
초조하게 까닥이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도 있는 법, 열쇠도 상자처럼 어딘가에 숨겨 두신게 분명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는 가게 안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가게 안을 샅샅이 뒤져도 열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리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기진맥진한 몸을 마루 위로 던졌다.
“도대체 왜, 왜 없는 거냐고!”
마루에서 발버둥을 치던 소리가 작게 심호흡했다.
“아니야, 진정하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안 찾아본 곳이 어디 있지?”
삐질 난 땀에 덕지덕지 붙은 잔머리가 말라갈 즈음,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더니 천장에 매달려있던 모빌이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빌로 향했다.
“기분이 좀 이상하네. 예전엔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이 모빌을 쳐다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상자 덕분인지, 꼭 할아버지가 곁에 계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리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포근함을 잠시 있는 그대로 느꼈다.
소리가 다리를 들어 허공을 향해 쭉 들어 올렸다. 늘 멀기만 해 보였던 모빌이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녀의 유연한 발끝이 반짝이는 조약돌을 툭, 건드렸다.
“됐다!” 소리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였다. 모빌 한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낯선 물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소리의 눈이 커졌다.
“저건, 분명!”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분명 저건 열쇠였다.
소리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은 마음과는 달리 급할 거 없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작은 돌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열쇠가 빛을 받아 황금빛을 뿜어냈다.
“나도 참 너무 하네……. 이렇게 알 봐달라고 매일 빛을 내고 있었을 텐데 순서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소리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열쇠를 잡아당겼다.
지금은 감상 따위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소리가 심호흡을 하더니 상자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자물쇠에 심장이 요동쳤다.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할아버지의 편지? 아니면 부모님의 흔적……? 그게 무엇이든 좋다.
요즘처럼 힘들 때엔 가족들의 작은 흔적이라도 큰 위로가 될 테니까.
소리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자, 여러 장의 종이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꺼내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기대하던 편지는 아니었지만 실망스럽진 않았다.
종이엔 수줍게 웃고 있는 소리의 모습, 멍 때리고 있는 모습, 쿠키를 먹고 있는 모습, 소리병을 들고 있는 모습등 온통 소리의 모습들로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나만 쳐다보고 있었나 봐…….”
수많은 쿠로할아버지의 그림 속 주인공이 모두 자신이라는 사실에 소리는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져 왔다.
소리는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꺼내어 마룻바닥에 펼쳐 놓고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종이를 꺼냈을 때, 소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종이엔 유일하게 자신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백지상태였다.
“이건 뭐지? 잘 못 넣으신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꽤나 고급진 가죽의 질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소리가 양피지의 뒷장을 살피려 할 때였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더니 마루 위에 가지런히 펼쳐 둔 그림들을 모두 흩뜨려트렸다.
“아, 안돼!”
종이들이 소리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는 듯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한 장의 종이가 소리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흰 백지일 줄만 알았던 종이에 분명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손녀, 소리에게’라고 적혀있었다.
소리는 얼른 다른 종이들도 살폈다. 바람에 날려 떠오른 종이에도 뒤집혀 떨어진 종이 뒷면에도 틀림없이 쿠로 할아버지의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소리는 얼른 흩어진 종이를 모두 주워 모으며 그림들이 다시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소중히 모은 종이들을 꼭 안아 들고 마루에 앉았다.
“아, 아…….”
물길이 흘러 얼룩덜룩 번져버린 쿠로할아버지의 삐뚤빼뚤한 글씨를 감싸주려는 듯 소리의 눈물방울이 그 위로 토도독 떨어져 내렸다.
“안녕. 할아버지…….”
소리가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손녀, 소리에게.
소리야, 할아비다. 소리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겠지? 네게 해줄 말이 참 많았다. 하지만 전할 수 없었어. 그땐 우리 소리가 많이 어렸거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도 모자란데 차마... 그날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겁이 많았던 게지. 너마저 날 떠날까 두려웠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 이런 모난 방식으로 전하는 할아버지를, 이게 다 소리 널 위한 일이었다고 마지막까지 변명을 하는 이 비겁한 할아비를 용서해 다오.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할 거란다. 이 할아비가 원망스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소리야,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의 노력을 봐서라도 부디 너무 미워하지 말아 다오.
널 너무 사랑해서 지켜주고자 했던 우리 가족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소리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까...
참, 상자 안에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돈을 넣어놨단다. 새 출발을 하는 데는 충분한 돈이 될 거야. 이 편지를 다 읽은 후 부디, 하루빨리 소리의 땅을 떠나길 바란다.
두 장을 연달아 읽은 소리가 재빨리 다음 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단, 이 긴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 소리가 태어난 가장 행복했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가야겠구나.
그날도 늘 그랬듯 하늘은 밝고 화창했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네가 찾아왔지. 아주 기쁜 날이었어. 무서운 불행이 바로 코앞까지 찾아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파랑이가 허겁지겁 밥을 한입 욱여넣더니 현관으로 냅다 달렸다.
그러자 파랑이의 엄마, 매기가 국자를 들고 뛰쳐나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올파랑! 아침부터 어디 가려고? 오늘은 가만히 집에 있어. 소리시장 영업까지 중단된 마당에 지금 밖이 얼마나 흉흉한지 몰라서 그래?”
그녀는 하루 사이 발이 커지기라도 한 건지 운동화에 힘겹게 발을 구겨 넣는 딸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나갈 거면 밥이라도 먹고 나가던가, 아직 국도 안 떴어!”
“국은 냄새로 먹었어! 벌써 일 년째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는 아주 맛있는 버섯국 냄새.”
이에, 매기가 얼굴을 붉혔다.
“얘는, 누가 들으면 정말 내가 일 년 동안 버섯국만 끓여준 줄 알겠다!”
그러자 파랑이가 매기의 등 뒤에서 멋쩍은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빠를 도너를 향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맞잖아.”
도너가 대답 대신 눈을 굴리며 소파에 앉았다.
“가끔은 아니었을 수도…….”
의리 없는 아빠, 도너의 배신에 실망한 파랑이가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곧 엄마가 국자를 벽에 탕탕 치자 얼른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걱정 마, 엄마. 이상한 데 가려는 게 아니고 소리한테 가는 거야. 오늘 소리랑 하루 종일 놀기로 했거든.”
“뭐, 하루 종일? 당장 그 신발 안 내려놔?”
매기가 고무장갑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도너가 눈치 있게 자신의 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참, 소리 안 본 지도 꽤 됐지? 소리한테 보고 싶다고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해! 남자도 아니고 소리라면 괜찮지! 대신, 내일 아침까지는 와야 한다? 오랜만에 가게 대청소할 거거든. 이런 날이 흔치 않아요!”
도너의 능글맞음에 매기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도너를 노려봤다.
파랑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허리 뒤로 도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도너가 딸을 향해 윙크를 보냈다.
“여보! 지금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매기의 외침에 도너가 흠칫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파랑이는 자신의 엄마가 시선을 뺏긴 사이 작아진 운동화를 던져두고 재빨리 옆에 놓인 슬리퍼를 양팔에 하나씩 끼워 넣고는 맨발로 현관을 나섰다.
“엄마! 걱정 말고 오늘은 오랜만에 아빠랑 오붓한 시간 보내!”
“뭐, 뭐? 얘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기다려! 국에 밥 말아서 한 숟가락이라도 떠먹고 가든가!”
하지만 이미 파랑이는 사라진 채였다.
매기가 얼굴을 붉힌 채, 도너를 바라봤다.
“쟤가 왜 저러나 몰라…….”
“큼,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동생을 원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지.”
신문을 들고 있던 도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테이블에 올려 두더니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매기는 의미 모를 미소를 띤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너를 보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아니, 오늘따라 다들 왜 이래. 일단 밥부터 먹고…….”
도너가 곧장 그녀를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여보, 나도 오늘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고 늦게 들어올 거 같아, 그러니 당신, 오랜만에 혼자 편히 쉬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기회가 흔치가 않아요.”
국자를 든 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내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도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황한 도너가 자기 신발 대신 파랑이가 던져둔 운동화에 두 손을 욱여넣고 괴상한 몸짓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여보, 내가 많이 사랑해!”
조용한 집안, 매기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아무래도 오늘 부녀가 쌍으로 저세상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본데……그렇게 원한다면 보여주지.”
매기의 손에 들린 국자가 힘없이 휘어졌다.
소리의 가게로 향하던 파랑이는 갑자기 느껴지는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지? 이 익숙한 오싹함, 설마 아빠가 또 일을 그르친 건 아니겠지?”
뒤늦게 자신에게 운동화를 들고 맨발로 달려오는 바보 같은 아빠, 도너에게 운동화를 건네받으며 이유를 알게 된 파랑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낡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걸 다 잊을 만큼 행복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파랑이가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빙그르르 돌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짜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멋있는 올파랑 등장이올시다!”
하지만 파랑이를 맞아주는 건 깊은 적막뿐이었다.
파랑이가 얼굴을 찌푸린 채 소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소리야, 참소리, 너 어딨어! 어딨는 거야?”
파랑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그때였다.
“거참 귀청 떨어지겠네. 그러다 너 목 상한다? 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야 할 아이들도 생각해 줘야지. 참, 그중 한 명이 나라는 사실 있지 마. 응애.”
소리가 양치질을 하며 굵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파랑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파랑이가 원망 섞인 눈으로 소리를 노려보았다.
“징그럽게……! 있으면 기척이라도 내야지!”
그러더니 마루 위, 소리의 상체만 한 큰 짐가방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말도 안 되게 큰 짐가방 같은 건 뭐야?”
“보시다시피 짐가방이야.”
“무슨 짐가방?”
소리는 대답대신 입에 한 움큼 물을 머금었다.
파랑이가 눈을 굴리더니 두 손을 맞부딪혔다.
“아, 짐 옮기는 게 너의 빈둥빈둥 첫 번째 계획이구나? 그럼 이걸 빈둥빈둥 계획이라고 할 수 있나? 일하는 거잖아…….”
풀 죽은 듯 어깨를 축 내려 뜨리던 파랑이가 곧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큰맘 먹고 도와준다! 대신, 아주 맛있는 밥을 사야 할 거야!”
소리가 입가의 물기를 팔로 쓰윽 닦았다.
“그게 아니야,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
“네가 갈 데가 어딨는데?”
파랑이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소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배낭여행 정도로 생각해 줘. 떠나기 전 파랑이 네 얼굴을 보고 갔으면 했는데 참 다행이지 뭐야.”
소리가 파랑이를 지나쳐 마루를 향했다. 그러자 파랑이가 그녀의 팔을 세 개 붙잡았다.
“좀 알아듣게 말해!”
“여행이라니까?”
파랑이의 얼굴에 강한 불신이 떠올랐다.
“나 힘센 거 알지, 제대로 말 안 하면 여행이건 뭐건, 이 가게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
말이 끝나자마자 파랑이가 소리의 다리에 거머리처럼 철썩 달라붙었다.
“이거 놔! 시간이 별로 없다고!”
소리가 있는 힘껏 다리를 털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파랑이를 내려다봤다.
“뭐, 왜?”
파랑이가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몸소 실천해 보이기 위해 몸을 더욱 가깝게 밀착시켰다.
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의 땅으로 갈 거야.”
파랑이가 잠시 멍하니 소리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내뱉으며 귀를 후볐다.
“풉, 아 잠깐만, 나 방금 헛소리를 들었어. 네가 고요의 땅에 간다는…….”
하지만 곧 진지한 표정의 소리와 눈이 마주치자, 파랑이가 기겁하며 두 손을 양볼에 가져다 댔다.
“너 미쳤어?”
이에, 소리가 자유로워진 다리를 잽싸게 쏙 빼내며 심드렁히 말했다.
“이렇게 쉽게 이해해 주다니, 그럼 바빠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