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소리가 가게의 영업 팻말을 신경질적으로 떼어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팔리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인 소리병들을 보니 시끄러웠던 속이 한순간 잠잠해졌다.
하지만 깊게 사무치는 허전함에 그녀의 시선이 텅빈 계산대를 향했다.
그동안 소리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쿠로 할아버지는 5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쑥스러움이 많고 어리기만 하던 소리는 어느덧 당찬 15살, 모든 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인 참소리 가게를 팔아버렸다.
소리는 한쪽에 던져둔 영업 팻말을 주워 준비해 놓은 상자에 담았다.
“그렇게 지키려 발버둥 칠 땐 언제고 이젠 보내줄 때가 된 거겠지…….”
소리의 낮은 한숨 소리가 정적을 타고 가게 안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소리의 등 뒤로 오늘 하루, 아니 어쩌면 평생 가장 듣기 싫어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대한 빨리 비워줬으면 좋겠는데?”
소리가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바라봤다.
별일이 없다면 예정대로 한 달 뒤 이곳의 새 주인이 될 번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긴 했지만 유예기간이 끝날 때까진 아직 내 소유인 가게야.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단 얘기지. 그러니 네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을 들어줄 이유도, 네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이유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
소리의 단호함에 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이 왜 필요한 건데? 그냥 깔끔하게 팔아넘기면 되잖아. 설마, 이 낡아빠진 가게에 미련이라도 남은 거야?”
“그만하고 가라, 지금 당장 계약서 찢어버리는 수가 있어.”
소리가 평범한 목소리가 담긴 소리병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번이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봐, 목소리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낡아빠진 가게를 그 돈 주고 살 사람은 우리 아버지밖에 없어. 더 몫 좋은 곳도 많은데 옛정 생각해서 도와주려는 나에게 협박이라도 하는 거야? 솔직히 이 가게를 못 팔면 곤란한 건 잖아,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도와주겠다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소리의 눈밑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매섭게 번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럼 사지 마. 그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보고도 우리 가게를 사려 하길래. 난 꼭 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줄 알았지. 뭐 우리 가게 바닥에 내가 모르는 보물이라도 묻혀있니?”
소리가 빈정거리며 말하자, 번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겼다.
“보물? 이 낡아빠지고 쓸모없는 가게에 그딴 게 어디 있겠어. 우리 아버지가 오래전 네 부모님과 친구만 아니었다면 얼토당토않은 가격으로 이 낡은 가게를 매입하시진 않으셨을 거야. 그러니 더이상 아버지의 호의를 욕되게 하지 마.”
번이 언성을 높였다.
“친구? 부모님을 고요의 땅으로 보내 죽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소리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자 번이 숨을 들이켰다.
“그, 그건 분명 오해가……!”
“넌 내가 아직도 그 순수했던 5살짜리 꼬마로 보이나 봐? 시체도 찾지 못할 그곳에서 난 부모님을,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어. 하지만 네 아버지는 그 슬픔을 이겨내고 어떻게 든 살아가려는 할아버지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소리에 대한 이상한 모함과 소문을 퍼뜨리며 끊임없이 할아버지와 날 괴롭혔지.”
소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너와 촌장님이 이렇게까지 해서 이 가게를 차지하려는 이유가 뭘까? 그딴 거 알고 싶지 않아. 순전히 나를 위해서! 더러운 것들 때문에 내 삶을,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소리가 무서운 얼굴로 번을 노려봤다.
“오늘처럼 계속 날 자극한다면 난 그 비밀이 무척이나 궁금해질 거야.”
번이 당황해하며 손사레를 쳤다.
“넌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어. 그저 아버지와 난, 널 도와주기 위해……!”
“내가 비밀을 알아내고 싶게 만들지마. 그럼 이 가게는 절대 네 아버지의 손에 들어갈 수 없을테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지.”
번은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보란듯이 얄밉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봐, 목소리. 계속해서 남의 호의를 적의로 받아들이니 너도 참 살기 어렵겠다. 근데 그거, 네 자격지심이야.”
소리가 번을 무시하듯 지나쳤다. 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아마 쿠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쯤이었지? 어릴 때 나에게 악랄한 주술을 건넜더그 이상한 취향의 여자 말이야.”
소리의 걸음이 멈췄다.
“지금까지 그 여자가 네 쓸모없는 목소리를 사주지만 않았어도 우리 천둥 가게가 3호점을 내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겠지. 세상에 팔게 없어서 목소리를 판다니, 또 그걸 사는 사람은 어떻고? 그 여자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뭐 끼리끼리인가?”
번의 비아냥에 소리가 무서운 표정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팔짱을 꼈다.
“뭐 짜증나는 여자긴 했지만 1년 전부터 안 보이는 이유가 내심 궁금하긴 하더라. 너는 알고 있을 거 아냐? 이 별 볼 일 없는 가게의 단, 한 명뿐인 손님이었는데……혹시, 그 여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 아냐? 설마, 죽은 건 아니지?”
소리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소리가 떨리는 손으로 낡은 매대를 더듬더니 목소리가 담긴 뾰족한 병을 들어 번에게 들이댔다.
이에, 깜짝 놀란 번이 뒷걸음질 쳤다.
"야, 야! 너 왜 그래? 당장 그거 안 치워?"
번은 궁지에 몰리자 재빨리 상체를 낮춰 몸을 피했다. 하지만 곧 발이 엉켜버려 자신의 발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쓰러지는 방향이 확실히 좋지 않았다. 얼마남지 않은 쿠로할아버지의 소리병들이 올려진 매대가 있는 그 곳, 소리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소리가 잽싸게 쓰러지는 번의 팔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단 무거운 번의 몸이 중력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쿠당탕 탕탕-
소리의 두 눈이 떨렸다.
“……안돼.”
결국 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낡은 매대는 힘없이 부서져 내렸고, 쿠로 할아버지의 온기가 담긴 소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의 그리운 바람소리가 깨진병 틈으로 새어 나와 가게 안을 맴돌았다.
“……늘 이런 식이지.”
소리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번이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자 그의 입에서 고집스러운 천둥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
소리가 번에게 다가가 뾰족한 병을 그의 손에 턱하고 내려놨다.
“당장 이 가게에서 나가.”
소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번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 아니 그러니까 소리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네가 갑자기 이런 걸 들이대는 바람에……!”
“당장 꺼지란 소리 안 들려?”
소리의 절규섞인 비명이 가게 안을 떠도는 쿠로할아버지의 바람 소리와 합쳐져 큰 울림을 내었다.
이에 놀란 번이 도망치듯 소리의 가게를 빠져나왔다.
곧,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성격이 왜 저렇게 모나진 거야…….”
소리가 맥주잔을 쾅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놨다.
“캬아!”
“야, 너 괜찮아?”
소리의 하나뿐인 친구, 파랑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소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꼭 섬뜩한 피거 뚝뚝 떨어져 내리는 거 같은 착각을 일게 만드는 기둥이 두개 있었는데 그 사이에 걸린 기괴한 액자 속에 '먹고, 마시고, 죽어버려!' 라는 분명 저주의 주문이 틀림없을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 기괴한 주점의 이름은 먹마죽 식당이었다. 그리고 소리와 파랑이는 15살이 되자마자 특별히 소리의 땅에서만 허용적인 알콜의 맛을 느끼기 위해 먹마죽 주점에 발을 들였다.
먹마죽 주점은 소리의 땅 최고의 힐링 장소라 할 만큼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주점 곳곳엔 무시무시하고도 끔찍한 한 여인의 한이 담겨 있었으니…….
“자, 다들 처먹고, 처마시다 그냥 팍 죽어버리소!”
뒤늦게 출근한 먹마죽 사장 모라부인이 식칼 두 자루를 들고 섬뜩하게 외치자,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치며 환호했다.
그러자 모라부인은 자신의 진심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구시렁대며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모라부인은 술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 주점을 차린 단 하나의 이유는 술을 좋아해 매일 일을 그르치는 자신의 남편, 파트를 저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먹마죽 식당 내부는 벽부터 시작해서 작은 식기와 술잔, 휴지 한장까지 남편을 향한 부인의 저주가 담긴 글과 그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어째선지 자신들을 향해 배려가 느껴지는거 같다며 주점을 칭찬하기 바빴다.
어차피 술독에 빠져 죽을 거 눈앞에서 죽으라는 모라부인의 마음이 감동적이라나?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이토록 이 주점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모라 부인 스스로도 몰랐던 술 담그는 재능과 그녀의 기깔나는 요리 솜씨였다.
그렇기에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매일 장사만 하는 소리의 땅 마을사람들에게 먹마죽 식당의 신선한 음식과 과일주는 큰 위로가 되었고 결국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먹마죽식당은 공동묘지가 아닌, 소리의 땅 최고의 힐링 장소가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갑니다, 가요!”
바빠진 모라부인을 돕던 파트 아저씨가 손님들께 술을 나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좋아하던 술을 가까이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아저씨를 보고 소리는 왠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저씨에게 만큼은 이 주점이 벌이겠네요.” 소리가 작게 중얼거리자 파랑이가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너 안 괜찮구나?”
파랑이가 오징어 대신 젓가락을 씹어대는 소리를 향해 말했다.
“응? 으응, 안괜찮으게 뭐가 있어.” 소리가 의연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오징어로 손을 뻗었다.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과일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자 모라이모가 주방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파랑이를 힐끔거렸다.
아마 잔뜩 술에 취한 파랑이가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파도 소리를 내질러 술집에 있는 모든 이들의 술맛과 흥을 떨어뜨리기 전에 언제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함일 것이다.
“올파랑, 적당히 마셔. 모라 이모 칼 들고 뛰쳐나올라.”
소리가 모라이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자 모라 이모가 구시렁대며, 힘 있게 웍질을 시작했다.
“그래서 너 이제 뭐 할 건데?”파랑이가 말했다.
“글세, 이곳과 아주 멀리 떨어진 땅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거긴 이상한 네모 상자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고 하더라. 그곳 사람들이 내는 소리는 나처럼 목소리밖에 없대. 나도 그런 곳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럼 모자란 애라고 손가락질당할 일은 없었을 거 아냐. 하지만 거기에선 이런 맛있는 과일주를 먹을 수 없겠지?”
소리가 주전자에서 흐물흐물해져 버린 자두를 건져내며 말했다.
“그 단골손님이 해준 말이야?”파랑이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맞아. 그분은 아주 대단한 여행자야.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지. 그런 걸 보면 우리 소리의 땅 사람들은 너무 바보 같아. 그저 이 땅 밖으로 한 발짝을 나가지 않잖아.”
“우리에겐 이곳을 나가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잖아.”
“뭐, 밤의 저주?”소리가 파랑이를 쳐다보자 파랑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바로 그거.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사람들이 굳이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이에, 소리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그게 이 땅밖으로 나가지 않는 겁많은 마을 사람들의 진짜 이유겠지. 고요의 땅도 아니고 이 마을 밖에 밤의 저주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소리의 땅 밖은 그냥 사막일 뿐이야.”
파랑이가 눈을 굴렸다.
“그래, 나도 네 말에 동의해. 괜히 여행자들 말에 홀려 소리시장의 노예들이 재미없는 이 땅을 떠나 모험이라도 한다고 하면 난감할테니까 지어낸 그럴싸한 괴담같은거겠지.”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소리시장의 노예들이니라니, 그 말이 너무 웃프다”
파랑이가 과일주 대신, 시원한 맥주를 가득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뭐 노예탈출 기념으로 사막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려고?”
“가게도 팔아버린 마당에 못할 것도 없지. 나도 그분처럼 여행자나 돼볼까?”
“그게 뭐 말처럼 쉬운줄 알아? 너 태어나서 소리의 땅 밖으로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잖아. 아는거라곤 그 손님이 해준 두루뭉술한 말뿐인데 그런 얘기만 듣고 결정하는 건 너무 위험해. 그리고 그 여자, 여행자처럼은 안 생겼다며? 피부도 희고 손도 엄청 고운 데다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는데 그게 무슨 여행자야, 자고로 여행자들이라 함은 피부는 늘 거뭇하고 손과 발엔 굳은살이 잔뜩 있고, 얼굴은 조금 붉으락푸르락 생겨야지? 안 그래?”
그러자 소리가 심각한 얼굴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니, 절대 안그래. 여행자도 예쁠 수 있어. 여행하며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
“글세, 우리 가게의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특징은 너무 비슷해서 말이지. 심지어 냄새도 비슷해.”
소리가 코를 훌쩍이더니 크흠 헛기침을 했다.
“뭐 어쨌든 그분은 시간도 얼마나 철저한지. 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방문해서 내 가게에 있는 목소리를 한가득 사 가셨어. 재밌는 건 나가는 시간도 똑같아. 10시. 그전까지는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셨지. 만약 그분이 여행자가 아니라면 그런 신비한 땅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고 있겠어?”
과일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소리의 눈에 그리움이 떠올랐다.
“꼭 한 번쯤, 다시 만난다면 너무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젠 만날 희망도 사라졌어. 그 손님은 1년 전부터 우리가게에 안 오셨고, 이제 내 목소리 가게는 한 달 뒤면 사라지니까!”
소리가 깔깔거리며 허리를 뒤로 젖히자 의자와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얏! 으하하하!”
소리는 꽤 아플 텐데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참소리! 너 괜찮아? 이,일어날 수 있겠어?”
파랑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부축했다.
큰 소란에 모라부인이 주방에서 고기를 썰다 말고 칼을 쥔채, 엉덩이를 흔들며 뛰쳐나왔다.
“아휴, 정말 시끄러워서 목소리 너 조용히 안 해?”
모라부인이 뒤로 발라당 넘어간 소리와 그녀를 부축하는 파랑이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주접이네 주접이야! 술값 그만하고 다 처먹었으면 집에나 가!”
“헤헤, 모라이모는 매일 나한테만 모라해. 이모, 저 이제 목소리 안 팔아요. 그러니까 목소리 말고 진짜 제 이름, 참소리, 참소리라고 불러주세요! 푸하하하하”
파랑이가 끙끙거리며 소리를 가게 밖 의자에 내동댕이쳤다.
“야, 참소리! 이제 연기 그만해.”
파랑이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소리가 코를 훌쩍이더니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두방정을 떨었다.
“이모 우리한테 돈 안 받았지? 역시 나의 연기력이란……!”
“웃기고 있네. 아까 들어와서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이미 네 주머니에서 돈 빼가셨어. 아마, 네가 부숴 먹은 의자값까지 미리 예상하고 들고 가셨을걸? 난동 값이라고 하지.”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혀를 끌끌 찼다.
“뭐? 왜 말 안 해줬어! 에이, 오늘 같은 날 나 같은 단골한테 이 정도의 정도 안 베푸냐? 오늘은 진짜 가슴 찢어지는 날이라고!”
“넌 그냥, 이모의 수많은 진상 손님 중 한 사람일 뿐이야.”
“흥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웃기다, 얘.”
소리가 새침하게 눈을 치켜뜨자 파랑이가 멋쩍은 듯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먹마죽 식당의 기괴한 시계를 쳐다봤다.
“세상에! 벌써 오후 9시야!”
사색이 된 파랑이가 빠르게 몸을 틀었다.
“나 가봐야 해!”
“뭐? 왜!”
소리가 재빨리 파랑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자아.”
“안돼. 예약이 있어. 내일 아침까지 소라모양 병에 파도소리100개 담아놔야 돼. 문어 유치원에서 아이들 낮잠용으로 쓴다던가? 심지어 이것 말고도, 할 일이 태산이라고.”
파랑이가 소리의 손을 방정맞게 털어냈다.
하지만 소리가 파랑이의 손을 요리조리 피하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자 파랑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방금도 정말 힘들게 시간 뺀 거야. 너 우리 엄마 성격 알지? 이러면 다음부터 진짜 못 나와. 지금부터 숨도 안 쉬고 파도소리를 담아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소리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도와줄게! 나도 파도소리 낼 수 있어! 자 봐봐, 쉬이-철퍼덕 쉬이-철푸덕”
소리가 배시시 웃으며 장난을 치자 파랑이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다음엔 좀 더 길게 있어 줄 테니까, 오늘은 기분 좋게 보내줘.”
“치…….”소리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래, 정말 너무 고마웠다. 가버려!”
파랑이는 헐렁해진 옷자락을 툭툭 털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돌아섰다.
“참소리! 목소리 다시 팔 생각이면 언제든 말해. 우리 가게에 함께 놓고 팔면 되니까, 네 목소리라면 우리 부모님도 흔쾌히 수락하실 거야.”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피식 웃었다.
“됐거든, 난 이제 목소리 안 팔 거야. 너나, 다른 사람들처럼 특색있는 소리도 아니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냥 목소리일 뿐인데 사 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 괜히 자리만 차지하지. 소리 안 팔아도 살아갈 방법은 많아. 그러니 걱정은 넣어둬라, 친구야!”
그럼에도 파랑이의 얼굴에 걱정이 사라지지 않자 소리가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 이제 돈 많아? 멍청한 번의 아버지가 나사가 수백 개쯤은 빠졌는지 우리 가게를 말도 안 되는 금액에 사겠다잖아. 평생 일 안 하고 매일 빈둥빈둥 놀고먹어도 남을 정도지 아마?”
“그래, 그것참 부럽다. 빈둥빈둥 계획도 나쁘진 않겠네.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가게로 찾아와.”
그러자 소리가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내일 문어유치원 원장님 입에 거품 무는거 보고 싶지 않으면 가서 소리나 담아!”
파랑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그래! 그럼 나 간다!”
멀어지는 파랑이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의 땅에서 소리를 안 팔면 뭐하고 살건데. 참소리…….”
늦은 밤임에도 온 땅을 밝히는 햇살을 보며 소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모르겠어. 앞으로 난 뭘 하며 살아야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