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 들어선 소리는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가게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짐이 많을 수밖에……”
사방에 나뒹굴고 있는 깨진 병들을 보니 애써 모른 체했던 슬픔이 다시금 차올랐다.
“할아버지의 소리가 담긴 마지막 병들이었는데……. 왜 하필 이 매대로 넘어져서는!”
입을 꾹 다문 소리가 짐 상자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온종일 해가 떠 있는 소리의 땅. 잠을 자지도 밤이 뭔지도 모르는 마을사람들의 호객행위와 그들의 소리병을 보며 감탄하는 고객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들의 특색 있는 아름다운 소리가 그녀의 허락도 없이 활짝 열린 문을 타고 들어와 고요했던 가게 안을 가득 매웠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없어. 저깟 소리, 다 사라져 버렸으면…….”
그 순간, 소리의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
아주 오래전, 인간이 처음으로 땅을 밟았을 때, 신은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살점으로 빚은 여러 형제를 지상에 내려보냈어. 하지만 신의 살점으로 태어난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인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어.
물론 그렇지 않은 형제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언어가 달라 서로에게 마음도 생각도 전할 수 없었지.
결국 오해와 불신, 상처가 깊어진 형제들은 모두 뿔뿔이 여러 땅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춰버렸어.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는 한, 형제가 있었어.
혹시 그들은 서로 말이 통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 그들도 다른 형제들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대화를 할 수 있었지.
바로,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느끼는 거야.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소리가 없어도 전달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들은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서로의 눈동자를 보며 늘 함께 하기로 다짐했단다.
그 형제들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니? 보석같이 찬란한 눈동자를 가진 형의 이름은 밤이었고, 햇살처럼 따스한 눈동자를 가진 아우의 이름은 낮이었어.
“참소리! 참소리! 소리야!”
어디선가 들리는 낯익은 비명에 소리가 몸을 뒤척였다.
“제발, 소리야 눈 좀 떠 봐.”
이번엔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목소리는…….
답답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파랑이?
밝은 햇살에 금방 다시 눈을 찌푸려야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파랑이의 실루엣이 점차 선명히 드러났다. 그리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생전 눈물이라고는 흘리는 법 없는 파랑이가 슬픈 눈으로 소리의 몸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울부짖고 있었다.
당황한 소리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왜 그래 파랑아……?”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파랑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소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이 바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설마, 날 두고 죽기라도 하려고 한 거야? 이, 이게 다 그 망할 번과 촌장님 때문인 거지? 기다려, 내가 촌장님은 어쩌지 못해도 번 그놈은 반 죽여놓을 수 있어. 그러니까 죽지 마, 흐엉!”
파랑이가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소리가 미간을 좁혔다. 죽어? 누가? 내가?
“자, 잠깐만 파랑아, 파랑아? 내 말 좀 들어봐”
하지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자, 소리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야, 올파랑!”
“어, 응?”
그제야 파랑이가 콧물을 훔치며 소리를 바라봤다.
“으, 야 너 콧물 늘어졌어. 다시 닦아.”
파랑이가 소매로 코를 꽤 정성껏 훔치는 동안, 소리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자, 천천히 다시 말해봐. 누가 죽었다고?”
파랑이는 다시 슬픔이 밀려오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네, 네가……!”
파랑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소리를 가리키자 이번엔 소리가 황당하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소리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헛웃음을 내뱉으며 파랑이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툭툭 잡아당겼다.
“이보세요, 올파랑 씨 나 여기, 살아있잖아. 아니면 혹시 우리 둘 다 죽어서 천국에서 만난 거니?”
“난 안 죽었어! 살아있다고! 오늘 아침에 버섯국 먹고 왔는데 바람 좀 불어줘?”
소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러자 파랑이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소리를 힐끔거렸다.
“내가 밀리네? 귀신은 아니라는 거잖아!"
"당연하지." 소리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걸, 네가 살아있어서 놀랐달까?”
짧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리가 진지하게 묻자, 파랑이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오해는 하지 마. 그러니까 네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미동도 없고 볼을 내리쳐도……!”
소리가 영혼 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어쩐지 따가운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파랑이가 미안한 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파랑이 네 말은 내가 숨도 안 쉬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단 말이지?”
소리가 문댈수록 점점 더 따가워지는 거 같은 볼을 매만지자 파랑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숨은 당연히 안 쉬겠거니 했지.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아 기절한 것은 아닐 거잖아……?”
파랑이의 말에 소리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여긴 멀쩡한 거 같네. 하지만 다른 곳은 곧 퉁퉁 부어오르겠지.”
소리가 다시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파랑이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세게 내리치지 않았거든? 그리고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쪽이 아니고 반대쪽이야."
소리가 얼른 손을 바꿔 반대쪽 뺨을 매만졌다. 이에 파랑이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프게 한건 미안해. 하지만 내게 생각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어. 네가 다른 땅의 사람들처럼 잠에 든 것도 아닐 테니까…….”
파랑이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
“……”
그리고 잠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설마 너 잔 거 아냐?”
“설마 나 잔 거 아냐?”
큰 충격에 빠진 두 사람은 마루에 걸터앉은 채,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소리가 낡은 계산대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입을 열었다.
“너 안 가봐도 돼? 지금 엄청 바쁠 때잖아.”
그러자 파랑이가 허공을 보며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응. 네가 잠을 잤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다리가 안 떨어져. 그리고 어차피 이제 소리 못 팔아.”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히 내뱉는 그녀의 말에 소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야?”
“응, 이제 개소리 전문 독 아저씨도 소리 못 팔아.”
계속되는 파랑이의 성의 없는 답에 소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파랑이가 소리와 눈을 맞췄다.
“쉬이-철퍼덕, 쉬이-철푸덕.”
“뭐 하는데?”
소리가 진지하게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자, 파랑이가 어깨를 들썩였다.
“너처럼 나도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표현해 봤어. 어때?”
“너 정말 오늘 왜 그래? 설마, 배고프다고 또 길가에 떨어진 상한 음식을 주워 먹은 거야?”
파랑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넌 내가 상한 것도 구분 못하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바본 줄 알아?”
어딘가 생각이 필요한 답변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소리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파랑이 너 오늘 아침밥 안 먹었구나?”
파랑이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경련이 일었다.
“먹었거든? 물론, 나도 오늘 아침에 엄마가 버섯 수프에 독버섯을 넣었나 잠시 의심하긴 했어. 결국, 문어유치원 파도소리를 제시간에 못 담았거든. 2분 정도 늦었나? 그런데 그 2분 동안 문어 유치원 원장님이 얼마나 앞에서 지랄을 하시던지, 엄마가 아침부터 문어 원장의 입에서 나오는 따발총을 온몸으로 막아내시느라 고생을 좀 하셨어. 나를 노려보는 그 눈빛에서 엄청난 분노가 느껴지더라.”
파랑이가 몸을 떨었다.
“어쨌든 엄마가 화가 난 문어 유치원 원장을 달래려고 서비스라도 줄 생각에 따끈한 소리를 몇 개 담아주시려는데 엄마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더라. 물론, 아빠도…….”
소리의 얼굴이 굳어져갔지만 파랑이는 개의치 않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입을 벌리기만 하면 나오던 파도소리가 이제 나오지 않아,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나도.”
소리가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올파랑, 나 놀리는 거면 이제 그만해. 오늘 나 때문에 조금 놀랐다고 너 지금 복수하는 거잖아. 그렇지?”
팔짱을 끼며 애써 장난스럽게 파랑이를 흘겼다. 하지만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파랑이의 얼굴에 소리의 심장과 눈동자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장난 아니야.”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잘 들어봐. 네가 늘 듣던 소리와 사뭇 다를 텐데, 진짜 모르겠어? 소리의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의 소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지막까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조용한 가게 안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정말이지……최악이었다.
두 사람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소리가 잠을 자다니…….” 파랑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동시에 마루에 드러누웠다.
“잠을 잔다는 건 무슨 느낌이야?”
파랑이가 재빨리 물어오자, 소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왜 이렇게 담담한 건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야지!”
"어른들도 모르는 답을 내가 무슨 수로 찾아? 하지만 지금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네가 알고 있지"
파랑이의 순수한 호기심 어린 얼굴에 소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장 비슷한 느낌을 꼽으라면……네가 다섯 살 때 냇가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겠다고 물에 들어갔다가 물에 빠져 기절했던 것과 가장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나 지금 되게 진지해. 참소리.”
파랑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를 바라보자 소리가 피식 웃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서 그래. 난 내가 잠이 들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아마 네가 날 발견하지 못했다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줄 알고 한스선생님을 찾아갔을걸?”
소리의 말에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만간 얼굴을 굳히더니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참소리, 오늘 네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잖아. 그렇지?”
파랑이가 소리의 팔을 잡고 힘주어 말하자, 소리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좋아. 그럼, 앞으로도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왜?”
파랑이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의 땅에서 태어난 주민이 잠을 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물론 다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잠을 잔다는 건 너무나 당연 일이겠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하루아침에 모두의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됐고, 우연히 그날 넌 잠이라는 걸 잤어.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당연히 너와 무관한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예민한 상태야. 그들의 원망이 너에게 향할 수 있어. 사람들의 입장에선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동시에 두 개나 일어난 셈일 테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지만 소리가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자 파랑이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의 팔을 쥐고 흔들었다.
“특히 한스 선생님께는 절대 가면 안 돼, 반촌장 님 귀에 바로 들어갈 거라고! 어서 대답해, 참소리. 알겠어? 모르겠어!”
파랑이가 미간을 찌푸리자 소리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정말 나 때문일 수도 있잖아.”
소리의 중얼거림에, 파랑이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든 게 싫었어. 왜 나만 저들과 다른 걸까, 모두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거 같았어. 늘 하던 괜찮은 척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어. 그래서 너와 헤어지고 가게에 돌아와 생각했어. 모두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소리가 고개를 떨궜다.
“내가 그런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에…….”
“푸하하하하!”
소리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파랑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하하, 이 바보야. 네 말 한마디에 모두의 소리가 안 나올 거 같으면 진작에 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텐데? 맞잖아. 넌 늘 토라지고 화가 나면 나한테 사라져 버리라고 하잖아.”
파랑이의 말에 소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건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푸흡, 어제 그 말은 진심이었고?”
파랑이가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치며 장난스럽게 묻자, 소리가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아마도, 그래.”
파랑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그건 친구로서 마음이 아픈 거고…….”
파랑이가 소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소리야, 나 봐 봐.”
파랑이가 조심스레 소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 우리 우연일 뿐인 것에 마음 낭비하지 말자.”
“그런데 만약, 우연이 계속 반복되면? 내가 혹시 또 잠에 빠지면?” 소리의 눈에 불안감이 가득 찼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파랑이가 소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소란이 잦아들면 함께 해결법을 찾아보자.”
파랑이가 배시시 웃자, 소리의 얼굴에 드디어 작은 웃음꽃이 피었다.
“고마워, 파랑아…….”
뿌옇게 먼지가 앉은 창문으로 소리와 파랑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며 가게 밖, 패닉에 빠진 마을 주민들을 살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소리가 안 나오는 걸까”
소리가 묻자 파랑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글쎄 뭐 전염병 같은 게 아닐까? 심각한 건 아니고 잠시 소리가 안 나오는 병 같은 거 말이야. 그래도 이성을 찾은 몇몇 분들이 반촌장 님과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어. 만약, 병이라면 한스 선생님이 잘 해결해 주시겠지.”
소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파랑이의 목걸이에서 작은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파랑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런, 아버지의 긴급 호출이야. 쟁여둔 소라 모양 병이 다 떨어졌나 봐. 어차피 소리도 담을 수 없는데 이렇게 유난이라니까?”
파랑이가 미간을 좁히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의 두 손을 잡았다.
“참소리, 이건 우리에겐 너무 잘된 일이야.”
소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파랑이가 방방 뛰었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제 난 자유의 몸이야! 시간이 남아돈다고, 그러니까 내일부터 네 빈둥빈둥 계획에 날 끼워주는 게 어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마루에 누워있기든, 독 아저씨와 모딕 아저씨의 술래잡기에 참여하기든 뭐든, 가게에 처박혀 파도소리를 담는 것보단 훨씬 즐겁고 재밌을 거야! 아, 지금 떠오른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인데, 빈둥빈둥 계획 첫날 기념으로 모라 이모네에서 실력 발휘 어때?”
하지만 정작 소리가 입도 뻥긋하지 않자, 파랑이가 모자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소리의 발가락을 쳐다봤다.
소리의 슬리퍼로 빼꼼 나온 엄지발가락이 방정맞게 꿈틀거렸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될 걸 가지고, 내가 네 발가락까지 확인해야겠어?”
파랑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툴툴거리자, 소리가 파랑이를 흘겼다.
“애초에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
이에, 파랑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아주 신나게 노는 거다? 최대한 긴 계획을 짜놓는 게 좋을 거야! 내 느낌에, 이 문제가 그리 빨리 해결될 거 같진 않거든? 너도 알지, 나 가끔씩 신기 있는 거? 지금 느낌 딱 왔어! 그럼, 나 간다!”
기분 좋게 가게를 빠져나가는 파랑이를 향해 소리가 손을 흔들었다.
“내일 내 빈둥빈둥 계획표를 보면 아주 깜짝 놀랄걸?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와!”
“그래, 기대할게!”
파랑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리가 박스에 담아 둔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마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