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땅.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소리와 그들의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
바람 소리, 물소리, 빗소리, 새소리, 악기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눈 밟는소리... 가지각색의 다양한 소리가 한데 뭉쳐 시장가를 들썩였다.
“자, 싸다 싸! 물소리 구경하고 가세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파도 소리,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졸졸-흐르는 시냇물과 개울가 소리까지 아주 다양하답니다!”
파도소리 사장, 도너의 외침에 개소리 독아저씨가 질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외쳤다.
“이리로 오셔! 우리 가게 소리가 최고여!”
이어 그의 뒤에 있던 새소리 사장 코코가 수줍게 말했다.
“오늘 담은 꾀꼬리와의 대화 소리는 그 어느 소리보다 가장 아름답고 청량할 거예요”
손님은 잠시 벙찐 듯 코코사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홀린 듯 새소리 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독아저씨가 손님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 양반아! 여기 귀엽고 사랑스러운 개소리가 있다니께! 개소리가 최고라고! 최고!”
이에 깜짝 놀란 손님이 저도 모르게 개소리 병을 집어 들고 당황한듯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독아저씨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최고여"
그때, 지나가던 불소리 가게 주인 모딕이 벙찐 손님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소리병 내려놓는 게 좋을 겁니다. 그 개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화딱지가 나거든요. 얼굴을 보니 며칠을 제대로 못 주무 신거 같은데 심신 안정으로 최고인 모닥불 소리는 어떠세요?”
모딕이 언제 준비해왔는지 모를 유리병을 품에서 꺼내 냉큼 손님에게 안겨주더니 손님의 손에 들린 개소리병을 낚아채 새소리가게 안으로 휘리릭 던져버렸다.
“저, 저놈이?”
다행히 푹신한 방석에 던져진 덕에 유리병이 깨져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독 아저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매대로 달려가 다른 개모양 유리병들까지 꼼꼼히 살폈다.
손님은 얼떨결에 받아 든 불모양 병이 썩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살게요!”
“저쪽으로 걸어가시면 아주 멋있는 가게가 나올거예요. 그곳에서 계산하시면 됩니다.”
모딕이 손님의 어깨를 잡아 반바퀴 돌려주더니 부드럽게 그의 등을 밀어주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손님!”
“쯧쯧, 저리 줏대가 없어서야!”
독 아저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모딕의 가게로 걸어가는 손님을 보며 혀를 찼다.
“코코 사장! 계속 저 망나니 놈을 보고만 있을 거여? 또 우리 손님을 빼돌렸잖어!”
독 사장이 모딕을 노려보더니 팔을 걷어붙였다.
“모딕 너 이 자식, 내가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독 사장의 으름장에도 모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저씨야말로 양심이 있으면 보세요. 매일 코코 씨네 가게에 얹혀 장사 하면서 사장보다 매출이 높은 게 말이나 됩니까?”
“그만큼 내 소리가 좋은 걸 어떡하라고, 어떡하라고!”
독 아저씨가 악을 쓰며 소리치자 모딕이 기가 찬다는 듯 허! 하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죠, 매일 아저씨의 광고성 멘트에 속아서 물건을 사 간 고객들 불만을 착한 코코 씨가 다 응대하니까 장사할 시간이 부족한거잖아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조금 전 손님도 아저씨 소리를 사 갔다면 분명 다시 환불하러 돌아왔을걸요? 전 코코씨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전에 예방해드린거 뿐입니다.”
“뭐, 뭐여?” 독 아저씨가 기가 막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살피던 코코가 얼른 말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봐! 이놈아! 코코 사장이 괜찮다는데 왜 매번 네놈이 지랄이여? 지랄은!”
독 아저씨가 어깨를 편 채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렸다.
“어휴, 누가 개소리나 내는 사람 아니랄까 봐, 눈치도 배려도 없지.”
“오늘 네놈이 나랑 결판을 내고 싶은게지?”
독 아저씨가 험악한 얼굴로 다가가자 모딕이 그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알겠으니까!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독 아저씨가 황당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자 모딕이 도망칠 준비라도 하듯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맸다.
“바보같은 독 아저씨, 그냥 잡으러 오면 될걸 늘 저렇게 기다린다니까? 착한건 아닐테고...역시, 조금 부족한가?”
모딕이 작게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자, 아저씨 전 이제 준비가 됐어요.” 모딕이 놀리듯 그를 향해 손짓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이놈, 잡히기만 해봐라! 오늘은 내가 절대 안봐줄텨!”
독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달려들자 모딕이 난감한 얼굴의 코코를 향해 윙크를 했다.
“코코씨! 제가 눈치 없는 독 아저씨 산책 시켜드릴 동안, 매대에 있는거 싹 다 팔아버려요!”
코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괜찮은데…….”
코코가 옅은 미소를 띤 채 멀어지는 모딕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두 남성의 추격전으로 소리 시장이 다시 한번 크게 들썩였다.
[소리시장 종일 오픈]
간판 옆, 입구를 서성거리는 한 소녀가 건장한 두 남성의 추격전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르는 이 없는 비운의 소녀, 소리는 입구로 들어오는 손님을 한명이라도 놓칠새라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어려서부터 늘 이야깃거리에 중심에 서 있던 소리는 늘 자신감이 부족했다. 물론 그 이야기는 퍽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괜찮아, 난 다른 가게의 손님을 훔치는게 아니잖아…….”
입구를 오가는 손님의 얼굴은 쳐다도 보지 못하고 신발을 살피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 해보는 거야!”
소리가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입구로 들어서는 손님을 대뜸 붙잡았다.
그러자 소녀의 눈앞에 단정한 검정색 구두 한 켤레가 멈춰 섰다.
소리는 눈도 맞추지 못한 채, 준비해 둔 멘트를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저, 저희 가게에 한 번 들려주세요! 어, 엄청 좋은 소리가 많아요! 심지어 저희 가게는 서비스도 있어요! 다른 가게에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서비스요!”
하지만 손님에게 돌아오는 답이 없자, 소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와아…….”
소리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별이 사람이라면 꼭 눈 앞에 있는 이 여자일것임에 틀림없었다.
소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여자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꼬마 사장님, 난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를 찾고 있어. 추천할 만한 게 있다면 따라가 봐도 좋을 거 같은데?”
그녀의 머리에 꽂힌 비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흔쾌히 자신을 따르겠다는 손님의 말에 당황도 잠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소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당, 당연히 있어요. 무시무시한 소리!”
소리는 앞장서 걸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자기 행동에 대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리의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의 가게를 찾아준 손님들을 응대하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하느라 소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좋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봐, 참소리! 너도 할 수 있다고!”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한 소년이 소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무뒤에 숨어 소리를 지켜보고 있던 말썽쟁이 소년 번이었다.
소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번이 절대 이 상황을 곱게 봐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뭐야? 이제 찾아 주는 손님이 없다고 입구에서 손님을 훔치는 거야?”
번의 비아냥에 소리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손님을 훔치려고 한 적 없어! 그저 손님이 찾으시는 필요한 소리가 우리 가게에 있어서 안내해 드리는 것뿐이라고……!”
소리의 말에 번이 코웃음을 쳤다.
“목소리야, 목소리야? 나 이 마을 촌장 아들이야. 돌연변이인 너에게 병이 옮아서 쿠로할아버지도 더이상 바람 소리를 못 내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런데 그 가게에 무슨 소리가 있겠어? 오래되서 질 떨어지는 물건을 팔 생각이면 당장 그만 둬, 오래된 바람 소리를 사 간 손님들이 얼마나 불만을 토해내시는지, 사정을 봐주느라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내 마음이 찢어진다고!”
번이 혀를 끌끌차며 소리를 위아래로 흘겼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가게로 되돌려 보내면 되잖아. 환불을 해주거나 마음에 드시는 다른 소리병으로 바꿔 드릴 수도 있어!”
소리의 말에 번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만이 한가득인 손님에게 소리 시장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니네 가게까지 가서 환불받으라고 하라고? 참 좋아들 하시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꿔 줄 소리도 없잖아? 목소리 넌 낼 수 있는 소리가 없으니까, 확실히 비정상적이지.”
“나도 소리 낼 수 있어…….”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신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으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여자가 불편한 듯 힐끔거렸다.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번을 향했다. 번은 잠깐 움찔하는가 싶더니 곧 미소를 띠며 당당히 그녀와 눈을 맞췄다.
“손님, 들으신 그대로예요. 그러니 시간 낭비는 마시고 차라리 다른가게……. 아, 저희 가게로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원하시는 게 무시무시한 소리라면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
하지만 여자가 쉽사리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번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참고로 저희 가게는 소리의 땅, 대표 가게로써 천둥소리를 판매해요. 오래된 소리병이나 질적으로 떨어지는 상품을 판매하는 저런 낡아빠진 가게랑은 차원이 다르죠. 맛보기로 천둥소리를 들려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자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번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귀여운 천둥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소리가 부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번이 한껏 으스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였다. 메마른 표정의 여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듣고 누가 겁을 먹겠니?”
이에, 번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크흠, 저, 저는 아직 어려서 가끔 소리가 제 멋대로에요. 그래서 제 소리는 어린아이들 겁주기용으로 많이 사가시죠. 하지만 저희 아버지의 소리는 정말 무시무시해요. 아마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하지만 손님은 관심없다는 듯 다시 소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꼬마 사장님, 가게의 이름이 뭐지?”
“……참소리 가게에요. 제 이름이기도 하고요.”
소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내가 필요한 건 무시무시한 소리야. 그 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여자가 부드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린 소리가 곧바로 대답을 못하자 번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저 녀석 가게는 찾으시는 소리가 없을 거라니까요? 원래 쟤네 부모님이 나름 들을 만한 바람 소리를 팔았는데 몇 년 전, 두 분 다 쟬 버리고 이 마을을 떠났어요.”
번의 배려 없는 말에 소리의 두 눈이 흔들렸다.
번은 잠시 주춤하나 싶었지만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다 늙은 할아버지가 가게를 지키고 계시는데 그분은 이제 바람 소리를 내지 못해요. 그래서 그나마 찾아주던 단골마저 다 끊겼죠. 심지어 하나뿐인 손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목소리밖에 없어서 망해가는 가게도 물려주지 못하고 계시다니까요?”
결국 여자가 미간을 좁혔다.
“아까부터 조잘조잘 혼자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너한테 물은 게 아니니까 그 입 다물어.”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의 입이 본드라도 바른것처럼 합하고 다물어졌다. 번이 입을 틀어막고 호들갑을 떨어대더니 곧 마을 쪽을 향해 허둥지둥 사라졌다.
아마, 소리의 땅에 단 한명뿐의 의사선생님, 한스에게 가는것 같았다.
여자는 번이 사라지자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럼 우리는 하던 얘길 마져 해볼까, 꼬마 사장님?”
하지만 이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소리에게 손님과 눈을 맞출 용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소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 시장 깊숙한 곳, 참소리 가게를 향해 달렸다.
손님이 소리를 향해 뭐라고 외치는 거 같았지만 이미 닫혀버린 몸과 마음은 제 할 일을 하지 못했다.
벌컥-
한껏 풀이 죽은 소리가 힘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소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돋보기안경을 쓴 채 무언가 열심히 읽고 있던 쿠로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급하게 종이를 등 뒤로 숨겼다.
“뭐 하고 계셨어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소리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쿠로 할아버지가 네모난 상자에 다급히 종이를 쑤셔 넣더니 자물쇠를 채웠다.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보다 우리 손녀가 오늘따라 왜 이리 축 쳐졌을까?”
쿠로할아버지가 소리를 살피며 다가왔다.
“아, 아닌데요?” 소리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자 쿠로 할아버지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니긴, 할아버지는 우리 손녀 숨소리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다는 걸 잊은 게로구나!”
쿠로할아버지가 재빨리 소리를 안아 빙빙 돌리자 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소리를 바닥에 내려주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아무 일 없었던게지?”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손길에 긴장이 풀린 소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오늘도 한 분도 없었죠?”
소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쿠로 할아버지가 난감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오늘 저 문을 처음으로 열고 들어온 사람이 사랑스러운 우리 손녀라고 하면 대답이 됐을까?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데 나름 조용하고 좋지 않니……?”
소리가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벌써 몇 일째 손님이 한 분도 없네요. 소리의 땅에서 소리로 벌어 먹고살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저희 가게밖에 없을 거예요……. 이러다 진짜 우리 가게 망하면 어떡해요?”
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뱉어버린 속마음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쿠로 할아버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할아버지가 능력이 부족해 미안하구나.”
“그런 말 마세요, 곧 다시 소리를 낼 수 있을거예요. 그거 아세요? 할아버지의 바람소리는 정말 최고예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란 제가 이렇게 예쁜 걸 보면 모르시겠어요?”
손녀의 애교에 할아버지가 빙긋 웃어 보였다.
“알지, 알다마다. 그보다 우리 소리가 배고플 시간이겠구나? 할아버지가 소리가 가장 좋아하는 쿠키를 구워놨어요!”
“할아버지 최고!”
소리가 두 엄지를 치켜들자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쿠로할아버지는 꿈뜬 몸을 그 어느 때보다 잽싸게 움직이여 마루를 밟고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우리 손녀.”
미닫이 문이 닫히고 할아버지가 모습을 감추자 소리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이 없는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죠. 소리의 땅에서 가장 쓸모없는 참소리요.”
쿠로 할아버지가 구워주신 달콤한 쿠키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소리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아버지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소리야, 너는 이 가게가 좋으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소리가 콧노래를 멈췄다.
“당연하죠. 전 여기가 너무너무 좋아요. 다른 가게들 보셨죠? 똑같은 소리 병만 가득한 게 너무 별로예요. 그런데 우리 가게의 소리병들은 알록달록한 색깔, 모양도 여러 가지라 보기도 좋고 병마다 애정이 듬뿍 담긴 특별한 이름도 있잖아요!”
다른 가게에서 주문하고 남은 병들을 싸게 가져와 모양이 들쑥날쑥했지만 외관상 그리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를 흉내내 병에 담아 놓다 보니 이름이 없으면 구별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고객들에겐 ‘애정이 듬뿍 담긴’이라는 좋은 포장지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준비는 애저녁에 끝났다. 이젠 정말 손님만 있으면 되는데…….
소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더 크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다시금 행복이 찾아왔다.
“안락한 마루와 예쁜 그림들은 어떻고요?”
소리의 발가락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소리가 마루 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작은 돌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모빌은 바라만 봐도 행복해져요. 물론, 할아버지 무릎베개가 빠지면 안 되겠지만요!”
소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제가 사랑 하는게 모두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이곳을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소리의 말에 쿠로할아버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은 멈춘 채였다.
“그래, 아주 정겨운 곳이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행복을 찾기에 이땅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소리야, 이 마을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하단다. 신비롭고 재미있는 것들, 소리가 좋아하는 쿠키를 비롯해 세상에는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지. 할아버지는 소리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소리는 어떻게 생각하니?”
소리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쿠로할아버지가 소리의 코를 튕겼다.
소리가 재밌다는 듯 꺄르르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할애비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가게를 파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소리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의 휘둥그레한 눈을 보며 쿠로 할아버지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가게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너도 알지? 끌끌”
쿠로 할아버지가 애써 웃음 지었다.
“산밑에 있어 시장 입구와는 거리가 있지만, 오래전 이 마을을 세우신 성녀님이 살았던 곳이니 이 땅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 심지어 벌써 구매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거야.”
쿠로 할아버지가 조금 전 급하게 쑤셔 넣은 종이가 담긴 상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오늘 할아버지의 수상한 행동을 이해한 소리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분이 제가 사랑하는 쿠로 할아버지가 맞나요? 여긴 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에게도 소중한 곳이잖아요!”
“할애비에게 소중한 건 소리 너 하나 뿐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도 할아버지는 우리 손녀와 함께라면 그게 어디든 행복하단다.”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곳에선 더 이상 엄마도 아빠도 볼 수 없겠죠.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소리야, 마일과 레나는…….”
할아버지가 소리의 손을 잡으려 순간, 소리가 쿠로할아버지의 손을 매정히 쳐냈다.
“소리의 땅은 가족이 되는 순간, 심장이 하나로 합쳐져요. 우리가 내는 소리가 바로 그 증거이자 가족의 증표죠. 불소리를 내던 엄마도 아빠와 결혼하고 바람소리를 내게 되셨던 것처럼요. 하지만 전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전 평생 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빠와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뜻이죠!”
쿠로 할아버지가 놀란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그저 입밖으로 나오는 소리 따위로 가족을 정의하다니! 그건 그저 멍청한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 뿐이란다. 가족이란 건 증표 같은걸로 내보이는게 아니야.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그거 하나면 충분하단다.”
소리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할아버지는 제가 아직도 갓난아이로 보이세요? 제 존재 자체가 문제란걸, 이 문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모두가 떠들어요. 전 마일과 레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래서 어린 절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거라고! 소리가 없는 전 이 마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그걸 아니까 할아버지도 제가 이 가게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이 땅을 떠나려는 거잖아요!”
소리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게냐! 누가, 누가 감히! 내 손녀에게 그런 몹쓸 말들을! 번 그놈인게지? 아니면 아무말이나 지껄여대는 독 그놈이냐? 그것도 아니면……!”
“이제 그게 누구든 상관없어요.”
“소리야, 얘야, 그런 게 아니란다.”
쿠로할아버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리를 감싸안았다.
소리의 눈물이 나뭇바닥으로 떨어져 검게 번져나갔다.
“이 자리에서 절대 가게를 팔지 않겠다고 저에게 약속해주세요. 전 이곳을 지킬거예요. 바람 소리를 못팔면 제 목소리를 팔면 되요!”
소리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저도 소리를 담을 수 있어요! 심지어 제 목소리로 바람소리 뿐만 아니라, 불소리, 새소리, 그 무슨 소리든지 전부 흉내 낼 수 있다고요! 그러니 전 분명 이곳에 남아 있을 자격이 있어요. 이 가게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
“누구보다도 우리 손녀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하지만 소리야 할애비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이 가게는 그저…….”
말문이 막힌 쿠로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소리를 품에 안으려 하자 소리가 할아버지를 밀쳤다.
그러자 쿠로 할아버지의 몸이 힘없이 마루로 떨어졌다. 이에 소리가 놀란 듯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할아버지가 무슨 선택을 해도 전 끝까지 이곳에 남아 두 분을 기다릴 거예요! 떠나시려면 혼자 떠나세요! 저 같은거 그냥 버리고 떠시라고요!”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쿠로 할아버지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이것이……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은 너를,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내 손녀를 이 못난 놈이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