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새벽 세 시의 오작동

by 연구소장

1. 황민우 : 0.1초의 삑사리


오전 3시 00분 00초. 뇌가 각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0.5초.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지만, 생체 리듬은 오차 없이 나를 깨웠다. 3주째 이어지는 원인 불명의 불면증. 의사는 ‘신경 과민’이라고 진단했지만, 나는 그것을 시스템 과열이라고 정의했다.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너무 많아 뇌의 쿨링 팬이 고장 난 상태. 머리 전체를 뜨거운 쇠띠로 꽉 조이는 듯한 편두통이 오늘도 시작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맨발에 닿는 강마루의 감촉이 서늘했다. 아파트의 거실은 창백한 푸른빛으로 잠겨 있었다. 암막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과, 거실 구석에 놓인 PC의 상태 표시등이 뿜어내는 차가운 LED 빛. 그 삭막한 푸른색이 내 신경을 더 날카롭게 긁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딱, 뚜껑 따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날카롭게 찢었다. 물을 마시며 식탁 위를 봤다. 어제 박준혁 대리가 억지로 켜두고 간 태블릿 PC가 배터리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화면 보호기가 해제되자, 어제보다가 만 그 화면이 다시 떴다.


[성민희 / 37세 / 수셰프 / 남양주 거주]


'남양주.' 판교에서 남양주까지 직선거리 약 40km. 주말 수도권 교통 체증 데이터를 대입하면 도로 위에서만 왕복 3시간이 소요된다. 내 연봉을 시급으로 환산했을 때 데이트 1회당 발생하는 매몰 비용이 지나치게 컸다. ROI(투자자본수익률)가 전혀 나오지 않는, 실패가 예견된 프로젝트.


"기각한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검지 손가락을 뻗어 화면 상단의 [X]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민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진 속 여자 뒤편, 희미하게 비친 거울 속 배경이 거슬렸다.


"저거... 설마 옷무덤인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형형색색의 옷가지들. 그 옷무덤 위에 위태롭게 올려진 와인잔. 심지어 바닥에는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 기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질서였다. '엔트로피가 너무 높아. 이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과는 호환성 제로다.'


확인 사살이 필요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저 무질서의 디테일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 화면을 확대했다. 조금 더. 저 와인잔 밑에 깔린 게 책인지 피자 박스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때였다. 건조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미끄러지며, 화면의 좌표를 잘못 찍었다.


탁.


손가락이 닿은 곳은 배경이 아니었다. 프로필 사진 하단에, 디자인적 요소로 아주 작게 숨겨져 있던 [전화 걸기] 아이콘이었다.


띠리리링-


정적을 찢고 통화 연결음이 터져 나왔다. 거실의 푸른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민우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새벽 3시. 이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발신? 상대가 이 부재중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스토커' 혹은 '상식 밖의 미친놈'으로 분류될 것이다. 내 평판 리스크 관리에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끊어야 하나? 아니, 지금 끊으면 '부재중 전화 1통'이라는 찝찝한 로그가 남는다. 상대방은 내일 아침 이 기록을 보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그것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다.


차라리 연결된 직후, "죄송합니다. 기기 오작동이었습니다"라고 정중하고 건조하게 팩트만 전달하고 종료하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상책이다. 제발 받지 마라. 제발 자고 있어라.


달칵.


받았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2. 성민희 : 외로운 밤의 구원자


"......여보세요?"


성민희는 식탁에 엎드린 채 전화를 받았다. 빈 와인병이 손끝에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공기가 서러웠다. 성민희의 원룸은 노란색 무드등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질척하고 외로운 색감. 바닥에는 벗어 둔 옷가지들이 알록달록한 꽃밭처럼 널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시들어가는 프리지어 꽃 한 송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전쟁 같았던 주방. "역시 수셰프님 파스타가 최고예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손님들도, 퇴근하면 모두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연인에게로 돌아간다. 결국 나만 남았다. 트러플 오일 냄새에 쩐 머리카락과, 지독한 외로움이 전부인 이 좁은 방에.


그때 걸려온 전화. 액정에는 지혜가 "절대 바람 안 피울 관상이다"라며 억지로 저장해 둔 [판교 황민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평소라면 무서워서 안 받았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이 노란 조명 아래 갇힌 적막을 깨 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웠던 걸까. 나는 홀린 듯 통화 버튼을 밀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합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목소리가... 말도 안 되게 좋았다.


마치 깊은 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듣는 심야 라디오 DJ 같았다.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저음. 고막을 타고 들어와 척추를 타고 흐르는 듯한 전율.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붕 떠 있던 내 마음을, 단숨에 바닥으로 끌어당겨 안착시키는 무게감이었다.


"기기 조작 실수였습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끊겠습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투는 깍듯했다. 차가운데, 이상하게 다정했다. 그 모순적인 느낌이 묘하게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


"끊지 마요. 저기...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네요."


미쳤어, 성민희. 처음 보는 남자한테, 그것도 새벽 3시에 무슨 주정이야. 내일 아침에 이불 킥을 백 번은 날릴 짓이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지독한 불면증 환자가 처음으로 마취주사를 맞은 기분이랄까. 곤두서 있던 내 신경들이 그 목소리 한 번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 오늘 진짜 힘들었거든요. 잠도 안 오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고... 근데 그쪽 목소리 들으니까 갑자기 안심이 돼서요. 책임지세요."


"책임이라니... 그게 무슨."


"아무 말이나 좀 해줘 봐요. 저 잠들 때까지만. 네? 그냥 아무거나 읽어줘도 돼요."


나는 식탁 차가운 유리에 뜨거운 뺨을 기댔다. 뻔뻔한 부탁인 거 안다. 하지만 이 차가운 밤, 나를 재워줄 수 있는 건 오직 저 남자의 목소리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3. 동상이몽의 자장가

황민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비논리적으로 흐르고 있다. 상대방은 만취 상태로 추정되며, 요구 사항은 '수면 유도'다.


거절하고 끊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전화를 그냥 끊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상대의 보복성 클레임 등)'를 고려해야 한다.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어 빠르게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스캔했다. 읽을거리라곤 식탁 위에 놓인 보고서 하나뿐이었다. 어제 이사님께 보고하기 위해 가져왔던, 일반인이라면 제목만 봐도 기절할 만큼 지루한 기술 문서.


<차세대 MMORPG 서버 부하 분산 및 가차(Gacha) 확률 테이블 최적화 전략>


"......진심입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웅얼거리는 긍정의 신호가 들렸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오직 텍스트 데이터 전달에만 집중한 브리핑 톤으로 낭독을 시작했다.


"제1장. 트래픽 과부하에 따른 패킷 로스 방지 대책."


"2026년 상반기, 동시 접속자 수 50만 명 달성 시 발생할 수 있는 레이턴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딱딱한 IT 용어들이 건조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특히 확률형 아이템의 시드값 난수 생성 알고리즘을 개선하여..." 이것은 자장가가 아니라, 개발자들도 듣다 도망갈 '기술 고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성민희에게는 달랐다. 그녀에게 그 난해한 '레이턴시'니 '알고리즘'이니 하는 단어들은,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더 편안한 외계어였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위해, 이 새벽에, 거절하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읽어주고 있다는 사실. 그 다정한 울림만이 중요했다.


5분 뒤. 수화기 너머의 공기가 바뀌었다. 가늘게 떨리던 숨소리가 점차 깊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새근... 새근..."


잠들었다. 이 변태적으로 어려운 기술 보고서를 듣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황민우는 읽던 문장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끊어야 했다. 미션은 달성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종료 버튼 위에서 멈췄다.


"......으음."


적막하던 거실에 타인의 숨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왔다. 항상 냉장고 기계음과 서버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던 차갑고 푸른 공간. 그곳에 처음으로 사람의 온기, 그것도 아주 무방비한 상태의 따뜻한 호흡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3주 동안 머리를 꽉 조이고 있던 편두통의 쇠사슬이, 거짓말처럼 툭 하고 끊어졌다.


마치 과열된 CPU에 강력한 쿨링 팬이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내 뇌의 과부하 걸린 회로들을 하나씩 차분하게 꺼주고 있었다.


'......뭐지?'


민우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지끈거리던 통증이 사라졌다. 차갑기만 했던 거실의 푸른 공기가,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노란빛 온기에 의해 미지근하게 중화되는 기분.


그는 태블릿 화면을 다시 내려다봤다. 사진 속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는 그저 '정리 정돈 안 되는 비효율적인 여자'로 보였는데, 지금은 데이터 값이 수정되었다.


'유의미한 변수.' 아니, '필수 불가결한 자원.'


그는 1분 동안 그 숨소리를 더 듣고 서 있었다. 마치 산소호흡기를 댄 환자처럼, 그 숨소리에 의지해 자신의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종료 버튼을 눌렀다.


[통화 시간: 12분 30초]


4. 다음 날 아침 : 엇갈린 해석

다음 날 아침. 황민우는 더없이 개운한 얼굴로 캘린더 앱을 열었다. '거절'하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것은 내 뇌의 과부하를 막아줄 유일한 '냉각 장치'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다.


[3월 16일 14:00. 판교역 미팅 확정.] (목적: 수면 유도 효과 재검증 및 확보)


같은 시각, 성민희는 침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통화 목록에 찍힌 12분 30초의 기록. 꿈이 아니었다. 그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새벽에 나를 위해 10분 넘게 어려운 책을 읽어줬다.


"뭐야... 완전 스윗한 츤데레잖아?"


판교. 그 삭막하고 멀기만 했던 도시가 갑자기 핑크빛 낭만의 도시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남자, 만나야겠다. 반드시.


새벽 세 시.

남자는 "고장 난 뇌를 식혀줄 쿨링 팬"을 찾았고,

여자는 "나를 위해 책을 읽어준 로맨틱한 왕자님"을 찾았다고 착각했다.


서로 다른 온도의 기억을 안고,

두 사람의 엇갈린 로맨스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궤도에 진입하고 있었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