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평생의 알고리즘이 오답이 될 때

by 연구소장


1. 성민희 : 내 남친인가, 인생 멘토인가


[TIME: Thursday 22:30 | LOC: 연남동 퇴근길]


이직한 레스토랑의 조건은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직장은 없다고, 문제는 늘 '사람'에게서 터진다.


새로 온 수셰프인 나의 의견을 묘하게 견제하는 기존 직원들, 그리고 내 아이디어를 번번이 보류시키는 꽉 막힌 헤드 셰프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길. 찬 바람을 맞으며 버스 정류장에 앉아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민희야. 퇴근했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편안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하루 종일 참았던 서러움이 왈칵 터져 나왔다.


"오빠... 나 오늘 진짜 너무 힘들었어. 셰프님이 내 레시피 수정안은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하는 거 있지? 아니, 내가 어제 밤새워서 정리해 간 건데. 재료 손질 동선만 바꿔도 준비 시간이 훨씬 단축되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어. 자기 방식만 정답이고 내 방식은 틀렸대. 진짜 답답해."


나는 쏟아내듯 하소연했다. 내가 기대한 대답은 단순했다. "아고, 우리 민희 오늘 고생 많았네. 그 셰프가 꽉 막혔네!" 이 정도의 무조건적인 맞장구면 충분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아주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많이 답답했겠다. 그런데 민희야, 내가 지난번에 네가 이직한다고 했을 때부터 그 레스토랑에 대한 데이터를 좀 찾아보고 분석해서 말해줬잖아."


"...데이터?"


"어. 그 레스토랑 헤드 셰프가 기존 방식을 10년 넘게 고수해 온 사람이라, 외부에서 온 수셰프인 네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일 확률은 극히 낮다고 했었지. 내가 보기에 네 레시피 수정안 자체는 완벽하지만, 접근 방식이 틀렸어."


순간, 멍해졌다. 피로감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접근 방식이 틀려? 오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무작정 '이게 더 효율적이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 자존심만 건드리는 꼴이야. 감정적으로 부딪히기보다는, 네 방식이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코스트를 얼마나 절감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수치화해서 객관적인 근거를 들이밀어야지. 셰프는 감정이나 말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완벽한 데이터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해. 내일 출근하면 감정 빼고 숫자만 다시 정리해서 보고해 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편을 들어달라고 전화한 여자친구에게, 그는 지금 완벽하게 이성적인 '솔루션'을 들이밀고 있었다.


2. 성민희 : 찢어진 마음과 절규


"오빠. 오빠 지금 나 가르쳐?"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수화기 너머의 그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어? 아니,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네가 겪는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해결할 방법을 같이 고민해 주는..."


"내가 그거 몰라서 이래? 해결책은 나도 안다고! 수치화? 객관적 데이터? 나도 할 줄 알아. 아는데, 그냥 오늘 하루 너무 답답하고 속상하고 억울했으니까, 내 편 좀 들어달라고, 위로받고 싶어서 전화한 거잖아. 오빠가 무슨 내 인생 멘토야? 아니면 내 직장 상사야?"


"민희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계속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피하려면 합리적인 대안이 필요하니까..."


"그놈의 합리, 합리, 합리! 누가 솔루션 달랬어?!"


참았던 감정이 결국 터져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소리쳤다.


"내가 지난번에 오빠가 '데이터' 타령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우리 처음 청담동에서 한우 먹고 홍대 갔을 때, 내가 곱창 먹고 싶었다고 하니까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 저는 민희 씨가 화려한 장소를 선호하는 줄 알았습니다.'라며 영혼 없이 분석만 했지! 그때도 나는 오빠가 '그래? 진작 말하지. 다음엔 무조건 곱창 먹자!'라고 사람 냄새 나게 말해주길 바랐어!"


그의 숨소리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서운함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오빠는 도대체 나를 왜 만나? 나를 만날 때마다 무슨 데이터 수집해? 롤케이크 먹을 때도 데이터, 꽃다발 줄 때도 우상향 그래프! 오빠한테 나는 감정을 나누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오빠가 문제를 풀고 분석해서 최적화시켜야 할 무슨 프로젝트야?!"


"성민희,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게 내가 널 위하는 유일한 방식이야. 네가 상처받는 게 싫으니까, 내가 가진 이성적인 능력으로 널 보호하려고 한 거라고."


그의 목소리에도 억울함과 당혹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변명마저도 철저히 이성적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내 감정이 다치고 찢어졌는데, 오빠는 자꾸 엉뚱한 상황만 고치려고 하잖아! 지금 내 제일 큰 문제는 그 셰프가 아니라, 나를 세상에서 제일 외롭게 만드는 오빠의 그 잘난 '이성적인 방식'이야!"


"...민희야."


"됐어. 오빠의 그 완벽하고 합리적인 머리통에 내 감정 따위는 처리 불가능할 테니까, 더 이상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나 버스 왔어. 끊어."


뚝.


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누르고 다가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보는데, 기어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쁜 뜻이 아니란 건 안다. 그가 평생을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살아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조차 구하지 못하고 번번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나를 너무나 비참하게 만들었다.


3. 황민우 : 평생을 바친 무기가 오답이 될 때


[TIME: Thursday 22:45 | LOC: 황민우의 아파트]


뚜- 뚜- 뚜-


끊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 나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소파에 굳은 듯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상황을 듣고, 내 머릿속의 알고리즘은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정답을 도출해 냈다고 확신했었다.


'네가 상처받는 게 싫으니까, 내가 가진 이성적인 능력으로 널 보호하려고 한 거라고.'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평생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살아왔다. 감정은 늘 불확실하고 통제 불가능한 변수였기에 철저히 배제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분석하고 최적의 해결책을 도출해 내는 것. 그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었고,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 갈고닦아 온 나만의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그 무기가, 성민희라는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엇나간 오답이 되어버렸다.


'내 제일 큰 문제는 그 셰프가 아니라, 나를 세상에서 제일 외롭게 만드는 오빠의 그 잘난 방식이야!'


그녀의 울음 섞인 절규가 내 뇌의 모든 시스템을 강제로 정지시켰다.


그녀는 나에게 객관적인 컨설팅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그냥 힘들었던 하루를 알아달라고 기대온 것뿐이었는데.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내가 틀렸다.


문제의 본질은 '주방의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지치고 상처받은 민희의 마음'이었다. 나는 평생을 바쳐 연마해 온 논리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가장 쓰지 말아야 할 곳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휘두르고 말았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뻐근해졌다. 내가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이 합리적이고 뛰어난 이성적 뇌로는, 그녀의 울음을 달래줄 단어 하나조차 도출해 내지 못했다. 철저한 무력감과 자책감이 어둠과 함께 밀려왔다.


4. 차가운 냉전, 그리고 침묵의 금요일


[TIME: Friday 22:30 | LOC: 연남동 레스토랑 골목 앞]


금요일 밤.


어제 통화 이후로 하루 종일 민우 오빠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카톡 한 통 없네. 진짜 지독하다, 황민우.'


나도 굳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화를 내고 끊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그 잘난 머리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분석할 때까지 절대 먼저 져주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마감 청소를 끝내고 가게 뒷문을 나섰다.


"아휴, 힘들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캄캄한 골목을 빠져나오며,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로등 아래로 향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그 익숙한 회색 후드티에 캡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하지만 가로등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만 휑하게 불어올 뿐, 그 어떤 온기도, 흔적도 없었다.


"하... 그래. 문제 해결이 안 되면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서운함을 넘어선 서글픔이 밀려왔다.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인 걸까. 서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 달라서,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이렇게 차갑게 돌아서게 되는 걸까. 나는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판교의 아파트 거실. 황민우는 불 꺼진 방 안에서 뿔테 안경을 벗어둔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에는 민희와의 카톡 창이 열려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지만, 텍스트 입력창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민희야, 어제는 내가...'


썼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


평생 수많은 난제들을 명쾌한 논리로 풀어왔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텍스트를 입력해야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섣부른 말은 또다시 논리적 변명이 되어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


합리적인 이성이 멈춘 자리,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T의 지독한 마비 상태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차가운 냉전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주말의 밤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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