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밤 10시의 와인, 솔로 플레이어의 외출

by 연구소장

1. 황민우 : 디아블로와 카카오톡


[TIME: Saturday 21:00 | LOC: 판교 황민우의 아파트]


홍대입구역 앞에서의 그 기습적인 입맞춤이 있은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 이후, 우리는 꽤 자연스럽게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소위 말하는 '썸'이라는 단계.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 인사를 하고, 점심 메뉴를 공유하고, 퇴근길에 시시콜콜한 하루의 피로를 나누는 일.


평생 내 일상에 없던 패턴이었지만,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곤 했다.


토요일 밤.


나는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유일한 취미 생활인 '디아블로 4'를 켜두고 있었다. 나는 남들과 파티를 맺고 시끌벅적하게 게임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만의 통제된 세계에서 조용히 몬스터를 사냥하고 아이템 세팅을 맞추는 시간. 그 고독한 '솔로 플레이'가 내 주말의 유일한 낙이자 평화였다.


막 고난이도 던전에 입장해 사냥에 집중하려던 찰나, 책상 위에 둔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성민희: 민우 씨! 뭐 해요? 저 방금 친구 결혼식 뒤풀이 끝나고 나왔는데. 혹시 오늘 밤에 잠깐 나올래요? 와인 한잔하고 싶은데.]


순간, 모니터 화면 속 몬스터의 공격 패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 10시. 와인. 만남의 제안.


보통의 주말 밤이라면 편한 잠옷 차림으로 혼자만의 사냥을 즐기다 잠드는 게 나의 완벽한 루틴이었다. 갑작스러운 외출은 피곤하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눌러 마을로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단 1초의 미련도 없이 게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오늘 그녀는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고 했다. 잔뜩 꾸민 모습일 텐데, 나도 평소보다는 좀 신경을 써야 할까?


옷장을 쓱 훑어보았지만, 내 손이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역시나 가장 편안한 짙은 네이비색 후드티였다. 대신 평소 입던 것 중 가장 깨끗하고 각이 잘 잡힌 놈으로 골랐다. 머리를 만지는 건 익숙하지 않으니 검은색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평소 쓰던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썼다.


이게 나라는 사람의 가장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이니까. 괜히 어색하게 남의 옷 같은 셔츠를 주워 입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차 키를 챙기려다,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와인을 마시자고 했지. 지난번엔 차 때문에 술을 거절했지만, 오늘은 대중교통을 타더라도 그녀와 함께 잔을 부딪치고 싶었다.


택시를 호출하고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그 어떤 희귀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보다 가벼웠다.


2. 성민희 : 하객룩과 뿔테 안경 스머프


[TIME: Saturday 21:40 | LOC: 압구정의 어느 조용한 와인 바]


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나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버진로드를 걷는 친구의 환한 미소를 보는데, 내 머릿속엔 왜 자꾸 그 뿔테 안경 쓴 남자가 떠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다.


홍대에서 내가 뽀뽀를 하고 도망친 이후, 우리는 확실히 썸을 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어왔다. 여전히 말주변이 막 화려하거나 능글맞지는 않았지만, 내가 주방에서 손을 살짝 데였다고 하니 남양주까지 화상 연고를 퀵으로 보내주는 식의 묵묵한 다정함이 있었다.


뒤풀이가 끝나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그에게 톡을 보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1초 만에 '바로 가겠습니다'라는 듬직한 답장이 왔다.


나는 조용한 와인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애꿎은 립스틱만 계속 덧발랐다.


오늘 나는 연한 핑크빛이 도는 원피스에 구두를 신었다. 나름 하객룩의 정석. 오늘 내 모습이 꽤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은 밤에 와인 마시는 거니까, 그래도 셔츠 정도는 입고 오려나?'


입구를 힐끔거리며 기다리던 그때.


은은한 조명 아래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푸흡."


나는 하마터면 마시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후드티에 캡모자, 그리고 뿔테 안경 차림이었다.


홍대 참치집에서는 파란색 스머프더니, 오늘은 짙은 네이비색 스머프였다. 압구정의 화려한 와인 바 한가운데를, 동네 마실 나온 대학생 같은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저 당당함.


그래. 황민우한테 셔츠나 정장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근데 이상하게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저 흔들림 없는 일관성이 이제는 너무 그 사람다워서, 겉멋 들지 않은 투명함이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민희 씨."


그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안경을 슬쩍 밀어 올렸다.


3. 와인 잔 너머의 서투른 진심


"민우 씨. 오늘도 완전 한결같이 입고 오셨네요?"


내가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묻자, 그가 모자챙을 살짝 매만지며 조금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나름대로 제 옷장에서는 가장 상태가 좋은 후드티를 고른 겁니다. 어색하게 안 입던 옷을 입는 것보단, 민희 씨 앞에서 가장 제 본래 모습대로 편하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변명치고는 꽤 귀여워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시선이 내 원피스와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뿔테 안경 너머의 올곧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나저나... 오늘 민희 씨는 정말 예쁘시네요. 평소에도 좋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시선이 갑니다."


순간,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데이터가 어쩌고, 시각적 타격감이 어쩌고 하던 로봇 같은 화법이 아니었다.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 직설적이고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투박한 칭찬.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얼른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우리 와인 마셔요! 오늘은 민우 씨도 같이 마실 거죠?"


"네. 오늘은 차 안 가져왔습니다. 같이 마시죠."


그가 흔쾌히 대답했다. 우리는 무난한 레드 와인을 한 병 시켰다.


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부딪쳤다. 그는 나와 보조를 맞춰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한두 잔 들어가자, 그의 하얀 볼이 미세하게 붉어지는 게 보였다. 술에 약한 건지, 분위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민우 씨, 아까 뭐 하고 있었어요? 주말 밤인데 제가 귀찮게 부른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냥... 집에서 혼자 게임 하고 있었습니다."


"게임이요? 아, 친구들이랑 파티 맺고 피시방 가는 그런 거?"


"아뇨, 저는 남들이랑 파티 맺고 시끄럽게 하는 건 안 좋아해서요. 늘 혼자 솔로 플레이만 합니다. 디아블로라고... 주말에 오롯이 혼자 사냥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게 유일한 낙이거든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그럼 진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 보내고 있던 거네요? 근데 제가 부르니까 그냥 나온 거예요?"


그가 뿔테 안경을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혼자 사냥하는 게 제 일상의 가장 큰 평화이긴 한데요... 민희 씨가 보자고 하는 카톡을 보니까, 그 평화로운 시간보다 당장 여기 나오는 게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미련 없이 끄고 바로 튀어나왔습니다."


4. 사람다운 온도, 36.5도의 연애


그의 덤덤한 고백에 나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멈췄다.


세상에서 자기 루틴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가. 타인과의 파티 플레이조차 귀찮아하며 솔로 플레이의 고독을 즐기던 남자가. 그 소중한 주말의 평화를 스스로 깨버리고 나를 만나러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 편안한 후드티를 입고서.


"민우 씨... 진짜 많이 변했네요. 처음 한우 먹을 땐 무슨 기계랑 밥 먹는 줄 알았는데."


"저도 요즘 제 자신이 낯섭니다."


그가 남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삼킨 뒤,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오늘 친구분 결혼식은 어땠습니까?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다고 하셨죠."


"네... 그냥, 나도 저렇게 평생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지치는데, 드레스 입은 거 보니까 또 예쁘긴 하더라고요."


내가 씁쓸하게 웃자, 그가 아주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는 거, 참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주말엔 혼자 게임이나 하고 쉬는 게 제일 편했으니까요."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자신의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어왔다. 뜨겁고 단단한 체온이 느껴졌다.


"근데 요즘은, 퇴근하고 민희 씨랑 카톡 하는 시간이 제일 기다려집니다. 제가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좀 없어서 이렇게 후드티나 푹 눌러쓰고 나오지만..."


그의 뿔테 안경 너머, 올곧고 따뜻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민희 씨가 원하면, 앞으로 언제든 솔로 플레이 종료하고 달려오겠습니다. 그러니까 싱숭생숭해 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그것은 거창하고 화려한 프로포즈는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세상을 끄고 언제든 너에게 달려오겠다'는 그 투박한 맹세가, 그 어떤 드라마 명대사보다 훨씬 더 내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말은 참 예쁘게 하네. 근데 다음엔 모자 벗고 얼굴 좀 제대로 보여줘 봐요. 나한테 푹 빠진 표정 좀 보게."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콧방귀를 뀌며 농담을 던지자, 그가 부끄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밤 11시 반.


두 개의 와인 잔이 기분 좋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완벽한 솔로 플레이어였던 남자와 감성 충만한 ENFP 여자. 절대 섞일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세상이, 서로의 곁에서 아주 사람다운 온도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03화제3화. 파란 후드티와 우상향의 입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