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민희 : 룸으로 들어온 파란색 스머프
[TIME: Friday 19:00 | LOC: 홍대입구 고급 참치 전문점]
금요일 저녁의 홍대.
사람이 미어터지는 이 혼돈의 한복판에 내가 다시 그 남자를 불러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직 성공'.
원래 일하던 레스토랑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에 훨씬 더 좋은 조건(연봉 인상 및 근무 환경 개선)으로 연남동의 대형 이탈리안 레스토랑 수셰프 자리를 제안받았다. 며칠 전, 기분이 너무 좋아서 민우 씨에게 카톡으로 이 소식을 알렸고, 지난번 비싼 소고기를 얻어먹은 빚도 갚을 겸 내가 먼저 참치를 쏘겠다고 호기롭게 불렀다.
예약된 룸에 먼저 앉아 그를 기다렸다.
오늘은 홍대라는 장소에 맞춰 나도 힘을 좀 뺐다. 슬랙스에 깔끔한 블라우스.
지난번 청담동에서 회색 후드티를 입고 왔던 그니까, 오늘은 그래도 금요일 저녁이니 최소한 셔츠 정도는 입고 오지 않을까?
드르륵.
룸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아, 먼저 와 계셨네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비주얼은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새파란, 아주 쨍한 파란색 후드티.
그 위로 푹 눌러쓴 캡모자.
심지어 눈에는 알이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무심하게 종이 쇼핑백을 들고서.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 저기요... 참치 드시러 온 거 맞죠? 동네 PC방에 밤샘 게임 하러 가다가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죠?
"오시는 길 안 막히셨습니까?"
그는 자신의 파란 후드티 끈을 툭툭 치며 세상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 네. 민우 씨, 오늘 스타일이 되게... 스포티하시네요?"
"주말 전야제니까요.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봐서 안구 건조증이 심해 안경을 썼습니다. 파란색은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요."
아, 네. 시각적 안정감.
나는 파란색 스머프 같은 그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 이 남자는 남의 시선 따윈 1g도 신경 쓰지 않는 궁극의 마이웨이다.
[TIME: Friday 19:30 | LOC: 참치집 룸 내부]
참치 배꼽살이 세팅되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민우 씨! 저 진짜 이번에 조건 너무 좋게 이직하잖아요. 연봉도 오르고 직급도 확실하고! 그래서 오늘은 제가 쏘는 겁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며칠 전, 그녀에게서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의 데이터베이스는 빠르게 회전했다. 직장인이 더 나은 대우를 받고 환경을 옮기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시장에서 입증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땅히, 그리고 아주 논리적으로 축하받아야 할 일이다.
"연남동의 레스토랑이시군요. 훌륭한 결과입니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셨다는 건 민희 씨의 역량과 데이터가 시장에서 높게 평가받았다는 증거니까요. 완벽한 솔루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헤헤, 맞아요! 시스템도 훨씬 낫더라고요. 근데... 저기, 민우 씨. 오늘 차 안 가져오셨으면 저랑 축하주 한잔하실래요?"
나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고 대답했다.
"네.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왔습니다. 홍대의 주차 난이도와 교통 체증,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임을 감안할 때 차를 가져오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요. 잔 받겠습니다."
내가 순순히 잔을 내밀자 그녀가 환호성을 질렀다.
투명한 소주잔이 경쾌하게 부딪혔다.
알코올이 들어가자, 나의 '로봇 모드'가 조금씩 해제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뻔한 리액션 대신, 그녀의 새로운 직장 생활에 필요한 나름의 객관적인 조언과 진심 어린 격려를 섞어 건넸다. 그녀는 내 파란색 후드티와 뿔테 안경이 웃기다며 깔깔거렸고, 나 역시 그 상황이 나쁘지 않아 평소보다 입꼬리를 더 올린 채 함께 웃었다.
[TIME: Friday 21:30 | LOC: 홍대 뒷골목 야채곱창집]
참치를 배불리 먹고 밖으로 나왔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남자가 내 이직의 가치를 정확하게 인정하고, 더 좋은 조건으로 가게 된 것을 자기 일처럼(비록 말투는 다큐멘터리였지만) 축하해 주었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함이란.
"민우 씨! 우리 2차 가요! 저 사실 청담동 한우 먹을 때부터 곱창에 소주가 너무 당겼거든요. 이 근처에 진짜 허름한데 기가 막힌 야채곱창집 있어요!"
나의 제안에 그는 뿔테 안경 너머로 홍대의 시끌벅적한 골목을 스캔했다.
"위생 상태나 데시벨이 우려되긴 합니다만... 오늘 주인공은 민희 씨니까 통제권을 넘기겠습니다."
우리는 골목 구석의 매캐한 연기가 진동하는 야채곱창집에 마주 앉았다.
끈적이는 드럼통 테이블, 시끄러운 사람들.
그런데 웃기게도, 캡모자에 파란 후드티를 입은 그의 착장이 이 야채곱창집의 바이브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오히려 고급 식당에 각 잡고 앉아있을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인간적이었다.
그는 곱창이 타지 않게 집게로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으며, 나와 함께 소주잔을 부딪쳤다.
"아, 진짜 살 것 같다. 민우 씨, 솔직히 말해봐요. 저번에 제가 샤넬 입고 나갔을 때 속으로 오버한다고 생각했죠?"
"드레스 코드가 안 맞아서 잠시 오류가 나긴 했습니다만, 예의를 갖춰주신 거라 생각해서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민우 씨 안경 쓰고 후드티 끈 짝짝이로 묶인 거 보니까 진짜 동네 친구 같아서 너무 편하고 좋아요."
우리는 소주를 곁들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오늘은 "아, 진짜요?" 봇이 없었다. 그는 자기 일에 대한 꽤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가끔 내가 짓궂은 농담을 던지면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완벽해 보이던 남자가 술기운에 살짝 틈을 보일 때.
그리고 그 파란색 후드티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묵묵히 내 앞접시에 곱창을 덜어줄 때.
나는 이 남자가 꽤, 아니 아주 많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TIME: Friday 23:30 | LOC: 홍대입구역 근처]
알딸딸한 기분으로 가게를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밤공기가 기분 좋게 선선했다.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민우 씨. 얘기 들어줘서."
"저야말로 참치 잘 먹었습니다."
역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내내 들고 다니던 종이 쇼핑백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내게 불쑥 내밀었다.
선명한 색감의 프리지어 꽃다발.
그리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얹힌 작은 카드 한 장.
"어...? 이게 뭐예요?"
"며칠 전에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해 드리는 게 맞다고 판단해서 미리 준비했습니다."
오늘 낮에 샀는지 꽃잎은 여전히 싱싱했고, 달콤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아까 참치집에서 주려다가... 고기 냄새 밸까 봐 꾹 참고 이제야 드립니다. 새로운 출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는 내 이직 소식을 듣자마자,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꽃집에 들러 이 프리지어를 샀단 말인가?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뿔테 안경을 쓴 채로 진지하게 꽃을 고르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
[더 좋은 조건으로의 이직은 성민희 님의 가치가 입증된 결과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데이터 구축을 응원합니다.
앞으로 성민희 님의 그래프도 무조건 우상향(Right-Upward)일 것입니다. - 황민우]
세상에 어떤 남자가 축하 카드에 '데이터'니 '우상향'이니 하는 단어를 쓸까.
너무나 메마르고 논리적인 단어들의 조합.
그런데, 그 어떤 로맨틱한 시구보다 더 강력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투박한 단어들 속에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새로운 출발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묵직한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으니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캡모자 챙 아래로 보이는 그의 귀 끝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순간, 알코올 기운인지 프리지어 향기 때문인지 모를 무언가가 내 이성을 툭, 하고 끊어버렸다.
나를 위해 이렇게 귀엽고 완벽한 계산을 해온 스머프를, 도대체 어떻게 참아?
나는 꽃다발을 쥔 채, 그대로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민우 씨."
"네? 왜 그러ㅅ..."
쪽.
그의 입술에, 아주 짧게 내 입술을 맞췄다 뗐다.
시간은 단 1초.
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뿔테 안경 너머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미친 듯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 무뚝뚝한 로봇의 회로가 완전히 정지해버린 멍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선물 진짜 고마워요! 저 갈게요! 막차 끊긴다!"
나는 굳어있는 그의 가슴팍을 툭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뛰어서 지하철역 계단으로 도망쳤다.
남겨진 황민우는 홍대입구역 앞, 인파가 쏟아지는 거리 한가운데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짚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던 감촉.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이것은 그의 39년 인생 데이터베이스에 단 한 번도 입력된 적 없는, 완벽한 통제 불능의 변수(Variable)였다.
'......이런 스킨십은 시뮬레이션에 없었는데.'
심장 박동 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스마트워치가 경고 알림을 울려댔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이 합리적이고 목적지향적인 관계가, 오늘 밤 홍대의 어느 길바닥에서 완전히, 그리고 처참하게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알고리즘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 파란 후드티의 남자는, 자신의 뇌 시스템에 '성민희'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완벽하게 침투했음을 서서히 자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