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민우 : 10분 전의 여유와 시각적 오류
[TIME: Saturday 17:50 | LOC: 청담동 '새벽집']
식당 예약은 내가 직접 했다.
장소 선정은 철저히 데이터에 기반했다. 팀원인 박준혁 대리가 추천한 곳이자, 미디어(<수요미식회>)의 교차 검증을 통해 퀄리티가 보장된 곳. 첫 만남의 주도권과 책임은 제안한 사람에게 있으니까.
나는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발렛 파킹을 맡기고 예약된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주말인 만큼 나의 복장은 가장 활동성이 높고 효율적인 회색 후드티에 패딩 조끼였다.
조용한 룸에 앉아 냅킨을 반듯하게 맞추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계는 55분. 곧 도착하겠군.
드르륵.
정확히 약속 시간 3분 전, 룸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하마터면 동작을 멈출 뻔했다.
나의 동공에 맺힌 그녀의 시각 데이터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고급 트위드 재킷.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 목걸이.
그리고 한눈에 봐도 존재감이 뚜렷한 샤넬 퀼팅백.
마치 시상식이나 고급 호텔 연회장에 온 듯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청담동 며느리 룩'이었다.
나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후드티의 끈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식당 코드는 맞췄는데, 드레스 코드에서 오류(Error)가 발생했군.'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의자를 빼주며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오시는 길 복잡하셨죠? 앉으시죠. 오늘 스타일이 참 멋지십니다."
"아, 감사합니다. 민우 씨는 생각보다 되게... 편안한 스타일이시네요. 하하."
우리는 어른답게 미소로 그 시각적 부조화를 가볍게 넘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담당 서버가 들어와 뜨거운 숯불을 세팅했다.
솔직히 처음 룸에 들어와서 회색 후드티를 봤을 땐 '내가 오늘 옷차림에 오버를 했나' 싶어 살짝 민망했다. 하지만 의자를 빼주는 매너나 정중한 말투를 보니 사람은 꽤 괜찮아 보였다.
질 좋은 한우 특유의 붉은빛이 룸 안의 조명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고기가 불판 위에서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익어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메뉴판을 살피며 생기 있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민우 씨, 여기 고기 진짜 좋네요. 우리 분위기도 낼 겸, 와인 한잔할까요? 여기 리스트 보니까 페어링하기 딱 좋은 것들이 꽤 보이는데."
보통의 소개팅이라면 분위기를 위해 한 잔 정도는 흔쾌히 시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오늘 마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 혹시 술을 아예 못 드시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차를 가져와서요. 식사 끝나고 민희 씨를 남양주 댁까지 모셔다드려야 하는데, 술을 마실 수는 없죠. 민희 씨 드실 거 한 잔만 따로 주문하시죠.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다.
남양주까지 데려다주려고 술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그 깍듯한 배려.
"아, 데려다주시는구나. 그럼 저도 안 마실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정말 상관없습니다만."
"에이, 혼자 마시면 무슨 맛이에요. 운전하시는 분 앞에 두고 예의도 아니고요. 우리 그냥 사이다 시켜서 건배해요!"
내가 환하게 웃으며 사이다를 주문하자,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기호를 고집하지 않고 나의 운전에 보조를 맞춰주는 유연함. 그는 나의 태도에 꽤 만족한 눈치였다.
사이다가 든 유리잔이 부딪혔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아니 상당히 괜찮았다.
서버가 고기를 구워줄 때마다 나는 "와, 입에서 녹아요!"라며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 역시 "수요미식회에 나올 만한 퀄리티네요. 잘 찾아온 것 같습니다"라며 성실하게 맞장구를 쳤다.
과도한 긴장감도, 숨 막히는 어색함도 없는, 매우 안정적이고 편안한 식사 시간이었다.
[TIME: Saturday 20:30 | LOC: 남양주로 향하는 차 안]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탔다.
청담동에서 남양주 그녀의 집까지는 약 40km.
내 차의 방음 시스템은 훌륭했고, 승차감은 안정적이었다. 차 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그녀와의 대화는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의 뇌를 괴롭히던 과부하가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 덕분에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훌륭한 드라이브였다.
어느덧 차가 남양주 그녀의 동네에 진입했다.
그녀가 창밖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 민우 씨, 잠깐만요! 이 근처에 제가 진짜 좋아하는 롤케이크 집 있거든요? 디저트는 제가 살 테니까 거기로 가요!"
나는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그녀가 가리킨 '몽슈슈'라는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도지마롤이라는 디저트와 커피를 주문해 왔다.
"여기 도지마롤 진짜 유명해요. 저번엔 먹고 싶어서 아침부터 줄 서서 샀다니까요. 얼른 드셔보세요!"
나는 그녀가 건넨 포크를 받아 롤케이크를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아주 진지하게 미각을 분석하며 씹은 뒤, 솔직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음. 동물성 생크림 특유의 묵직함이 있네요. 우유 풍미가 진하고 텍스처가 아주 부드럽습니다. 확실히 성분부터 다르군요."
"그죠?! 제 말이 맞죠? 진짜 맛있다니까요!"
그녀가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나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모은 채, 온화하고 예의 바른 미소로 그녀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진짜 크림이 안 느끼해서 저 혼자 한 판도 다 먹을 수 있어요!"
"아, 진짜요?"
"다음에 오면 과일 들어간 것도 드셔보세요. 그것도 진짜 환상이거든요."
"아, 정말요?"
완벽한 호응(Reaction)이었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방의 정보 제공에 적절한 감탄사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의 3단 리액션이 이어질수록, 포크를 쥐고 신나게 떠들던 그녀의 텐션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배가 부른가?'
나는 남은 케이크를 내가 다 먹어치우는 것으로 잔반 처리의 효율성을 높여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TIME: Saturday 22:15 | LOC: 남양주 민희네 집 앞 주차장]
차에서 내렸다.
봄밤의 공기가 제법 선선하게 뺨을 스쳤다.
그가 나를 따라 내려, 가볍게, 그러나 아주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오늘 식사 즐거웠습니다, 민희 씨. 식당도 롤케이크도, 모두 훌륭한 선택이었네요."
"저야말로 비싼 고기 사주셔서 감사해요. 집까지 태워다 주시고...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민우 씨."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푹 쉬십시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자신의 세단 운전석에 올라탔다.
망설임 1초도 없이 스무스하게 시동이 걸렸다.
그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헤어진다고? 진짜?'
토요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비싼 한우집에서 밥도 먹었고, 남양주까지 드라이브도 했다. 동네에서 달달한 디저트도 먹었다. 대화도 끊기지 않았고 분위기도 내내 나쁘지 않았다. 상대방도 나를 싫어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라고? '운전 조심하세요'라는 굿나잇 인사 한 번 정직하게 던지고 그냥 칼퇴근을 해버린다고?
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아까 롤케이크를 먹을 때부터 속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분명 매너 좋게 내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아, 그렇군요. 아, 진짜요? 아, 정말요?"라는 기계적인 3단 콤보뿐이었다. 내가 무슨 박물관 큐레이터가 되어서 관람객에게 롤케이크의 역사를 설명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 마지막 순간.
내 진짜 속마음은 이거였다.
'아오, 샤넬이고 나발이고, 그냥 저 사람 후드티 끈 꽉 붙잡고 근처 허름한 왕십리 야채곱창집이나 들어가서 소주나 콸콸 찌끄리고 싶다.'
곱창 기름 튀는 드럼통 테이블에 마주 앉아, 소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반응이 교과서 같아요? 우리 겉치레 다 떼고 편하게 좀 얘기해 봅시다!" 하고 속 시원하게 따져 묻고 싶었다.
저렇게 단정하고 철벽 같은 남자가, 소주 두어 잔 들어갔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미지근한 온도 밑에 숨겨진 진짜 텐션이 어떨지 무지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운전 조심하세요~" 하며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주고 말았다. 곱창은커녕, 우아하게 와인 한 잔도 못 마셨는데.
"하아... 진짜 사람 속 터지게 하네. 왜 이렇게 숙제한 기분이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처량했다.
머리카락에선 희미한 숯불 냄새가 났고, 몸에 착 감긴 샤넬 재킷은 오늘따라 유난히 답답했다.
설레진 않는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같은 시각, 올림픽대로를 타고 판교로 향하는 황민우의 차 안.
그는 규정 속도를 정확히 유지하며, 콧노래를 부르듯 오늘의 데이트 로그(Log)를 정산하고 있었다.
'식당 선정 훌륭. 와인을 거절했을 때 상대가 보여준 타협점 훌륭. 대화의 정보 교환 비율 적절. 롤케이크에 대한 리액션 출력 완벽. 남양주 안전 귀가 조치까지.'
입가에 오늘 중 가장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드라이브 내내 그녀의 나른하고 생기 있는 목소리를 곁에서 라이브로 청취했다는 점이다. 뇌의 과부하가 완벽하게 식어버렸다.
"흠잡을 데 없는, 매우 효율적이고 쾌적한 하루였어."
그는 확신했다. 오늘의 이 완벽하게 통제된 만남이 그녀에게도 똑같이 긍정적인 결과값으로 저장되었을 거라고. 그녀가 샤넬을 입은 채 곱창과 소주를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 따위는, 그의 데이터베이스엔 평생 입력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