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Saturday 14:00 | LOC: 남양주 민희네 동네 카페]
주말 오후. 퉁퉁 부은 눈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 카페로 기어 나왔다. 창밖으로는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의 한가운데에 멈춰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연락 한 통 없었던 황민우. 내가 먼저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으니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진짜 이렇게 끝낼 작정인가 싶어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 그 잘난 이성적인 머리로 계산해 보니까 나 같은 감정 덩어리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든? 그래서 합리적으로 손절하시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빨대로 꾹꾹 쑤시며 애꿎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 사람이 밉고 야속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차갑게 쏘아붙이고 돌아서버린 내 모습도 후회스러웠다. 나쁜 의도가 아니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평생을 그렇게 빈틈없는 논리로만 세상을 살아온 사람인데, 내가 너무 하루아침에 내 방식대로의 위로를 강요한 건 아닐까.
테이블 위에 엎드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오빠: 집 앞 카페에 와 있어.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나를 말려 죽이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불쑥 남양주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볼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카페 밖에서 서성이는 그의 얼굴은 며칠 사이 꽤 수척해져 있었다. 평소의 그 단단하고 자신감 넘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불안한 눈빛이었다.
내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가자, 그가 흠칫 놀라며 내 앞에 섰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목요일 밤의 그 끔찍했던 통화 이후, 나는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내 인생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완벽한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성민희의 눈물 앞에서는, 내 평생의 무기가 그저 그녀를 찌르는 날카로운 흉기일 뿐이었다.
토요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엉켜있던 내 머릿속의 알고리즘이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민희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은 물리적인 상황(주방의 비효율)이 아니라, 정서적인 상태(상처받은 마음)다. 그렇다면 내가 제시해야 할 가장 완벽한 솔루션은 논리적 컨설팅이 아니라, 철저한 감정적 위로와 공감이다.'
결론이 나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차를 몰고 남양주로 오는 내내, 나는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내가 입력해야 할 리액션 데이터를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퉁퉁 부은 눈을 한 그녀가 서 있었다.
"...민희야."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었다.
"왜 왔어? 어제부로 내 감정 데이터는 처리 불가능하니까 포기한 거 아니었어?"
그녀의 날 선 비꼬임에도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진지하고 올곧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며칠 동안 밤새 생각해 봤어."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내가 평생을,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걸 분석하고 뜯어고치는 데에만 매달려 살다 보니까... 네가 힘들다고 기대왔을 때조차, 너를 '해결해야 할 문제 상황'으로만 인식했던 것 같아. 네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차가웠다.
"나는 감정을 배제하는 게 가장 완벽하게 널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는데, 네가 우는 걸 보니까 내 평생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오답이라는 걸 깨달았어. 네 마음이 다친 게 진짜 문제인데, 나는 엉뚱한 데다 칼을 대고 있었더라."
"......"
"앞으로 네가 속상하다고 할 때,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모든 합리적인 생각들 다 강제로 종료할게. 내 평생의 방식을 버리는 거라 처음엔 좀 뚝딱거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억지로라도 무조건 네 편부터 드는 연습 할게. 어제 혼자 울게 해서, 상처 줘서 정말 미안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모든 논리를 내려놓고 바치는 가장 절절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의 고백을 듣고 있자니, 며칠 동안 뾰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르르 풀려버렸다.
자기가 평생 옳다고 믿고 갈고닦아 온 세상을 흔쾌히 깨버리고, 나를 위해 기꺼이 낯선 감정의 영역을 연습하겠다고 약속하는 이 남자. 이성밖에 모르는 무뚝뚝한 남자가 전전긍긍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진짜 연습할 거야?" 내가 짐짓 삐친 척 입술을 내밀며 묻자, 그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 머릿속에 매뉴얼로 단단히 새겨놨어. 1번 리액션. '진짜 힘들었겠다.' 2번 리액션. '그 사람이 나쁜 놈이네.'"
마치 암기한 공식을 읊듯 비장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결국 나는 풉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진짜 못 살아. 누가 공감 리액션을 그렇게 달달 외워서 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반복 숙달해야지. 원래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면 적응 기간이 필요한 법이야." "영혼이 하나도 없잖아!"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자, 그의 굳어있던 얼굴에도 그제야 옅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카페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얼음장 같았던 우리의 첫 냉전은, 그의 진심 어린 사과로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오빠. 나 배고파. 어제부터 한 끼도 안 먹었어." "뭐 먹을래. 다 사줄게. 네 감정 수치를 가장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는 메뉴가 뭔지 말만 해."
"음... 떡볶이. 엄청 매운 거!" "좋아. 가자."
우리는 기분 좋게 손을 잡고 근처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맑았고,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나의 감성과 그의 이성이 드디어 완벽한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평화로웠다.
이 평화가 단 1시간 만에 깨질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매운 떡볶이를 땀까지 흘려가며 기분 좋게 비웠을 때였다.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다 보니, 며칠 전 출근길에 겪었던 황당한 일이 떠올랐다.
"아! 오빠, 나 며칠 전에 가게 앞 골목에 잠깐 주차를 했는데, 아침에 보니까 주차 위반 딱지가 끊겨 있는 거야! 아니, 주차 금지 표지판이 가로수에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거든? 나 진짜 너무 억울해!"
나는 그때의 억울함이 되살아나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쌩돈 4만 원 날리게 생겼잖아. 구청 공무원들 진짜 일 대충 하는 거 아니야? 표지판을 보이게 관리를 해놔야지!"
자. 여기서 오빠가 오늘 연습했다고 호언장담한 1번 리액션이 나와야 할 타이밍이다. '아고, 우리 민희 진짜 억울했겠다. 공무원들이 잘못했네.'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이더니, 그의 입에서 아주 익숙하고도 소름 돋는 '합리적'인 단어들이 자동 반사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표지판이 나무에 완전히 가려져서 육안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관할 구청에 이의신청을 제기해서 과태료 처분 취소를 요구할 수 있어. 이건 명백한 행정청의 고지 의무 위반이거든."
"...어?"
그는 이미 손에서 포크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하고 있었다.
"그날 주차할 당시의 블랙박스 영상 있어? 그 영상이랑, 표지판이 가려져 있는 현장 사진을 로드뷰랑 교차 검증해서 증빙 자료를 첨부하면 무조건 승소할 수 있어. 내가 지금 바로 행정심판 양식에 맞춰서 이의신청서 뼈대 잡아줄게."
그의 두 눈은 완벽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희열과, 억울한 내 돈을 지켜주겠다는 열의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오빠. 나 이의신청서 쓸 시간도 없고 귀찮아서 그냥 돈 낼 거야. 내 말은 그 상황이 기분 나쁘고 짜증 났다는..."
"과태료를 낼 필요가 없는 명백한 행정 오류 상황에서 지출을 하는 건 매우 비합리적인 판단이야. 이건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정당한 권리를 구제받는..."
그의 이성적인 솔루션이 또다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순간. 나는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그를 싸늘하게 빤히 쳐다보았다.
"......"
나의 싸늘한 침묵에,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의 입이 멈췄다. 그는 나를 한 번, 자신이 법령을 검색 중이던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채 1시간도 안 된 자신의 맹세를 어떻게 어겼는지 깨달은 듯 동공이 격렬하게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
그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황급히 뒤집어 내려놓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빠." "......어."
"오빠 방금 나한테 1번 리액션 연습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근데 왜 갑자기 행정사 사무소 직원이 빙의됐어? 나 구청이랑 소송할까?"
나의 서늘한 비꼬임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갈고닦은 본능은 어설픈 벼락치기 패치 따위로 쉽게 눌러지는 게 아니었다.
"미치겠네. 진짜 미안해. 내 뇌가 조건 반사처럼 또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돌려버렸어."
그가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다급하게 수습을 시도했다. "다시, 다시 할게. 잠시만. 어... 진짜 억울했겠다! 그 구청 공무원들이... 아주 무조건 잘못했네! 나쁜 놈들이네!"
방금 전까지 관련 법규를 청산유수처럼 읊어대던 그 똑똑한 입에서, 아까 외웠던 그 뻣뻣한 로봇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그 억지스러운 텐션의 낙차가 너무 엉뚱해서, 나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결국 다시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푸하하하! 진짜 어색해서 못 들어주겠네! 오빠 그럴 거면 그냥 이의신청서 써와!" "아니야, 아니야. 공무원들이 나쁜 놈들이야. 네가 속상한 게 제일 큰 문제야. 과태료는 그냥 내. 합리적인 지출이야."
그는 식은땀을 닦으며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깔깔 웃으며 그의 팔을 때렸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변하겠는가. 평생을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살아온 남자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그의 본능적인 '해결사 기질'이 자꾸만 이성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을 어쩌겠는가.
"오빠." "어, 어." "앞으로 나한테 대답할 때 10번 중에 5번은 그냥 솔루션 말해. 나도 적응해 볼게. 대신 나머지 5번은 무조건 방금처럼 영혼 없는 리액션이라도 해. 알았지?"
나의 타협안에, 그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내가 공감 비율을 점진적으로 7대 3까지 늘려보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놈의 점진적 비율 진짜! 한 번만 더 이의신청 어쩌고 해봐 아주."
극강의 T와 극강의 F. 우리의 연애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에러를 뱉어낼 것이고, 툭하면 치열하게 부딪힐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고, 나는 그때마다 공감해 달라고 툴툴거릴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남자는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평생을 바친 알고리즘을 뜯어고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패치가 자주 오류를 일으켜서 무한 루프를 돌게 될지라도 말이다.
"오빠, 근데 나 아까 오빠가 말한 이의신청서 양식은 좀 필요할지도 몰라. 4만 원 아깝긴 하네." "거 봐. 내 솔루션이 결국 가장 합리..." "쓰읍! 다시 해봐. 1번 리액션." "......진짜 억울했겠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남양주의 오후. 파란만장한 T와 F의 대환장 무한 루프 연애는, 이제 겨우 진짜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