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관성의 법칙과 6기통의 낭만

by 연구소장

1. 황민우 : 완벽한 데이터의 맹점


나른한 토요일 오후.


정자동 카페거리로 향하는 길, 열어둔 창문 틈으로 봄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따뜻하고 느긋한 공기. 서두를 것 없는 주말의 냄새가 났다.


신호 대기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자, 차체가 미세하게 덜덜거리는 진동이 스티어링 휠을 타고 손끝에 전해졌다. 지하 주차장 한구석을 묵묵히 지켜온 내 차, 검은색 아반떼였다.


남들보다 늦은 30대 중반 무렵에 면허를 땄다. 대리점에 들어가자마자 “아반떼 풀옵션, 검은색으로 해주세요.” 5분 만에 계약서를 썼던 나의 첫차. 지난 몇 년간 출퇴근을 성실하게 책임져 준 고마운 녀석이지만, 세월에 따른 기계의 노후화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두 번째 차를 맞이할 때가 온 것이다.


이번에 차를 고르는 기준은 첫차를 살 때의 직관적인 무모함과는 달랐다. 타깃은 극강의 연비와 안락한 정숙성을 갖춘 하이브리드 세단.


지난 몇 달간 나는 이 목표를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매일 밤 시승 영상을 분석하고, 제조사 홈페이지에서 수십 번의 가상 견적서를 뽑았다. 전체 유지비를 10년 단위로 환산한 엑셀 시트만 세 개가 넘었다.


스크래치 관리를 위해 흰색으로 갈 것인가, 세단의 묵직함을 위해 검은색을 유지할 것인가.


신호가 바뀌고 액셀을 밟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온통 트림과 옵션의 상관관계로 가득했다.


참고로 내 후보군에 SUV는 단 1퍼센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무게중심이 높아 승차감이 떨어지고, 코너링 시 쏠림 현상이 발생한다는 숱한 데이터를 확인한 뒤였다.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불편한 차를 몰 이유가 없었다.


수십 번의 교차 검증을 마친, 오차 없는 나의 결론.


카페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빨랐지만, 민희는 아마 벌써 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늘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케이크 한 입을 베어 문 뒤다.


오늘 데이트에서 민희에게 이 합리적인 결과물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감탄할 만한 완벽한 선택지를.


2. 성민희 : 모니터 밖으로


정자동의 한적한 테라스 카페.


햇살이 부서지는 테이블 위로 딸기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였다. 봄볕 아래 앉아 있으면 졸음이 밀려올 만큼 평화로운 오후. 이런 날은 아무 생각 없이 단 것만 먹고 싶다.


“음, 맛있다. 여기 케이크 진짜 부드럽네.”


기분 좋게 포크를 입에 물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오빠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향했다. 케이크도 아메리카노도 안중에 없는 눈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 화면을 홀린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뭐 봐?”


“차 바꿀 때가 돼서 견적 좀 내봤어. 한 번 볼래? 이번엔 흰색으로 할까 생각 중이거든.”


오빠가 내민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로에 나가면 5분에 한 대씩은 마주치는, 뻔하고 얌전한 국산 하이브리드 세단 견적서였다.


“……오빠, 세단 사게? 직접 타보기는 했고?”


“굳이 타볼 필요가 있나. 데이터상으론 이만한 차가 없어. 출퇴근용으로 연비나 승차감 면에서 가장 합리적이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담백한 대답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은 토요일 오후 데이트에서조차 연비 타령이다. 딸기 케이크 앞에서 합리성을 운운하는 남자.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면이 싫지만은 않다. 오빠가 무언가에 몰두해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그 대상이 설령 엑셀 시트일지라도 꽤 볼 만하니까. 다만 차는 좀 다른 문제다.


“아휴, 황민우 진짜. 오빠, 차는 엑셀 파일이 아니야.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쇳덩어리라고. 유튜버들이 승차감 좋다고 하면 오빠 허리에도 무조건 맞아? 신발도 매장 가서 직접 신어보고 사면서, 수천만 원짜리 차를 방구석에서 모니터만 보고 고르는 게 말이 돼?”


오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침묵은 반박할 말이 없을 때 나오는 침묵이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세를 몰아 바짝 다가앉았다.


“나는 밋밋한 세단보다 SUV가 훨씬 낫던데. 나중에 여행 갈 때 짐 싣기도 편하고, 시야도 트여서 덜 답답하잖아. 이참에 SUV도 한 번 알아보는 건 어때?”


오빠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차분하게 대답했다.


“SUV라. 사실 팰리세이드나 쏘렌토 같은 차들도 후보에 두긴 했었어. 공간 면에서는 확실히 우수하니까.”


“근데 왜 뺐어?”


“차가 불필요하게 커. 매일 막히는 길을 뚫고 출근해야 하는데, 혼자 타기엔 뒷자리에 여백이 너무 많아. 골목길이나 주차할 때 신경 쓸 것도 많고. 혼자 탈 때 부담 없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이즈가 편하거든.”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알겠어. 든든한 패밀리카는 오빠 데일리카로는 너무 휑하고 벅차다는 거지. 그럼 덩치 크지 않은 수입차 SUV 쪽으로 돌아보자. 소화도 시킬 겸 걷기 딱 좋네. 여기 근처에 분당 수입차 거리 있는 거 알지?”


“지금 당장?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당장 계약하라는 거 아니니까. 일단 모니터 밖으로 나와서 진짜 차를 만져보기나 하자.”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서며 망설이는 오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 사람한테는 가끔 이렇게 물리적인 힘이 필요하다. 데이터의 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 끌어내는 것. 그게 내 역할이라는 걸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깨달았다.


3. 황민우 : 꼼꼼한 쇼윈도, 취향의 소거법


민희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수입차 거리의 쇼윈도들은 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의 깐깐한 취향을 현실의 물리적 데이터로 테스트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민희는 내 팔짱을 낀 채 매장과 매장 사이를 걸었다. 차에 대한 지식은 나보다 한참 부족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감각이 있다. 모니터 속 숫자로는 절대 잡히지 않는, 실물 앞에서만 작동하는 일종의 직감 같은 것.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국산 프리미엄 브랜드 매장이었다.


매장 정중앙에 전시된 GV80. 특유의 거대한 크레스트 그릴과 두 줄의 헤드램프가 어우러져, 도로 위에서 스쳐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와,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웅장하다. 오빠, 이거 뒷자리 완전 회장님 차 같은데?”


민희가 2열의 광활한 레그룸을 보며 감탄했다. 뒷좌석에 앉아 다리를 꼬아보더니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기사 양반, 출발하시게.”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묵직한 운전석 도어를 열고 시트에 앉아 보았다. 퀼팅이 들어간 나파 가죽의 질감은 훌륭했고, 다이얼 방식의 기어 조작부도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스티어링 휠을 잡고 전방을 주시하자 넓은 보닛이 시야에 가득 찼다. 이 보닛 너머로 매일 아침 좁은 아파트 단지 출구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좋은 차인 건 맞는데, 밖에서 보는 덩치만큼이나 나한텐 과해. 매일 이걸 끌고 막히는 도심이랑 좁은 골목길을 지날 생각하면 답답해지겠어. 패스.”


매장을 나와 다음 목적지로 걷는데 도로 맞은편에 아우디 매장이 보였다. 민희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빠, 아우디는 안 봐? Q 시리즈도 인기 많던데.”


나는 시선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길거리에서 꽤 봤는데, 솔직히 디자인이 영 내 취향이 아니야. 그릴이나 램프 라인이 둥글둥글한 게 내가 원하는 단단한 느낌이 없거든.”


“오빠 취향 진짜 까다롭다.”


민희가 혀를 내둘렀지만, 그 말투에 짜증은 없었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어서 들어간 볼보 매장.


XC60과 XC90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민희는 꼼꼼한 원목 마감과 크리스탈 기어 노브, 바워스앤윌킨스 스피커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스칸디나비아 감성에 푹 빠져 환호했다.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연곡에 귀를 기울이는 민희를 보며, 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눈에 이해됐다. 이 차는 민희를 닮았다. 정갈하고, 따뜻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종류의 감성.


하지만 나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정갈하고 다 좋은데, 이 특유의 정제된 느낌이 나랑 묘하게 안 맞아. 조금 더 역동적인 게 좋겠어.”


벤츠 매장에서도 깐깐한 필터링은 계속됐다.


GLC의 도어를 여는 순간 화려한 앰비언트 라이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죽 스티치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실내.


“와, 여기 조명 봐. 무슨 고급 라운지 같아. 이건 어때, 오빠?”


“화려하긴 한데, 내 일상이랑은 결이 안 맞아.”


민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대체 오빠 일상의 ‘결’이 뭔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아닌 건 안다. 차량의 크기. 실용성. 디자인의 결. 그리고 내 일상과의 조화. 나는 그 감각들을 손끝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후보군을 하나씩 소거해 나갔다. 데이터로만 판단하던 나에게 이건 처음 해보는 방식이었다. 모니터 속 스펙 시트에는 없던 정보들이 손바닥과 등받이, 시선의 높낮이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민희가 나를 끌고 나온 게 이래서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BMW 매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분위기. 화려함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 절제. 그게 묘하게 정감이 갔다.


전시된 X5 앞에 섰다.


“X5는 아까 GV80처럼 부담스럽게 커. 출퇴근용으론 과해.”


“그럼 지붕 깎인 쿠페형 X4는?”


“단종 수순이라 제외. 감가상각 생각하면 단종 모델은 피하는 게 맞아. 남는 건 X3네.”


조명 아래 놓인 X3 앞으로 다가갔다. 적당히 기민해 보이는 비율. 그런데 정면을 마주하는 순간 미간이 좁혀졌다.


“디자인이 왜 이러지.”


풀체인지된 신형 X3의 키드니 그릴은 어지러운 대각선 패턴이었다. 내 기준에 합격점을 주기 어려운 외관이었다.


“고객님, 신형은 디자인이 미래지향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하실 수 있지만 주행감은 뛰어납니다. 직접 타보시겠습니까?”


딜러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SUV는 출렁거릴 것이라는 오랜 편견이 과연 사실인지, 이 발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4. 성민희 : 낯선 중력


시승차에 오빠는 운전석, 딜러분은 조수석, 나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고속화도로 진입을 위해 나들목 코너를 도는 순간, 오빠의 팔과 어깨에 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스티어링 휠이 상당히 묵직한 모양이었다.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운전석에 앉은 오빠의 뒷모습만으로도 긴장감이 전해져왔다.


딜러분이 차분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BMW 특유의 세팅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올려보시면, 이 묵직함이 안정감으로 바뀌는 걸 느끼실 겁니다.”


고속화도로에 진입해 오빠가 가속 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속도가 오르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들목에서 꾹 다물었던 입꼬리가 조금씩 풀렸다. 스티어링 휠을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의 힘이 빠지면서, 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둥글게 감기는 것이 보였다. 긴장이 아니라 감탄에 가까운 손의 모양.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무언가에 마음을 여는 순간에는 항상 손에서 먼저 신호가 온다. 커피잔을 감싸 쥘 때, 내 손을 처음 잡았을 때, 좋아하는 음악이 나왔을 때 스티어링 휠을 두드리던 손가락. 오늘도 손이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나조차도 차체가 지면에 착 달라붙은 듯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알던 SUV의 출렁거림이 아니었다.


앞좌석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때, 오빠? 타보니까 유튜버들이 떠들던 거랑 다르지?”


“어. 확실히 다르네. 하체 밸런스가 상당히 좋아. 기대 이상이야. 출퇴근할 때 이 정도면 피로도가 훨씬 덜하겠어.”


칭찬이 나오는데도 오빠의 표정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스티어링 휠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미세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전체적인 밸런스는 훌륭한데, 가속 페달 깊게 밟을 때 치고 나가는 펀치력이 조금만 더 여유로웠으면 좋겠어요.”


나는 속으로 웃었다. 연비와 정숙성만 따지겠다던 남자가, 시승 한 번에 펀치력을 논하고 있다. 모니터 밖으로 꺼내오길 잘했다.


딜러분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고객님, 차를 제대로 즐기실 줄 아시네요. X3 라인업에 고성능 퍼포먼스 모델이 따로 있습니다. 출고 대기 중인 M 퍼포먼스 모델이 한 대 있는데, 시동 소리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5. 황민우 : 이성을 압도하는 것


야외 주차장.


딜러가 출고를 앞둔 퍼포먼스 차량의 시동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부우우웅— 팝팝!!


뒤쪽 듀얼 배기구에서 거칠고 웅장한 배기음이 터져 나왔다.


“와! 오빠, 방금 뭐야?!”


민희가 두 눈을 반짝였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췄다.


죽이네.


속으로 짧은 감탄을 삼켰다. 연비와 유류비를 스프레드시트에 채워 넣던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숫자가 아닌 소리가, 이성이 아닌 본능이 먼저 반응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건 좋아함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알아듣는 소리였다.


“직렬 6기통 엔진의 배기음입니다. 4기통 모델과는 감각 자체가 다릅니다.”


딜러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출퇴근용으로는 오버 스펙일 수도 있겠지만, 엔진은 무조건 이 6기통으로 가야겠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민희가 팔짱을 낀 채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게 시야 끝에 걸렸다. 데이터의 세계에서 살던 남자가 소리 한 번에 무너지는 장면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형 모델의 앞모습을 다시 마주하자,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왔다.


“차량 자체는 훌륭한데, 이 사선 패턴 그릴은 도저히 제 취향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이전 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 사진을 딜러에게 보여주었다. 완벽한 비율의 키드니 그릴.


“이 디자인에 방금 그 6기통 엔진이 들어간 차, 신차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딜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이미 단종되어, 신차로는 전국에 단 한 대의 재고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나는 쿨하게 매장 문을 나섰다.


“어떡해, 오빠? 아예 다른 브랜드를 다시 볼까?”


길가에 서서 걱정스레 묻는 민희에게,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 차는 이전 모델 X3 M40i야. 중고 매물을 찾으면 돼.”


머릿속에는 이미 선명한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완벽한 비율의 키드니 그릴. 그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직렬 6기통. 그 차가 아니면 안 됐다. 연비로 시작한 여정이, 엔진 소리 한 번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여버린 것이다.


민희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오빠 눈 좀 봐. 아까 카페에서 견적서 보여줄 때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6. 황민우 : 담배 사듯이


며칠 뒤, 평일 낮.


차에 밝은 친한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출퇴근용으로 탈 차 엔카에서 매물 좀 찾아라. BMW X3 M40i 이전 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 완전 무사고. 주행거리 짧은 놈. 추려주면 내가 알아서 살게.


평소 그 녀석의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가능한 부탁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습관처럼 카톡을 열었는데, 동생이 조건에 맞는 매물 링크를 몇 개 추려 보내놓은 게 보였다.


링크를 하나씩 열었다. 첫 번째, 주행거리가 마음에 걸렸다. 세 번째, 색상이 아쉬웠다.


두 번째 링크에서 스크롤이 멈췄다.


BMW X3 M40i (LCI). 알파인 화이트. 주행거리 15,000킬로미터. 완전 무사고.


신차급 매물이었다. 사진을 넘겼다. 그런데 다음 장의 사진에서 숨이 멎었다.


전 차주가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순정 실버였을 키드니 그릴이 글로시 블랙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휠도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알파인 화이트 차체 위에 검은 그릴과 검은 휠이 올라가니, 순정 상태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명암 대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얀 보디 위에 얹힌 검은 포인트들이 차의 인상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매장 야외 주차장에서 6기통 시동 소리를 처음 들었던 그 순간의 진동이 손끝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딜러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화면 하단의 엔카 홈서비스 결제 버튼을 눌렀다. 차량 대금과 이전비가 포함된 총금액 확인, 본인 인증, 계좌 등록, 이체 승인. 간편하다고 하지만 은근히 절차가 길었다. 회사 자리에서 모니터 옆에 스마트폰을 세워두고, 한 단계씩 진행했다. 승인 완료 화면이 뜨기까지 체감상 꽤 오래 걸렸다.


끝났다.


수천만 원이 손끝 하나로 빠져나갔는데, 후회는커녕 가슴이 시원했다. 동생이 데이터를 검증해서 준 매물이고, 색상과 컨디션은 내가 직접 확인했다. 시스템으로 보증되는 매물인데, 굳이 딜러 얼굴을 보고 살 필요가 있나.


동생에게 카톡 한 줄을 남겼다. 방금 앱으로 결제했다. 탁송 잡힌다.


답장이 곧바로 왔다.


"형 지금 무슨 담배 사듯이 차를 앱으로 때려요?"


피식, 웃음이 났다.


민희에게도 카톡을 보냈다. 차 샀다. 한 줄.


3초 만에 전화가 왔다.


“뭐?! 언제?! 나한테 말도 없이?!”


“방금. 앱으로 결제했어. 탁송 잡히면 연락 온대.”


“미쳤어?! 수천만 원짜리 차를 딜러랑 통화 한 번 안 하고 앱에서 결제 버튼 눌러서 산 거야?!”


전화기 너머로 터져 나오는 민희의 경악이, 이상하게도 듣기 좋았다. 이 사람이 놀라는 목소리에는 화가 아니라 애정 섞인 황당함이 들어 있다. 그걸 구별할 수 있게 된 건 사귄 지 꽤 지나서였다.


“주말에 보여줄게.”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내내 일에 집중이 안 됐다. 모니터 위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알파인 화이트 위에 올라간 글로시 블랙 그릴만 맴돌고 있었다.


7. 황민우 : 두 대의 차


탁송이 잡힌 날 저녁, 퇴근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데, 형광등 불빛 아래 낯선 흰색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에 있어야 할 검은색 아반떼 옆, 한 칸 건너에 하얀 SUV가 서 있었다. 탁송 기사가 연락한 대로 세워두고 간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으로만 보던 바로 그 차였다. 알파인 화이트 차체 위에 글로시 블랙 키드니 그릴이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검은색 휠이 하얀 보디와 날카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형광등의 무심한 빛 아래서도 그 명암 대비는 사진에서 본 것 이상이었다. 전 차주의 감각에 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손을 뻗어 보닛 위에 살짝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온도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아직 시동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차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 칸에 서 있는 아반떼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차체에 미세한 생활 스크래치가 몇 개 나 있었다. 문콕 방지 가드도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 5분 만에 계약서를 쓰고, 아무 기대 없이 타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은 단 한 번도 길 위에서 나를 불안하게 한 적이 없었다.


아반떼를 팔 생각은 없었다. 두 번째 차를 사면서 첫 번째 차를 보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출퇴근은 새 차가 맡겠지만, 이 녀석에게는 이 녀석만의 자리가 있다. 지하 주차장 한구석, 묵묵히 지켜보는 자리.


검은 아반떼와 하얀 X3가 한 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었다. 색깔도 크기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대. 나의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이 광경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새 차의 운전석 도어를 열었다. 시동 버튼을 누르자 직렬 6기통이 지하 주차장의 콘크리트 벽을 타고 웅웅 울렸다. 야외 주차장에서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소리. 그런데 이번에는 그 소리가 내 차에서 나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엔진의 진동인지, 내 심장의 진동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8. 성민희 : 간지나는 드라이브


주말이 왔다.


현관문 앞에 서서 운동화 끈을 매는데, 오빠에게서 카톡이 왔다. 5분 뒤 도착. 나는 립밤을 한 번 더 바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앞 골목은 조용했다. 빨래가 널린 베란다들 사이로 봄 햇살이 비스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낯선 소리가 깔리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낮은 베이스음. 흔한 자동차 소리가 아니었다. 맹수가 숨을 죽이며 다가오는 듯한, 거칠면서도 정제된 그르렁거림. 골목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골목 어귀를 돌아, 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알파인 화이트 SUV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차체 위에 올라간 글로시 블랙 키드니 그릴이 정면에서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검은색 휠까지. 사진으로 봤을 때도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실물은 차원이 달랐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봄 햇살 아래에서 도저히 중고차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차는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하지만 네 바퀴로 지면을 단단히 움켜쥔 채 다가왔다.


내 바로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배기음이 짧게 한 번 포효했다.


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오빠가 한 팔을 창틀에 걸친 채 씩 웃고 있었다.


평소 무표정에 가까운 그 얼굴에 드물게 번지는 웃음이었다. 데이터로 무장한 남자가 마침내 데이터 밖의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에만 짓는, 그런 종류의 표정. 나는 그 표정을 지금까지 딱 두 번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우리가 처음 사귄 날, 그리고 오늘.


“타.”


짧은 한마디. 나는 조수석으로 돌아가 도어를 열고 올라탔다.


시트에 앉는 순간,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새 차 특유의, 아직 아무 추억도 배어들지 않은 깨끗한 냄새. 하지만 곧 이 시트에는 우리의 시간이 쌓일 것이다. 토요일 오후의 카페 드라이브, 여름밤 한강 근처의 정차, 말다툼 뒤의 어색한 침묵, 화해한 뒤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이 가죽 위에 보이지 않는 층으로 켜켜이 쌓일 것이다.


“내 말이 맞지? 그 뻔한 하이브리드 세단 샀으면 어쩔 뻔했어.”


“네 말이 맞았네. 네가 등 떠밀어서 시승 안 시켜줬으면, 난 평생 이 6기통 엔진 맛을 모르고 매일 똑같이 출근할 뻔했다.”


오빠는 스티어링 휠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부우우웅— 팝팝!


가볍게 액셀을 밟자, 도심을 가르는 웅장한 배기음이 심장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창밖으로 봄볕에 빛나는 가로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조수석 창문을 살짝 열자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며칠 전 정자동 카페거리에서 불던 그 봄바람과 같은 냄새가 났다. 그날 나는 이 사람의 팔을 잡고 카페 의자에서 끌어냈고, 이 사람은 결국 엑셀 시트 위에는 없던 차를 샀다.


나는 시트에 깊이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빠의 손이 능숙하게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 것이 시야 구석에 들어왔다. BMW 매장에서 처음 시승할 때 뻑뻑하게 돌리던 그 손이, 이제는 이 차에 완전히 적응한 손이 되어 있었다.


데이터만 고집하던 남자를 모니터 밖의 세계로 끌어낸 것은 결국 나였다.


그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오빠의 두 번째 자동차 생활과 우리의 연애는 전보다 훨씬 더 짜릿하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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