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말은 보통 철저하게 짜인 엑셀 시트처럼 굴러간다. 특히 오늘처럼 거대한 변수—새로 뽑은 하얀색 X3 M40i—가 일상에 투입된 날이라면, 그 시나리오는 더욱 치밀해져야만 했다.
아침 8시 기상. 9시부터 11시까지는 자동차 매뉴얼 정독 및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세팅. 12시 30분에 민희의 집 앞으로 픽업을 가고, 오후 1시 정각에 남산 소월길로 진입한다. 벚꽃이 완전히 지기 전의 남산 순환도로는 새 차의 부드러운 핸들링을 테스트하기에 완벽한 곡선 구간을 제공할 것이고, 2시 15분에는 미리 예약해 둔 이태원의 뷰 좋은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마신다. 주차장의 진입로 각도와 노면 상태까지 로드뷰로 이미 두 번이나 교차 검증을 마친 상태였다.
"오빠, 차 진짜 조용하게 잘 나간다! 밖에서 들을 땐 엄청 크르렁거리더니, 막상 타니까 생각보다 되게 편안하네?"
조수석에 앉은 민희가 창밖의 풍경과 실내를 번갈아 구경하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나는 남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의 완만한 코너를 돌며, 스티어링 휠을 잡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직렬 6기통의 매끄러운 회전 질감을 음미했다.
"그게 6기통의 묘미지. 저속에서는 여유롭고 부드럽게 밀어주다가, 엑셀을 깊게 밟으면 숨겨둔 야성을 드러내는 거. 이따 남산 뷰 포인트에 차 세우고 사진 좀 찍자. 오늘을 위해서 내가 유튜브로 스마트폰 사진 잘 찍는 법까지 완벽하게 숙지해 왔거든."
나의 유일한 취미는 퇴근 후 방구석에서 게임을 하거나, 모니터 앞에서 신작 모바일 게임의 동향을 분석하는 것뿐이다. 카메라 렌즈 조리개 값이나 화이트 밸런스 같은 감각적인 영역은 내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완벽한 비율의 키드니 그릴을 뽐내는 나의 영롱한 하얀색 6기통 기함과, 조수석에서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민희. 이 두 피사체를 완벽하게 담아내기 위해, 나는 어젯밤 '여자친구 인생샷 찍어주는 스마트폰 카메라 설정법'과 '자동차 얼짱 각도 튜토리얼' 영상을 무려 두 시간 동안 정독했다. 카메라 앱의 3분할 격자선 활성화, 광각 렌즈 왜곡을 활용한 다리 길어 보이게 찍는 각도, 차량의 숄더 라인을 강조하는 빛의 방향까지. 내 머릿속은 이미 완벽한 구도와 수학적 비율로 가득 차 있었다.
"진짜? 황민우가 웬일이야! 맨날 나 이상하게 찍어놔서 내가 구박했었는데. 오늘 기대해도 되는 거지?"
"물론이지. 내가 모바일 게임 UI 기획하던 짬바가 있는데, 스마트폰 화면 비율 하나 못 맞추겠어? 그리드 켜고 황금 비율로 딱 맞춰서 찍어줄게. 남산 타워 배경으로 완벽한 프레임이 나올 거야."
모든 것이 내 통제하에 부드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남산 소월길의 적당한 굽이침, 봄날의 완벽한 채광, 그리고 내비게이션 화면에 표시된 오차 없는 도착 예정 시간까지.
하지만 나는, 내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즉흥성의 화신, ENFP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남산 소월길을 감아 도는 드라이브는 기분 좋았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봄바람도 살랑거렸고, 굽이진 길을 돌 때마다 오빠가 엑셀을 밟으면 차체 밑바닥에서부터 '우르릉' 하고 기분 좋은 맹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단을 고집하던 오빠가 내 말 한마디에(물론 배기음의 공이 컸지만) 이렇게 멋진 SUV를 샀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했다. 하얀색 차체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실내의 꼬냑 색상 가죽 시트는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이야, 코너 도는 느낌이 진짜 세단 못지않네. 안 쏠린다, 진짜."
오빠는 운전대를 잡은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평소 게임 데이터나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던 남자가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다니. 차를 사라고 부추긴 보람이 확실히 있었다.
그런데 남산 중턱을 지나 이태원 쪽으로 방향을 틀 즈음이었다. 탁 트인 하늘 아래서 엔진 소리를 좀 더 제대로 듣고 싶다는 충동이 갑자기 훅 하고 밀려왔다. 남산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는 속도를 내기엔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이 엄청난 6기통 야수를 몰고 고작 이태원의 비좁고 복잡한 카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고? 그건 차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좀 더 뻥 뚫린 길, 시원한 물가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내 머릿속 직관의 나침반이 순식간에 요동치며 새로운 목적지를 뱉어냈다.
"오빠! 오빠, 잠깐만. 저기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지 말고 그냥 직진해서 좌회전 타자!"
내비게이션의 파란색 경로를 따라 우측 깜빡이를 넣으려던 오빠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오빠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 좌회전? 거기 이태원 가는 길 아닌데? 내비게이션 경로는 우회전이야."
"아, 이태원 카페 가지 말자! 이렇게 날씨가 미쳤고 차도 새로 뽑았는데, 주차장 좁아터진 이태원 골목이 웬 말이야. 우리 그냥 뻥 뚫린 데로 쏘자!"
"쏘자고? 어디로? 나 2시 15분에 카페 창가 자리 예약 다 해놨어. 주차장 들어가는 진입각까지 다 계산해 놨는데?"
오빠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며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정교하게 짜여 있던 타임라인과 경로가 통째로 엉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우, 예약은 취소하면 되지! 오빠 차 엔진 소리 여기서 듣기엔 너무 아깝잖아. 우리 물가로 가자, 물가. 팔당댐! 그래, 팔당댐 쪽으로 드라이브 가자. 올림픽대로 타고 쭉 밟아보는 거야!"
"팔당댐? 지금 당장? 올림픽대로 교통량 확인도 안 했고, 팔당 쪽엔 뷰 좋은 카페를 알아둔 데이터가 전혀 없는데? 주차장 컨디션도 모르고!"
"아, 그냥 가다 보면 예쁜 데 나오겠지! 폰 카메라로 인생샷 찍어준다며! 남산 타워보다 팔당댐 윤슬 배경이 하얀색 차랑 훨씬 잘 어울릴 걸? 빨간불 들어온다, 빨리 좌회전 차선으로 붙어!"
나의 밑도 끝도 없는 기세와 막무가내 논리에, 오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쥔 두툼한 M 스포트 스티어링 휠은 스르륵 왼쪽으로 돌아가 좌회전 차선에 안착했다.
"진짜…… ENFP의 무계획성은 내 상식으론 예측이 안 된다, 정말."
오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팔당댐'으로 수정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오빠의 볼을 꾹 찌르며 활짝 웃었다.
"계획에 없던 게 원래 더 재밌는 법이야. 자, 6기통 밟아보시죠, 기사님!"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마치 내 이성의 붕괴를 알리는 경고음처럼 들렸다.
오후 2시 15분 이태원 카페 도착. 4시 정각에 한남동 편집숍 구경. 6시에 예약해 둔 다이닝 레스토랑. 이 모든 완벽한 주말의 타임라인이 조수석에 앉은 여자의 '팔당댐 가자'라는 말 한마디에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머릿속에서 오류 창이 수십 개씩 팝업되는 기분이었다. 팔당으로 향하는 주말 오후의 올림픽대로 정체율, 목적지 주변의 카페 주차장 컨디션(새 차 문콕 방지를 위한 광폭 주차면 확보 여부), 그리고 갑작스러운 동선 변경에 따른 저녁 식사 장소 재탐색까지. 연산해야 할 변수들이 너무 많아 뇌에 과부하가 올 지경이었다.
"오빠, 표정 좀 풀어. 나 쳐다보지 말고 앞을 봐, 앞! 차선 합류해야지!"
내 속도 모르는 민희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올림픽대로에 진입하기 위해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렸다.
우웅- 팝!
그 순간이었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뻥 뚫린 한강 변의 고속화도로에 차를 올리고 지그시 엑셀을 밟자, 답답하게 억눌려 있던 직렬 6기통 엔진이 시원한 포효를 터뜨리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미쳤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올 뻔했다.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이나 남산의 저속 구간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폭발적인 가속력이었다. 차체는 거짓말처럼 도로에 납작하게 달라붙었고, 스티어링 휠은 묵직하게 노면을 움켜쥐었다. 기어가 변속될 때마다 뒤쪽 배기구에서 터져 나오는 '팝콘 소리'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우고 있던 엑셀 파일과 타임라인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와! 오빠, 이거 진짜 빠르다! 차가 엄청 부드럽게 튀어 나가는데?"
바람을 맞으며 환호하는 민희의 목소리에, 나는 경직되어 있던 입가를 풀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치. 이래서 6기통, 6기통 하는구나. 시내에서만 몰았으면 이 차의 진짜 가치를 절반도 몰랐을 뻔했네."
예측 불가능한 경로 이탈. 내가 가장 싫어하는 통제 밖의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돌발 변수 덕분에 나는 지금 내 새 차의 가장 완벽한 퍼포먼스를 경험하고 있었다. 한강의 물비늘이 햇살에 반사되어 하얀색 보닛 위로 부서져 내렸다.
계획에 없던 풍경. 계산하지 않은 바람. 그리고 맹수처럼 울부짖는 엔진음.
"뭐, 가끔은 이렇게 계획 없이 내비게이션 끄고 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네."
나는 센터페시아 모니터에 떠 있는 도착 예정 시간 따위는 무시해 버린 채, 조금 더 과감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팔당댐 근처의 한적하고 뷰가 좋은 강변 공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주말치고는 인적이 드물어, 오빠의 소중한 '문콕 없는 단독 주차'가 가능한 완벽한 스팟이었다.
시동을 끄자 우렁차던 엔진음이 잦아들고, 강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만 평화롭게 맴돌았다.
"자, 이제 내려봐. 내가 어제 유튜브로 배운 스마트폰 사진 촬영의 정수를 보여줄게."
차에서 내린 오빠가 비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마치 게임 길드전에서 마지막 보스를 레이드하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차 앞쪽으로 걸어갔다.
"자, 어디 서면 돼? 차에 기댈까?"
"잠깐, 잠깐만. 아직 앵글 안 맞췄어. 3분할 격자 켜고…… 수평선 맞추고. 오케이. 빛의 방향이 지금 측면광이니까 차량의 보닛 캐릭터 라인이 아주 예쁘게 살겠어."
오빠는 내 얼굴이나 포즈는 보지도 않고, 화면 속 그리드(격자)와 하얀색 X3의 라인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급기야 그는 카메라 렌즈를 아래로 향하게 하더니,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쭈그려 앉기 시작했다.
"오빠 지금 뭐 해? 땅바닥에 개미 있어?"
"아니, 로우 앵글(Low Angle)로 찍어야 키드니 그릴의 웅장함이 극대화되고, 피사체의 다리가 길어 보인다고 했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봐. 수직 수평 맞추는 중이니까."
정장에 가까운 깔끔한 슬랙스 차림의 남자가 흙바닥에 무릎이 닿을락 말락 한 기마자세로 끙끙대며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 진지한 표정이 너무 어설프고 귀여워서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아, 황민우 진짜 웃겨! 오빠, 나 찍는 거 맞아? 차 그릴만 확대해서 찍는 거 아니야?"
"너도 프레임 안에 들어 있어. 왼쪽 하단 3분할 교차점에 정확하게 배치했으니까 움직이지 마.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찰칵, 찰칵.
연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빠는 결과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음, 뭔가 데이터와 결괏값이 다른데. 광각 렌즈 왜곡을 가장자리에 주면 다리가 길어 보여야 하는데, 왜 네 발이 왕발처럼 나왔지? 수평이 1.5도 정도 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마치 게임 디버깅을 하듯 사진을 이리저리 확대하고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오빠의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에는 강물과 하얀색 X3의 각도는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지만, 그 옆에 선 나는 광각 렌즈의 저주를 받아 발이 280mm는 되어 보이는 요상한 비율로 찍혀 있었다. 심지어 눈을 반쯤 감은 타이밍이었다.
"아악! 이게 뭐야! 차는 벤츠 카탈로그처럼 찍어놓고, 나는 무슨 외계인을 만들어 놨잖아!"
"이상하다. 튜토리얼 영상에서는 분명히 발끝을 화면 하단에 맞추면 황금 비율이 나온다고 했는데. 내가 앵글 계산을 잘못했나……."
진심으로 시무룩해져서 원인을 분석하는 오빠의 모습에 묘한 감동과 웃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평소엔 완벽을 추구하고 이성적이기 짝이 없는 남자가, 나 예쁜 사진 하나 찍어주겠다고 유튜브까지 공부해서 흙바닥에 쭈그려 앉다니.
"아휴, 비켜봐. 내가 구도 잡아줄게. 오빠는 그냥 셔터만 눌러."
나는 오빠를 일으켜 세우고, 내가 원하는 구도로 카메라 앱의 줌을 조절해 주었다.
"자, 이렇게 딱 가슴 높이에서 들어. 수평이고 격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내 얼굴이랑 오빠 차 앞모습만 잘 나오게 찍어주면 돼. 하나 둘 셋 하면 찍어!"
나는 다시 차의 헤드램프 옆으로 가서 섰다. 강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활짝 웃으며 브이(V) 자를 그렸다.
"하나, 둘, 셋!"
찰칵.
"어때? 이번엔 잘 나왔지?"
"어…… 음. 수직은 여전히 안 맞지만, 표정은 자연스럽네."
오빠가 액정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오빠에게 다가가 이번엔 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 카메라맨 수고했으니까 이번엔 오빠도 옆에 서 봐. 같이 셀카 찍자."
하얀색 키드니 그릴을 배경으로 우리 둘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자, 웃어! 오빠 표정 너무 로봇 같아. 입꼬리 더 올려!"
"아, 나 사진 찍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투덜거리면서도 오빠는 렌즈를 향해 어색하게, 하지만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이 돌발적인 팔당댐 드라이브의 가장 완벽한 피사체가 내 사진첩에 저장되었다.
강변의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근처에 보이는 적당히 낡았지만 테라스가 넓은 로스터리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이태원의 럭셔리한 뷰 맛집은 아니었다. 주차장 바닥도 아스팔트가 아닌 흙바닥이었고, 커피의 향이나 음악의 선곡도 내 깐깐한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것이 내 계획과 정반대로 굴러간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테라스 의자에 앉아, 햇살 아래 영롱하게 빛나는 하얀색 X3 M40i의 측면 실루엣을 바라보며 마시는 아메리카노의 맛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오빠, 사진 다시 봐도 웃겨. 어떻게 내 발을 항공모함으로 만들어 놓을 수가 있어?"
맞은편에 앉은 민희가 폰 갤러리를 넘겨보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머쓱하게 커피 잔을 매만졌다.
"그러게. 데이터와 매뉴얼대로 실행했는데 아웃풋이 엉망으로 나올 때가 가끔 있단 말이지. 사진의 세계는 역시 직관의 영역인가 봐."
"맞아. 차 고를 때도 오빠가 맨날 엑셀로 연비랑 소음 데이터만 비교하다가, 결국 엔진 소리 한 번 듣고 바로 직관적으로 꽂혀서 산 거잖아. 가끔은 머리 말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일 때가 있다니까?"
민희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녀의 말대로, 만약 내가 처음 세웠던 '가장 합리적인 데이터'에 얽매여 얌전한 하이브리드 세단을 샀다면 어땠을까. 꽉 막힌 남산 순환도로에서 정숙하게 전기 모터나 굴리며 이태원 카페의 좁은 주차장에 진입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대로를 치고 나가던 6기통 엔진의 폭발적인 희열도,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수평선 맞추겠다고 진땀을 빼던 어설픈 웃음도, 목적지 없이 바람 닿는 대로 달려보는 이 낯설지만 짜릿한 해방감도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민희가 턱을 괴고 짓궂게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다음 주말엔 어디 갈까? 오빠가 또 엑셀로 1분 단위 스케줄 짜올래, 아니면 당일에 내 맘대로 내비게이션 찍어버릴까?"
나는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내 6기통 기함을 한 번, 그리고 내 앞의 예측 불가능한 여자를 한 번 번갈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글쎄. 엑셀로 기본 틀 정도는 내가 짜둘게. 어차피 네가 조수석에 타는 순간 목적지는 또 바뀌겠지만…… 뭐, 어떤 경로로 이탈하든 다 맞춰줄게. 이제 나한텐 네 변덕쯤이야 거뜬히 받아줄 훌륭한 엔진이 생겼으니까."
내 대답에 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커피 잔을 부딪쳐 왔다.
완벽한 타임라인의 붕괴. J(판단형)인 내게는 영원히 적응하기 힘든 시스템 오류지만, 이 고장 난 내비게이션과 함께 달리는 드라이브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잔잔한 팔당호의 수면 위로 눈부신 봄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