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비행, 그 잊을 수 없는 순간
세가 새턴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팬저 드래군'을 모를 수가 없다. 1995년에 출시된 이 레일 슈팅 게임은 드래곤을 타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날아다니며 적과 싸우는 독특한 설정으로 화제를 모은다.
360도 전방위 공격이 가능한 혁신적인 시스템, 프랑스의 전설적 만화가 뫼비우스를 연상시키는 기묘하고 환상적인 비주얼, 그리고 무엇보다 첫 스테이지에서 울려 퍼지는 'Flight'라는 웅장한 음악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게임을 시작하면 물에 잠긴 고대 도시의 잔해들이 펼쳐진다. 푸른 하늘과 끝없는 수평선 사이를 가르는 드래곤. 'Flight'가 시작되면 현악기의 상승 선율이 드래곤의 날갯짓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백그라운드에서 울리는 드럼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추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부양감, 정말로 하늘을 나는 듯한 그 느낌을.
작곡을 맡은 아즈마 요시타카는 의외의 인물이다. 게임 음악계 사람이 아니라 1980년대부터 뉴에이지와 실험적 전자음악 분야에서 활동하던 아티스트였다. 'Asian Wind'나 'AZUMA' 같은 앨범으로 이미 자신만의 음향 세계를 구축했던 그는 탠저린 드림이나 클라우스 슐체 같은 독일 크라우트록의 영향을 받아 몽환적이고 우주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쉽게도 요시타카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Flight'는 2025년에도 여전히 울려퍼진다.
'팬저 드래군'의 개발팀인 팀 안드로메다(Team Andromeda)가 요시타카를 기용한 건 흥미롭다. 팀 안드로메다는 프랑스 만화가 뫼비우스의 작품처럼 기묘하고 이질적인 세계관을 만들고자 했고, 이런 독특한 비주얼에는 일반적인 게임 음악과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게임 업계 밖에서 활동하던 요시타카의 음향 세계를 게임에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요시타카가 게임 플레이가 거의 완성된 후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화음악 감독처럼 완성된 화면을 보면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런 팬저 드래군은 요시타카에게 유일한 게임 스코어 음악이 된다.
'Flight'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팬저 드래군 스페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버전은 휩쓰는 듯한 현악기가 주선율을 이끌고, 힘찬 금관악기가 웅장함을 더한다. 특히 샬뤼모(chalumeau)라는 악기 사용이 인상적인데, 현대 클라리넷의 전신인 이 민속 악기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음색이 고대 문명의 흔적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세가 새턴의 SCSP 사운드 칩으로 실시간 생성되는 신시사이저 버전은 실제 게임에서 들을 수 있는 버전이다. 오케스트라만큼 풍부하지는 않지만 게임 플레이와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된다. 레일 슈터라는 장르 특성상 이동 경로가 정해져 있어서, 요시타카는 화면 변화와 음악을 정교하게 맞출 수 있었다.
스테이지가 시작되면 잔잔한 도입부가 흐른다. 드래곤과 함께 물 위를 낮게 날면서 듣는 음악은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현악기가 주선율을 이끌고, 드럼이 일정한 리듬으로 전진감을 만든다. 그러다 갑자기 적들이 수면 아래에서 튀어나온다. 타악기가 강렬해지고 금관악기가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전투 모드로 들어가고, 락온 사운드와 폭발음이 음악과 섞이면서 하나의 교향곡이 된다.
전투가 끝나고 드래곤이 다시 상승할 때 현악기의 익숙한 선율이 돌아온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면 무너진 고층 건물들과 바다에 잠긴 도로들이 보인다. 음악에 깔린 애수가 멸망한 문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대한 유적 내부로 들어가면 음악이 또 한 번 변한다. 메아리치는 듯한 사운드와 동굴을 연상시키는 잔향이 공간의 변화를 바로 알려준다. 시각과 청각 모두로 환경의 변화를 느낀다.
팬저 드래군 전체 21곡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녹음된 곡은 'Main Title', 'Flight', 'Staff Roll' 세 곡뿐이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인다. 1990년대 중반, 세가는 새턴이라는 차세대 게임기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CD 음원, 폴리곤 그래픽, 전에 없던 스케일의 게임 경험. 팬저 드래군은 세가 새턴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쇼케이스였다.
'Flight'를 첫 스테이지에 배치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게임을 처음 켜는 플레이어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메인 테마로 기대감을 높이고, 'Flight'로 그 기대를 터뜨린다. 이후 스테이지들이 신시사이저 음악으로 진행되더라도 'Flight'가 심어놓은 장대한 인상은 게임 끝까지 이어진다. 플레이어는 신시사이저 음악을 들으면서도 오케스트라의 여운을 계속 떠올린다.
'Flight'의 진정한 힘은 음악이 게임플레이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드래곤이 날개를 펼칠 때 현악기도 함께 펼쳐진다. 적을 락온할 때 타악기가 리듬을 맞춘다. 보스를 격파할 때 금관악기가 승리를 알린다.
레일 슈터는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제한한다. 정해진 길만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음악은 제약을 장점으로 바꾼다. 정해진 경로를 가는 동안 음악이 플레이어를 안내하고, 격려하고, 감동시킨다. 롤러코스터처럼 코스는 정해져 있지만, 음악이 만드는 감정의 변화 덕분에 매번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중반부의 수중 도시 구간이다. 드래곤이 물에 잠긴 빌딩 사이를 날 때 음악의 선율도 물결처럼 출렁인다. 눈으로는 폐허를 보면서도 귀로는 한때 번영했던 도시의 흔적을 듣는 듯하다. 이런 시청각적 대비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깊이가 음악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2020년에 '팬저 드래군: 리메이크'가 나온다. 시리즈 후속작들의 음악을 담당했던 코바야시 사오리가 'Flight'를 재편곡한다. 원곡의 멜로디는 살리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더했는데, 오케스트라 대신 신시사이저를 선택했다. 'Panzer Dragoon Zwei', 'Panzer Dragoon Saga', 'Panzer Dragoon Orta'에서 구축한 "에스노트로닉" 사운드와 통일성을 맞추기 위해서다.
팬들은 나뉘었다. 원작 오케스트라의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쪽과 시리즈 전체의 음악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쪽. 이런 논쟁이 계속된다는 것 자체가 'Flight'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자크는 'Sonic & All-Stars Racing Transformed'에서 이 곡을 리믹스했다. 바로 이것이 세가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Flight'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