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새로운 제물

by 연구소장

손목 위에서 희미하게 진동하는 기계식 시계의 초침 소리.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특별감사팀 7명의 팀원들에게 그 소리는, 자신들의 영혼을 기꺼이 서지안이라는 완벽한 포식자에게 헌납했다는 맹세의 박동이자, 앞으로 이어질 더 거대한 피비린내를 예고하는 전장의 북소리였다.


월요일 오전, 22층 특별감사팀의 회의실.


평소라면 피로에 전 얼굴로 상석의 눈치만 살피던 팀원들의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허리는 꼿꼿했고, 눈빛에는 일말의 불안도 섞이지 않은 맹목적인 충성심이 번들거렸다. 그들의 소매 끝자락 아래로 언뜻언뜻 빛나는 천만 원대의 하이엔드 시계들이, 이 방 안에 모인 자들이 더 이상 평범한 직장인이 아님을 오만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회의실 상석에 앉은 서지안은 그들의 변화를 만족스럽게 눈에 담았다.


“송태섭 부장의 빈자리는 재무팀 내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허수아비 임원으로 채워질 겁니다. 재무팀은 이제 우리 특감팀의 완벽한 멀티가 되었습니다.”


지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우아한 손짓으로 테이블 중앙에 놓인 태블릿 PC의 화면을 회의실 대형 스크린으로 띄웠다.


“하지만 만족하기엔 이릅니다. 잔챙이들의 군기를 잡았으니, 이제 그룹의 진짜 뇌수(腦髓)를 건드려볼 차례니까요.”


스크린에 한 남자의 거대한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헝클어진 곱슬머리, 넥타이를 풀어 헤친 자유분방한 셔츠 차림, 그리고 오만함으로 가득 찬 날카로운 눈매. 태성그룹 미래전략 R&D 센터장, 백도훈 전무였다.


“백도훈. 나이 서른아홉. 스탠퍼드에서 AI와 로보틱스를 전공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이름을 날리다, 우리 태성그룹 부사장님께서 삼고초려 끝에 파격적인 대우로 모셔 온 천재 개발자죠.”


오 과장이 스크린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실장님. 백 전무라면… 현재 부사장님의 최측근이자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혼자 다 쥐고 있는 성역(聖域) 아닙니까? 그 양반이 쓰는 R&D 예산만 1년에 수천억입니다. 임원들도 그 앞에서는 굽신거리는데, 우리가 그를 타겟으로 삼는 건 무리가 아닐지…….”


“성역이라.”


지안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비틀렸다.


“오 과장님.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성역은 없습니다. 그가 쥐고 있는 그 수천억의 예산과 권력. 그걸 우리 전략기획실로 완벽하게 흡수해야만, 여러분이 누릴 영광이 더 거대해지지 않겠습니까?”


‘영광’이라는 단어에 팀원들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쩍였다.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녀의 킬힐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회의실의 공기를 장악했다.


“백도훈은 송태섭처럼 고리타분한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천재라는 타이틀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굴고 있죠.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백 전무의 기행에 대한 기존 임원들의 불만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습니다. 부사장님의 비호가 없었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인물입니다.”


지안은 해커 출신 박 대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박 대리. 타겟의 데이터 브리핑해 봐.”


박 대리가 헐렁한 후드티 소매를 걷어붙이며 태블릿을 조작했다. 새롭게 장착한 예거 르쿨트르 시계가 모니터 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네, 실장님. 백도훈 전무의 최근 6개월 치 사내망 트래픽과 법인카드, 그리고 이메일 캐시 기록을 전부 긁어모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양반의 소비 패턴입니다. 백 전무는 법인카드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접대도 안 하고 골프도 안 치죠. 오직 자신의 개인 카드로만 엄청난 액수를 결제하는데, 그 결제처가 전부 청담동과 한남동의 프라이빗 주류 수입사들입니다.”


화면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영수증 내역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와인이나 샴페인이 아닙니다. 알코올 도수 50도를 훌쩍 넘는 싱글몰트 위스키, 꼬냑, 그것도 캐스크 스트랭스(물로 희석하지 않은 원액) 급의 독주들뿐입니다. 한 달 주류 구매비만 2천만 원이 넘습니다.”


박 대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건강 데이터입니다. 백 전무가 차고 다니는 스마트워치의 헬스 앱 서버를 우회해서 털어본 결과, 그의 일일 수면 시간은 평균 3시간 미만입니다. 새벽 시간대의 안정 시 심박수는 비정상적으로 치솟아 있고, 수시로 부정맥에 가까운 패턴이 발견됩니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안은 팔짱을 낀 채, 마치 연쇄살인범의 현장 사진을 감상하는 프로파일러처럼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천재의 화려한 이면 뒤에 숨겨진 끔찍한 불면증,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기 위한 살인적인 알코올 섭취. 그림이 아주 훌륭하게 그려지네요.”


인간의 뇌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완벽주의적 강박에 시달릴 때,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편도체를 비대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짐승처럼 뇌가 경보를 울려대는 것이다. 백도훈은 그 끔찍한 뇌의 굉음을 끄기 위해, 마취제로서 알코올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사장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수천억의 예산을 굴리며 세상을 바꿀 혁신을 내놓아야 한다는 그 엄청난 중압감. 천재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속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바싹 말라 있겠죠.”


지안은 스크린 속 백도훈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이런 부류는 억지로 쥐고 흔들면 오히려 반발심에 더 꼿꼿해집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천재에게 필요한 건, 비판이나 감사가 아니죠.”


지안의 목소리가 한없이 달콤하고 끈적해졌다.


“그의 고통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구원자'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가장 기분 좋게 취하도록.”


오후 4시, 본사 30층 미래전략 R&D 센터.


이곳은 정장을 빼입고 숨죽여 일하는 아래층들과는 전혀 다른 생태계였다. 온갖 복잡한 기계 장치와 서버들, 홀로그램 모니터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편안한 후드집업 차림의 연구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치한 투명한 유리 집무실 안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데이터야?! 초등학생이 방학 숙제로 긁어온 위키백과도 이거보단 낫겠다!”


백도훈 전무였다.


그는 구겨진 명품 셔츠의 소매를 거칠게 걷어붙인 채, 결재판을 바닥으로 팽개쳤다. 집무실 앞에 도열한 수석 연구원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내일까지 로직(Logic) 다시 짜와. 한 번만 더 이딴 쓰레기로 내 시간 낭비하게 만들면 그땐 다 짐 싸서 나갈 줄 알아. 꺼져!”


연구원들이 쫓기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지안은 센터 입구에 서서 그 일련의 폭풍 같은 상황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백도훈의 그 난폭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했겠지만, 지안의 눈에 비친 그는 그저 가여운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일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백도훈의 분노하는 입이나 큰 목소리가 아니라, 아주 미세한 신체적 징후들을 향해 있었다.


서류를 집어 던진 직후 허공을 맴도는 그의 왼손 손가락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코올 금단 현상 특유의 수전증(진전)이었다. 백도훈은 신경질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 아주 강한 페퍼민트 향이 나는 사탕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아침부터 들이켰을 독주의 냄새를 가리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눈동자에는 피로와 분노로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가엾은 사람. 천재 코스프레를 유지하느라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네.’


지안은 속으로 서늘한 조소를 삼키며, 완벽하게 다려진 슈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가에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다정한 미소를 띤 채 그의 집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야! 내일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등을 돌린 채 모니터를 노려보던 도훈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안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쁘신데 실례가 많습니다, 전무님.”


벨벳처럼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


그 이질적인 주파수에 도훈이 흠칫 놀라며 의자를 돌렸다. 먼지투성이의 삭막한 연구실 한가운데, 잡지 화보에서나 걸어 나온 듯한 완벽한 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고급스러운 조 말론 향수의 잔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매캐한 스트레스의 공기를 단숨에 정화시키는 듯했다.


“누구십니까.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인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22층 전략기획실 특별감사팀장, 서지안입니다.”


‘감사팀’이라는 단어에 도훈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감사팀? 부사장님이 또 나를 쪼라고 사냥개를 보내셨나? 돈 쓸데없이 쓴다고? 내 연구에 토 달 거면 당장 나가요. 난 당신들 같은 양복쟁이들이랑 입씨름할 시간 없으니까.”


도훈은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사내의 수많은 임원들이 이 오만한 천재의 콧대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고 물러나곤 했다.


그러나 지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가, 도훈의 어지러운 책상 위에 놓인 빈 커피잔을 치우고 그 자리에 아주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최고급 벨벳으로 감싸인 작고 묵직한 쇼핑백이었다.


“사냥개라니요, 전무님. 저는 숫자를 쪼러 온 게 아니라, 인사를 드리러 온 겁니다.”


지안의 목소리는 어떤 추궁이나 압박의 기운도 없이, 한없이 나긋나긋하고 우아했다.


“태성그룹의 미래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매일 밤 피를 말리는 전무님께, 감사팀이 해드릴 수 있는 게 무얼까 고민했습니다. 감시가 아니라, 완벽한 서포트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도훈은 지안의 이질적인 태도에 당황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내의 늙은 임원들은 언제나 그를 견제하거나, 혹은 부사장의 뒷배를 두려워해 알랑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젊은 여성은 달랐다. 그녀의 눈빛에는 그를 향한 두려움도, 시기심도 없었다. 오직 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다는 듯한 기묘한 연민만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뭡니까?”


도훈이 쇼핑백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열어보시죠.”


도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쇼핑백 안에서 꺼낸 것은, 묵직한 오크 상자에 담긴 술병이었다. 순간, 도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상표조차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오직 숫자로만 그 가치를 증명하는 40년 숙성 캐스크 스트랭스 싱글몰트. 전 세계에 몇 병 풀리지도 않아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는, 도수 58도의 전설적인 독주였다. 알코올에 찌든 도훈의 뇌가 그 영롱한 호박색 액체를 인식하는 순간, 폭발적인 도파민을 뿜어내며 그의 식도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 이런 걸 어떻게 구했습니까. 감사팀장이 나한테 왜 이런 뇌물을…….”


도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아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자부했던 자신의 은밀한 중독을 그녀가 완벽하게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그리고 동시에, 그 지독한 갈증을 채워줄 완벽한 구원자를 만났다는 환희가 교차했다.


“뇌물이라니요. 이건 뇌물이 아니라, 영감(Inspiration)을 위한 촉매제입니다.”


지안은 허리를 살짝 굽혀, 도훈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지안의 하얀 얼굴이 도훈에게로 가까워지자, 그가 씹고 있던 짙은 민트 향 너머로 썩어가는 위장의 냄새와 알코올의 단내가 지안의 코끝을 스쳤다. 지안은 내색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무님. 저는 알아요.”


“……무엇을 안다는 겁니까.”


“전무님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분들이, 그 천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속으로 얼마나 끔찍한 지옥과 싸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남들은 천재라고 치켜세우지만, 정작 본인은 매 순간 자신의 영감이 고갈될까 봐, 사람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밤잠을 설치시겠죠.”


타인의 가장 내밀한 결핍,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관의 무게’를 짚어내는 언어의 마술. 그 한마디에 도훈이 겹겹이 쳐두었던 오만함의 방어막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 밖에 있는 멍청한 평범한 사람들은 전무님의 예민함을 정신병이나 갑질로 매도하겠죠. 하지만 전 다릅니다.”


지안은 도훈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떨리는 손등 위로, 자신의 차갑고 매끄러운 손을 가만히 포개어 얹었다. 도훈은 흠칫 놀랐지만, 거부하지 못했다.


“천재의 뇌는 원래 평범한 인간의 것과 다릅니다. 그 뜨거운 과부하를 식히기 위해서는, 일탈이 필요하죠. 상식을 뛰어넘는 압박감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위안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지안은 도훈의 손을 가볍게 토닥인 뒤, 다시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회사 규정? 임원 윤리? 그런 잣대들은 평범한 양복쟁이들에게나 갖다 대라고 하십시오. 전무님은 그런 자잘한 그물에 얽매일 분이 아닙니다. 이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전무님이 이 안에서 무엇을 들이켜며 영감을 쥐어짜 내시든… 감사팀장인 제가, 완벽하게 눈감아 드리고 비호해 드리겠습니다.”


도훈은 멍하니 지안을 올려다보았다.


여태껏 그를 대했던 여자들은 두 종류뿐이었다. 그의 지위와 돈을 보고 아양을 떠는 술집 여자들이거나, 그의 괴팍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비서들.


하지만 서지안은 달랐다. 그녀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자신과 동등한, 아니 어쩌면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품어주는 여신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천재에게, 그녀는 자신의 곪은 상처를 드러내고 안길 수 있는 유일한 성역(Sanctuary)이었다.


“서지안 실장…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군.”


도훈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오크 상자를 끌어안았다. 지안은 붉은 입술을 둥글게 말아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저는 전무님의 가장 든든한 팬입니다. 곧 있을 이사회 프레젠테이션, 기대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이 마법의 물약으로 마음껏 뇌의 사슬을 풀어두시지요.”


지안은 정중하게 목례를 남기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연구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지안의 등 뒤로, 도훈이 서급하게 오크 상자를 열고 유리잔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거리는 그 소리는, 지안의 귀에는 짐승이 덫에 놓인 미끼를 덥석 물어뜯는 파열음과도 같았다.


늦은 밤.


지안의 최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


샤워를 마치고 가운만 걸친 채 거실로 나온 지안은,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채 창밖으로 빛나는 서울의 야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 동안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그녀의 모습이 무장 해제된 채 뿜어내는 기운은, 아름답다 못해 서늘한 표독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탁.


거실 테이블에 놓인 지안의 개인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 대리였다.


[실장님. 백도훈 전무 연구실 내부 카메라 해킹 완료했습니다. 현재 40년산 원액, 절반 이상 비웠습니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팀원들에게 밤 11시에 전체 소집 명령을 내렸네요. 발작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지안은 입가에 머금었던 레드 와인을 목구멍으로 천천히 넘겼다. 핏빛 액체가 하얀 목선을 타고 넘어가는 모습이 기괴하도록 관능적이었다.


불안장애와 강박증에 시달리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 그들에게 독주는 순간적으로 뇌의 경보 장치를 꺼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지만, 그 마취가 풀리는 순간, 혹은 알코올이 뇌의 전두엽(이성)을 마비시키고 편도체(감정)를 폭주하게 만드는 순간,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난폭한 괴물로 변이(Metamorphosis)한다.


지안이 도훈에게 바친 그 최고급 독주는, 천재의 뇌를 휴식하게 만드는 약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폭력성과 광기를 끄집어낼 완벽한 기폭제였다.


“마셔, 도훈 선배. 마음껏 취하고, 밑바닥까지 부수라고.”


지안은 텅 빈 거실을 향해 달콤하고도 섬뜩한 속삭임을 내뱉었다.


“네가 스스로의 천재성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괴물로 변해갈 때, 너의 그 잘난 R&D 센터 팀원들은 공포에 질려 너를 버릴 테니까.”


지안의 시선은 며칠 뒤에 있을 그룹 이사회의 프레젠테이션 날짜에 가 닿아 있었다.


수백억의 예산이 결정되는 그 신성한 무대 위. 수백 명의 임원진이 바라보는 그곳에서, 알코올에 절어 이성을 잃은 천재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박살 내는 끔찍한 쇼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 파멸의 잿더미 위에서, 미쳐버린 천재를 제압하고 위기에 빠진 태성그룹을 우아하게 구원해 낼 잔다르크는 오직 서지안, 자신 하나뿐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지안의 눈동자가 야경의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현대의 이단심문관이 놓은 두 번째 덫이, 사냥감의 목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조여가고 있었다.

이전 04화제4화. 공범자들의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