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불안의 연금술

by 연구소장

평범한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과 천재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해야 한다.


평범한 인간들은 생계와 평판,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미줄에 단단히 얽혀 있다. 따라서 그 거미줄을 살짝만 흔들어주어도 그들은 삶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원초적인 공포에 질려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앞서 도륙당한 재무팀 송태섭 부장과 그의 부하 직원들이 정확히 그러했다.


하지만 백도훈과 같은 천재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을 주도한다는 압도적인 오만함과, 타인의 평가 따위는 언제든 실력으로 뒤집을 수 있다는 맹목적인 자기 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에게 사내 정치나 대중의 평판 같은 외부의 압력은 모기가 앵앵거리는 정도의 성가심일 뿐, 결코 치명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외부에서 강한 압박이 들어올수록 그들은 더욱 자신의 내면과 연구에 침잠하며, 기어코 세상을 놀라게 할 성과를 내놓아 반대파의 입을 찢어버리곤 했다.


그렇다면, 사방이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천재의 자아를 파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지안은 그 해답을 뇌과학과 심리학의 교차점에서 찾아냈다. 천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경이로운 집중력’과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 그 전두엽의 스위치를 강제로 꺼버리면 되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그의 주변에 끝없는 ‘노이즈(Noise)’를 발생시키는 것.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뇌의 인지적 자원(Cognitive Load)에는 한계가 있다. 업무에 온전히 쏟아부어야 할 에너지를 사소한 오해, 인간관계의 마찰, 부서 내의 기묘한 불협화음들을 처리하는 데 낭비하게 만들면, 천재의 뇌는 서서히 피로해진다. 거기에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치명적인 기저질환이 더해지면,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은 마비되고 감정과 공포를 주관하는 편도체만이 비대하게 부풀어 올라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는 괴물로 변이하게 된다.


서지안은 이 고상하고도 잔혹한 과정을 ‘불안의 연금술’이라 불렀다.


수요일 오전 10시. 미래전략 R&D 센터의 공기는 마치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먹구름처럼 무겁고 습했다.


백도훈 전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채, 듀얼 모니터에 띄워진 수만 줄의 코드를 신경질적으로 스크롤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한편에는 지안이 선물했던 40년산 캐스크 스트랭스 위스키가 담긴 오크 상자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는 불면증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저 마법의 액체를 세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덕분에 간신히 서너 시간의 토막잠을 잤지만,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발생하는 극심한 숙취와 탈수 증세가 그의 뇌신경을 사포처럼 거칠게 긁어대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 도훈은 서랍에서 진통제 두 알을 꺼내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전무님. 1팀에서 올린 딥러닝 알고리즘 최적화 보고서입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R&D 센터 1팀을 이끄는 윤 수석연구원이 조심스럽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도훈은 핏발이 선 눈으로 태블릿 화면을 훑어내렸다.


“윤 수석.”


“네, 전무님.”


“내가 어제 오전 회의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데이터 전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목 현상, 그 쓰레기 같은 딜레이를 잡으라고. 그런데 이 수치는 뭐야. 어제보다 0.2초 단축된 게 다잖아.”


도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경멸과 짜증은 숨길 수 없이 날카로웠다. 윤 수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게… 물리적인 서버 할당량 자체에 한계가 있어서, 알고리즘을 아무리 깎아내도 인프라 쪽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더 이상의 단축은 무리라는 게 인프라팀의 의견입니다. 어제 타 부서와의 서버 점유율 조정 메일도 드렸는데….”


“남 탓하지 마!”


쾅!


도훈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윤 수석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인프라가 부족하면 코드를 더 가볍게 짜야 할 거 아냐!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대한민국 최고의 석박사들이 맞긴 해? 어떻게 된 게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떠먹여 주지 않으면 굴러가지를 않아! 당신들 뇌는 장식품이야?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빠르겠어!”


도훈은 태블릿을 윤 수석의 가슴팍으로 밀쳐내듯 던져버렸다.


“다시 해와. 내일 아침까지 0.5초 단축 못 하면 1팀 전원 해당 프로젝트에서 손 떼. 나가!”


윤 수석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도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왜 아무도 내 머릿속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거지?’ 지독한 고립감과 짜증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도훈은 알지 못했다.


어제 인프라팀에서 1팀으로 보냈던 ‘서버 점유율 조정 불가’ 메일은, 사실 인프라팀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제 오후, 22층 특별감사팀의 데이터 분석실.


후드티를 뒤집어쓴 박 대리는 지안의 지시를 받고 사내망의 트래픽 라우터를 교묘하게 건드렸다. 그는 시스템을 멈추게 하는 유치한 해킹을 하지 않았다. 그저 R&D 센터 내부에서 오가는 부서 간 협조 이메일의 전송을 고의로 몇 시간씩 지연시키고, 결재 시스템의 승인 알림이 담당자에게 누락되도록 아주 미세한 ‘오류’를 심어두었을 뿐이다.


서버 조정을 요청하는 윤 수석의 다급한 메일은 인프라팀 담당자가 퇴근한 직후에야 수신함에 떨어졌고, 결국 오늘 아침 1팀은 인프라 지원 없이 무리하게 코드를 깎아내다 한계에 부딪힌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소통의 부재. 하지만 이 미세한 엇박자들이 쌓이고 쌓이면, 거대한 톱니바퀴는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망가지기 시작한다.


점심시간. R&D 센터 실무진들이 모여 있는 휴게 공간.


윤 수석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아니, 인프라팀 놈들은 왜 어제 퇴근할 때까지 메일 확인도 안 하고 내뺀 거야? 덕분에 우리만 아침부터 백 전무한테 개박살이 났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전무님 요새 진짜 왜 저러십니까?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회의 들어올 때마다 술 냄새인지 민트 향인지 모를 이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사람이 완전 신경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연구원들이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때, 그들 틈에 섞여 있던 한 책임 연구원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안 봤어? 오늘 아침에 우리 센터 관련해서 이상한 찌라시 하나 돌았잖아.”


“찌라시요? 무슨 내용인데요?”


“백 전무가 이번 이사회 프레젠테이션 끝나면, 우리 센터 대대적으로 물갈이할 거라는 소문. 특히 자기 기준 못 맞추는 1팀이랑 2팀 실무진들 다 쳐내고, 실리콘밸리에서 자기 라인 애들 데려와서 그 자리 채울 거란 이야기가 파다해.”


“뭐라고요?! 우리가 밤새워가며 이번 프로젝트 뼈대 다 만들어놨는데, 이제 와서 우리를 내치고 단물만 빨아먹겠다고요?”


윤 수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물론, 이 모든 소문은 서지안이 특별감사팀원들을 동원해 사내 익명 게시판과 찌라시 네트워크에 교묘하게 흘려보낸 ‘완벽한 가짜 뉴스(Fake News)’였다.


지안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억지스러운 소문이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군중은 그것을 무비판적인 진실로 수용한다는 사실을. 백도훈의 연일 계속되는 폭언과 비상식적인 강압에 시달리던 연구원들에게, 이 찌라시는 그들의 공포를 입증해 주는 완벽한 ‘물증’이었다.


“어쩐지… 요새 우리 아이디어 낼 때마다 다 쓰레기 취급하면서 기안서 다 반려시키더니. 그게 결국 우리 무능함 증명해서 쫓아내려는 명분 쌓기였어?”


“이거 완전 싸이코 아닙니까? 천재면 다야? 우리가 지들 로봇인 줄 아나 보지!”


연구원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프라팀의 소통 누락’이나 ‘전무의 잦은 짜증’ 정도로 치부되던 사소한 불만들이, 이제 ‘우리를 축출하려는 거대한 음모’라는 치명적인 서사로 재조립되었다.


신뢰가 무너진 조직은 겉잡을 수 없이 썩어 들어간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자, R&D 센터 내부의 기류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연구원들은 더 이상 백도훈을 위해 100%의 기량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여나 책임을 뒤집어쓸까 두려워, 아주 사소한 코드 수정조차 백도훈의 서면 결재를 요구하며 업무의 진행 속도를 고의로 늦추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제안은 사라졌고, 오직 면피를 위한 기계적인 방어만이 센터의 공기를 채웠다.


“당신들 지금 단체로 파업해?!”


오후 5시. 백도훈의 집무실 밖으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도훈의 앞에는 오후 내내 올라온 수십 장의 결재 서류와 보고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따위 단순한 알고리즘 테스트 하나를 내 결재를 받아야 진행하겠다고? 당신들 언제부터 이렇게 수동적인 기계가 됐어! 이사회 PT가 당장 다음 주인데, 나 혼자 짐수레 끌고 당신들은 짐짝처럼 실려 가겠다는 거야?!”


도훈의 호통에도 연구원들은 예전처럼 떨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텅 빈 동공으로 도훈을 쳐다보며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 묘하고도 차가운 눈빛. 그것은 상사를 향한 존경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들을 내다 버릴 배신자’를 향한 경멸과 적대감이었다.


도훈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이질감을 느꼈다.


알코올로 인해 인지 능력이 저하된 그의 뇌(전두엽)는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 대신,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렸다. ‘이놈들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 나를 고립시키려 한다.’


피해망상은 금단 현상과 결합하여 극도의 편집증으로 진화했다.


“다들 나가. 내일부터 이 프로젝트 관련 보고는 메일로만 받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꺼지라고!”


도훈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치며 연구원들을 내쫓고는 집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철컥.


완벽한 밀실이 된 공간.


도훈은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가, 떨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명이 들렸다. 수십 명의 연구원들이 문밖에서 자신을 비웃고 쑥덕거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저 무식한 놈들이 감히 내 예술을 망치려 들어?’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펌프질을 해대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극단적인 고립감과 공포. 도훈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책상 한편에 놓인 오크 상자로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간신히 40년산 싱글몰트 위스키의 코르크를 뽑아냈다. 잔을 챙길 이성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병째로 입에 가져다 대고 그 독한 액체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울컥, 컥.


식도를 태우며 넘어가는 58도의 알코올이 곤두서 있던 뇌신경을 폭력적으로 마비시켰다. 타는 듯한 고통 뒤에 찾아오는 몽롱한 쾌감.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 강력한 화학적 작용에, 도훈은 그제야 굽었던 허리를 펴고 가쁜 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 나한텐 이것뿐이야. 저 쓰레기들은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다고.”


위스키 병을 끌어안은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도훈.


천재의 오만함이 알코올이라는 괴물과 결합하여 스스로를 완벽한 밀실에 가두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22층 특별감사팀 집무실.


“실장님.”


박 대리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방금 R&D 센터 1팀과 2팀 실무진 대표급 연구원 세 명이 인사팀에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부서 이동이나 퇴사를 전제로 한 면담이라고 합니다. 백 전무의 기행과 독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지안은 창가에 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우아하게 휘어졌다.


“인사팀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핵심 연구 인력들이 단체로 이탈할 움직임을 보이니, 당장 내일 부사장님께 보고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훌륭하네요.”


지안은 창가에서 돌아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최고급 다기에 따뜻한 허브티를 따랐다. 은은한 향기가 집무실의 서늘한 공기를 데웠다.


아무리 천재적인 수장이라도, 그의 손발이 되어줄 실무진들이 단체로 이탈의 징후를 보이면 윗선(부사장)의 신뢰는 금이 가기 마련이다. 조직 관리 능력 부재. 그것은 대기업 임원에게 있어 실적 저하만큼이나 치명적인 낙인이었다.


“백도훈 전무의 상태는 어떻죠?”


박 대리가 태블릿의 화면을 띄워 지안의 모니터로 전송했다. 도훈의 집무실 컴퓨터에 심어둔 백도어 프로그램을 통해 수집된 웹캠 해킹 영상이었다.


영상 속 백도훈은 넥타이를 반쯤 푼 채, 지안이 선물했던 위스키 병을 옆에 두고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도 그가 완전히 만취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코딩을 하다가 갑자기 모니터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허공에 혼잣말을 쏟아냈고, 다시 술병을 들어 입에 털어 넣기를 반복했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전두엽이 알코올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항복을 선언한 모습.


오직 편도체가 만들어내는 피해망상과 우월감만이 뒤섞여, 텅 빈 집무실 안에서 혼자 섀도 복싱을 하는 가련하고도 흉측한 괴물의 탄생.


“이사회 프레젠테이션이 이번 주 금요일이죠?”


“네. D-3일입니다. 백 전무는 현재 실무진들과의 모든 소통을 단절하고, 본인이 직접 발표 자료와 프로토타입 시연을 세팅하고 있습니다.”


지안은 모니터 속 백도훈의 기괴한 모습을 감상하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이쯤 되면, 사냥감을 몰아넣는 작업은 끝났네요.”


지안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를 구원해주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R&D 센터의 공기는 여전히 냉랭했다. 연구원들은 퇴근 시간이 되기 무섭게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고, 텅 빈 30층에는 오직 백도훈의 집무실에서만 흐릿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똑.


고요를 깨는 규칙적이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지안은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무실 내부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서류 더미와 뒤엉킨 전선들 사이로 짙은 위스키 냄새와 며칠 씻지 않은 퀴퀴한 체취가 진동했다. 백도훈은 소파에 널브러진 채 코를 골며 곯아떨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지안이 주었던 오크 상자의 빈 병이 뒹굴고 있었다.


지안은 코끝을 찡그리지도 않은 채 도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혹은 상처 입은 짐승을 돌보는 성녀처럼 조심스럽게 도훈의 어깨를 흔들었다.


“전무님. 도훈 선배.”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핏발이 선 흐릿한 시야 너머로, 역광을 받아 천사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서지안의 실루엣이 보였다.


“서… 실장….”


“여기서 이러고 주무시면 어떡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지안의 목소리는 어떤 꾸짖음도 없는 순수한 연민 그 자체였다. 도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 다 도망갔어. 이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키워줬더니, 지들이 밥그릇 챙기겠다고 날 고립시키려 들어….”


도훈의 갈라진 목소리에 짙은 절망이 배어 있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 특유의 피해망상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지안은 도훈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보온병을 꺼냈다.


“따뜻한 꿀물입니다. 속부터 좀 달래세요.”


도훈은 지안이 내민 컵을 떨리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따뜻한 단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의 신경이 왈칵 무너지며 코끝이 찡해졌다.


사방이 적이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임원들, 배신을 준비하는 부하 직원들, 그리고 실적을 압박하는 부사장까지. 이 거대하고 잔혹한 정글에서 오직 눈앞의 이 여자, 서지안만이 조건 없이 자신을 챙기고 위로해 주고 있었다.


“서 실장. 당신은 왜…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도훈이 붉어진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안은 꿀물 잔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깊고 다정한 눈빛으로 도훈과 시선을 맞췄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선배의 그 예민하고 파괴적인 천재성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멍청이들이 선배를 미치광이라고 욕해도, 저는 선배가 보여줄 미래를 믿거든요.”


지안은 도훈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도훈은 마치 엄마의 손길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지안의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연구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거, 들었습니다. 인사팀에 면담도 신청했다죠.”


“……그래. 배은망덕한 놈들.”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부사장님께 이상한 소리를 흘리지 못하도록, 제가 감사팀의 권한으로 인사팀의 면담 기록을 동결시켜 두었습니다. 선배의 완벽한 무대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잡음도 새어 나가지 않게 제가 철저하게 막아드릴게요.”


지안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인사팀의 면담 기록을 막은 것은 도훈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훈의 부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사장에게 미리 보고되어 프레젠테이션이 취소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폭탄은 가장 높은 곳, 모두가 지켜보는 이사회 무대에서 가장 화려하게 터져야만 했다.


“고마워… 고마워, 지안 씨. 당신밖에 없어.”


도훈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지안의 손을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타인의 정신을 붕괴시키고 완벽한 의존을 만들어내는 가스라이팅의 예술. 지안은 속으로 찬란한 희열을 느끼며, 다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순은으로 세공된 휴대용 플라스크(Flask)였다.


“이게… 뭡니까?”


“선배의 영감을 붙잡아둘 마법의 부적이죠.”


지안은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어 도훈의 코끝에 살짝 가져다 댔다. 앞서 오크 상자에 담겨 있던 것과 동일한, 58도짜리 최고급 캐스크 스트랭스의 강렬하고 달콤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도훈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며 침이 꿀꺽 넘어갔다.


“모레 금요일. 수백 명의 임원진과 이사회가 모인 대강당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셔야죠.”


지안의 목소리는 사이렌의 노래처럼 치명적이고 유혹적이었다.


“그 수많은 멍청한 눈동자들이 선배를 헐뜯기 위해 쳐다볼 때… 혹시라도 압박감 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려 한다면, 이 부적을 꺼내세요. 아무도 모르게, 오직 선배에게만 허락된 한 모금의 구원이 될 겁니다.”


무대 공포증과 금단 현상이 극에 달할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수백 명 앞에서의 발표는 지옥과도 같다. 지안은 그 지옥의 불길 속에서 그가 견딜 수 있도록 돕는 척하면서, 사실은 무대 위에서 이성을 완전히 끊어버릴 ‘기폭제’를 공식적으로 쥐여준 것이다. 그것도 아주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지지의 형태로 포장해서.


도훈은 홀린 듯이 순은 플라스크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불안정하게 뛰던 그의 심장 박동을 서서히 진정시켜 주었다.


“그래… 이것만 있으면, 이 한 모금만 있으면 난 완벽해질 수 있어. 저 벌레 같은 놈들의 콧대를 완벽하게 꺾어주겠어.”


“그럼요. 무대는 온전히 선배의 것입니다. 저는 맨 앞자리에서 선배의 가장 완벽한 예술을 감상할게요.”


지안은 도훈의 뺨을 한 번 더 다정하게 어루만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푹 쉬시고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나의 천재님.”


집무실을 나서는 지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훈은 품에 안은 플라스크를 생명줄처럼 꽉 끌어안았다.


문이 닫히고, R&D 센터의 어두운 복도로 걸어 나온 서지안의 얼굴에서 자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도축장으로 향하는 돼지의 살찐 목덜미를 바라보는 백정의 서늘하고 텅 빈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불안의 연금술’은 완벽하게 끝났다.


천재의 전두엽은 짐승의 공포에 짓눌려 완전히 마비되었고, 그의 이성은 플라스크 안의 독주에 완벽하게 저당 잡혔다.


“자, 이제 화려한 불꽃놀이를 구경할 일만 남았네.”


서지안은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가오는 금요일, 태성그룹 역사상 유례없는 가장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파멸의 쇼가, 이단심문관의 지휘 아래 찬란하게 막을 올릴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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