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 어나힐레이션 - 전장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의 행진

96명의 오케스트라가 그려낸 미래 전쟁의 서사

by 연구소장
Total Annihilation - 06 - The March Unto Death



1997년, RTS 게임계에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케이브독 엔터테인먼트의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출시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게임플레이가 아닌 바로 음악이었다!


당시 게임 음악은 대부분 신시사이저와 전자음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워크래프트 2》의 전자 악기로 만든 중세 판타지 음악, 《커맨드 앤 컨커》의 인더스트리얼 메탈, 《다크 레인》의 앰비언트 전자음악이 전략 게임의 표준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96명의 실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곡이 게임 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삼성영상사업단이 이 게임을 정식 발매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은 컴퓨터 구매 시 《레이맨》을 번들로 제공해 한국에 레이맨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던, 양질의 해외 게임을 소개하는 중요한 창구였다. 《토탈 어나힐레이션》도 그들이 발굴한 보석 중 하나였다.



젊은 작곡가의 도박

이 혁명적인 음악을 만든 사람은 제레미 소울(Jeremy Soule). 당시 아직 무명에 가까운 젊은 작곡가였다. 《시크릿 오브 에버모어》로 경력을 시작하고, 아동용 게임 음악을 작곡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에게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인생을 바꿀 기회였다.


baVR_TFvIdYDYWtIYGJ7cdz1IetTMmOtkAVorpncvpZ-z7150eKEylwFKshkYlnLt4roAMf2HFlVQGk=w2880-h1200-p-l90-rj 지금은 게임 음악계의 거장이 된 제레미 소울, 저 우수에 찬 눈빛을 보라!


제레미 소울이 게임 제작진에게 라이브 오케스트라 녹음을 제안했을 때,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비용이 천문학적이었기 때문. 하지만 제레미 소울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의 연봉을 담보로 걸면서 말이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1년 동안 무급으로 일하겠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비전에 확신이 있었다. 노스웨스트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의 96명 연주자들이 스튜디오에 모였을 때, 소울에게는 처음으로 완전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전까지 그의 '오케스트라' 작업이란 형제와 함께 악기를 하나씩 겹쳐 녹음하는 수준이었다. 이제 그는 진짜 오케스트라 앞에 서 있었다. 후에 소울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억제되지 않은 열정의 산물이었습니다. 완전한 오케스트라와 처음 작업할 기회를 잡은 젊은 작곡가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시대를 앞서간 게임

사실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음악만 특별했던 게임이 아니다. 이 게임은 1997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술적 도전이었다. 완전한 3D 지형과 유닛, 실시간 물리 엔진, 그리고 무제한에 가까운 유닛 생산.


펜티엄 120MHz, RAM 16MB. 3D 가속기라는 것도 없던 시절, 이 게임을 처음 실행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프레임은 뚝뚝 끊기고, 유닛이 많아지면 화면은 슬라이드쇼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음악은 달랐다. CD에서 직접 재생되는 오케스트라는 어떤 사양에서도 온전히 울려 퍼졌다.


이 게임의 매력은 끝없이 이어지는 물량전에 있다. 다른 RTS 게임이 소규모 부대의 전술적 운용에 집중할 때,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수백 대의 유닛이 동시에 움직이는 전장을 그려낸다. 탱크 부대가 언덕을 넘고, 전투기 편대가 하늘을 가르며, 해안선에서는 함포 사격이 이어진다.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전투. 한쪽을 지원하면 다른 쪽이 무너지는,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


이 게임에는 영웅이 없다. 특별한 유닛도, 화려한 스킬도 없다. 그저 금속과 에너지를 모으고, 공장을 돌리고, 유닛을 생산하는 단순한 반복.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전쟁의 본질이 드러난다. 개인의 용맹이 아닌, 산업과 물량의 충돌.


제레미 소울의 오케스트라는 바로 이런 전쟁을 위한 음악이다. 전자음악이 개별 유닛의 움직임을 강조했다면, 그의 교향곡은 전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만든다. 96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수백 대의 유닛이 충돌하는 광경과 놀랍도록 어우러진다.



전장의 두 얼굴

처음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플레이하던 날 화면 가득 거대한 유닛들이 전진하고, 레이저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귓가에 울려 퍼지던 것은 기계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오케스트라의 격정이었다. 이때 소울의 음악은 전쟁의 두 가지 얼굴을 그려낸다.


먼저 전투가 시작되면 "Brutal Battle"이 몰아친다. 5/4박자의 불안정한 리듬 위로 금관악기가 포효하고, 현악기는 마치 심장박동처럼 급하게 뛰어오른다. 소울은 이 곡들에 대해 "경이로울 정도로 광적인 금관악기 파트와 숨 가쁘게 쏟아지는 현악기"로 특징지었다. "Attack!!!"에서는 끊임없이 부딪치는 심벌즈 소리가 거대한 금속 덩어리들의 충돌을 연상시킨다. "The March Unto Death"가 흐를 때면, 수천 대의 기계 군단이 지평선 너머로 행진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포연이 걷히고 나면, 음악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Licking Wounds"에서 첼로는 홀로 흐느낀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장에서, 남은 것은 상처뿐이라는 듯이. "Where Am I"에서는 오보에와 비슷하지만 더 깊고 우울한 소리를 내는 목관악기가 낯선 행성에 홀로 남겨진 병사의 목소리처럼 울린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채, 별들만 바라보는 그 누군가의.


"Death and Decay"가 흐를 때면, 높은 현악기의 떨림이 차가운 바람처럼 전장을 스친다. 한때 생명이 있었을 곳, 이제는 기계의 잔해만 뒹구는 황무지. 소울은 이 평화 트랙들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불모지"를 표현한 "우울한 추도곡"이라고 묘사했다.



게임이 음악을 듣는 방식

기술적으로도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혁신적이다. 게임은 실시간으로 전투 상황을 분석한다. 평화롭게 기지를 건설하고 있을 때는 조용한 음악이, 적과 마주쳤을 때는 격렬한 전투 음악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더 흥미로운 기능도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 CD를 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CD를 넣으면, 게임이 그 음악을 같은 방식으로 활용했다. 앨범의 앞부분은 전투용으로, 뒷부분은 평화용으로 자동 분류해서 재생하는 방식인데 1997년에 이미 개인화된 게임 사운드트랙의 개념을 구현했던 셈이다.



찾을 수 없는 전설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음악은 게임스팟이 선정한 "1997년 최고의 게임 음악상"을 받는다. 게임 자체도 그해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된다. 이 성공은 게임 업계 전체에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게 되는데 바로 게임 음악도 영화 음악처럼 웅장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전설적인 사운드트랙이 현재 스포티파이나 애플 뮤직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들을 수 없다. 케이브독이 사라지고, 판권이 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법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인데 게임은 스팀이나 GOG에서 구매할 수 있지만, 음악만 따로 들을 수 있는 공식 채널은 없다. 그러니 유튜브에서 듣자



거장의 첫 교향곡

제레미 소울은 현재 게임 음악계의 전설이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이름은 불멸의 반열에 올랐고 《모로윈드》의 신비로운 "Nerevar Rising", 《오블리비언》의 장엄한 선율들, 그리고 《스카이림》의 "Dragonborn"은 게임 음악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테마곡이 되었다. 스카이림 테마는 유튜브에서 수억 회 재생되었고, 전 세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길드워 2》, 《해리 포터》 게임 시리즈, 《발더스 게이트》, 《네버윈터 나이츠》, 《스타워즈: 구공화국의 기사단》 등 그가 손댄 게임들은 하나같이 음악으로 기억된다. 그는 BAFTA 게임 음악상을 수상했고, 클래식 FM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게임 음악을 논할 때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우에마츠 노부오, 《젤다의 전설》과 《슈퍼 마리오》의 콘도 코지와 함께 반드시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제레미 소울이다.


하지만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거칠고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후기 작품들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스타일과 달리, 이것은 젊은 예술가가 처음으로 거대한 캔버스를 손에 넣었을 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절제보다는 열정이, 섬세함보다는 웅장함이 앞서는 음악.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플레이해본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한다. 거대한 로봇 군단이 충돌할 때 울려 퍼지던 금관악기의 포효를, 전투가 끝난 후 황량한 벌판에 흐르던 첼로의 한숨을. 그것은 게임 음악이라기보다는, 미래 전쟁을 목격한 누군가가 쓴 일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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