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한국대병원 외상센터 당직실]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외상 외과 펠로우 3년 차 정혁은 당직실 철제 캐비닛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찌그러진 문짝이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왜 또 그래, 정 선생." 쪽잠을 자던 마취과 전문의 이지영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원무과에서 또 전화 왔어요. 아까 그 오토바이 사고 환자, 보호자가 없는데 왜 비싼 검사 돌렸냐고. 삭감되면 제 월급에서 깔 거냐고 지랄을 하잖아요, 지랄을!"
정혁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보험 적용 여부가 중요합니까? 강 센터장님 계실 때는 이런 일 없었는데... 그분 돌아가시자마자 병원 놈들이 아주 대놓고 무시를 하네요."
강진혁 센터장. 그들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미친개'. 그가 헬기 사고로 사망한 지 고작 3개월. 외상센터는 이미 공중분해 직전이었다. 지원금은 끊겼고, 인력은 줄었으며, 남은 사람들은 번아웃(Burnout)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직서 낼 겁니다. 이번엔 진짜예요." 정혁이 품 안에서 꼬깃꼬깃한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그때였다. 벌컥-!
노크도 없이 당직실 문이 열렸다. "누, 누구세요?"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좁은 당직실을 가득 채웠다. 조폭인가? 장기밀매 조직? 정혁이 본능적으로 메스를 찾으려 두리번거릴 때, 무리 뒤에서 중년의 신사가 걸어 들어왔다.
기름진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 구원교 장로 김석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대병원 외상팀 여러분." 김 장로가 명함을 꺼내 정혁에게 건넸다.
[천명 의료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사무총장 김석훈]
"천명? 처음 듣는 곳인데..." "아직 설립 전이니까요.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혁 선생님, 이지영 선생님, 그리고 수술실 박미선 선생님까지. 저희 재단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정혁이 코웃음을 쳤다. "스카우트요?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갑니까? 그리고 저희는 지금..."
탁. 김 장로가 들고 있던 007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열었다. 순간 당직실의 공기가 멈췄다.
"억..." 누런 5만 원권 다발. 띠지로 묶인 현금 뭉치가 가방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이닝 보너스(Signing Bonus)입니다. 인당 5억. 세금은 저희 재단에서 대납합니다."
정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5억이면... 펠로우 월급으로 10년을 숨만 쉬고 모아야 하는 돈이다.
"연봉은 현재의 5배. 주 40시간 근무는 보장 못 하지만, 수술에 필요한 모든 권한과 법적 보호를 약속드립니다."
"사, 사기 치지 마세요! 요즘 세상에 이런 조건이 어디..."
김 장로가 웃으며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 "정혁 선생님. 지난달 의료 소송 건 때문에 골치 아프시죠? 술 먹고 난동 부린 환자가 처치 늦었다고 고소한 거."
정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저희 법무팀이 방금 그 고소 취하시켰습니다. 합의금 넉넉하게 드렸고, 무고죄로 역고소 들어갈 준비도 끝냈고요."
"..."
"이지영 선생님. 남편분 사업 빚 때문에 가압류 들어오기 직전이죠? 그거 저희가 채권 매입했습니다. 이직하시면 빚, 탕감해 드립니다."
"..."
침묵. 압도적인 자본의 폭력 앞에 외상팀 의료진은 넋을 잃었다. 이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이자, 동시에 악마의 유혹이었다.
김 장로가 사직서가 놓인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 사직서, 원무과에 던지고 나오시죠. 리무진 대기시켜 놨습니다."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병원장이 누구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 겁니까?"
김 장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만나보시면 압니다. 아주... 특별한 분이시거든요."
[경기도 외곽, 구원교 성지 '천명원']
고급 리무진 버스에서 내린 정혁과 팀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병원이 아니라 궁전이었다. 거대한 대리석 건물, 잘 가꿔진 정원,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파헤치고 있는 포크레인과 인부들.
"저기, 여기 병원 맞아요? 십자가가 좀 이상하게 생겼는데..." 수간호사 박미선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사이비 종교 본거지 같은데..." 이지영이 소름 끼친다는 듯 팔을 문질렀다.
"어서 오십시오!" 흰 옷을 입은 안내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의 눈빛은 지나치게 친절했고,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 열광적이었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잘못 왔다. 이건 장기 적출이다.'
도망치려던 찰나, 김 장로가 그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이사장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2층 대회의실로 가시죠."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대회의실. 거대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자, 안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 명품 슈트가 아닌,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한 손에는 덤벨을 들고 있었다. 아이돌처럼 곱상한 외모. 하지만 눈빛만큼은 묘하게 날카로운 남자.
천이환(강진혁)이었다.
"왔어?" 내가 덤벨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숨이 찼다. 저질 체력 탓에 덤벨 몇 번 들었다고 팔이 후들거렸다.
"당신이... 이사장입니까?" 정혁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들을 훑어봤다. 3일 감지 못한 머리, 퀭한 눈, 꼬질꼬질한 셔츠. 반갑다. 저게 진짜 외상 외과 의사의 꼴이지.
"앉아. 설명은 김 장로한테 들었지? 계약서는 여기 있고." 나는 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 뭉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정혁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돈 많이 주는 건 알겠습니다. 빚 갚아준 것도 고맙고요. 근데..."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긴 병원이 아니잖습니까. 종교 단체 아닙니까? 저희를 데려다가 뭘 하려는 겁니까? 신도들 앞에서 기적 쇼라도 벌이라는 겁니까?"
역시, 내 제자답다. 돈보다 자존심이 먼저인 놈.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네?"
"말로 해선 안 믿을 표정들이네. 보여줄 게 있으니까 따라오라고."
나는 앞장서서 걸었다. 김 장로와 경호원들이 뒤를 따르고, 쭈뼛거리던 의료진도 어쩔 수 없이 내 뒤를 밟았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건물 지하 1층, 원래는 대규모 집회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먼지가 날리는 공사장 한복판. 그곳에 거대한 나무 상자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이지영이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내, 가장 가까이 있는 상자의 포장을 북 찢었다. 나무 합판이 뜯겨 나가자, 은색으로 번쩍이는 기계의 자태가 드러났다.
"헉...!" 정혁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Siemens SOMATOM Force CT] 현존하는 CT 중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는, 대학병원에서도 예산 때문에 한 대 들여놓을까 말까 한 최고급 장비.
"이, 이게 왜 여기에..."
나는 대답 대신 옆에 있는 상자들도 연달아 뜯었다. [Da Vinci Xi (수술용 로봇)] [ECMO (체외막산소공급장치) - 10대] [하이브리드 수술실용 Angio 장비]
박스 뜯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의료진의 눈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들은 의사다. 이 장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박스 하나하나가 얼마짜리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여기 있는 거 다 합치면 500억쯤 되나?" 내가 무심하게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죠? 이거 진짜..." 수간호사 박미선이 떨리는 손으로 에크모 장비를 어루만졌다.
"이건 시작이야. 2층엔 MRI실 만들고 있고, 옥상엔 헬기장 공사 중이다." 나는 정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저번에 수술하다가 C-arm(이동형 엑스레이) 고장 나서 환자 배 열어놓고 30분 동안 대기했지? 그때 뭐라고 했어. '돈만 있었으면 이딴 고물 갖다 버렸을 텐데'라고 욕했잖아."
정혁이 흠칫 놀랐다. 그건 수술실 안에서, 그것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욕했던 건데 이 남자가 어떻게 아는가.
"여긴 고물 없어. 전부 새거야.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고 새로 사면 돼. 돈은 썩어 나니까."
나는 그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신도들 앞에서 쇼? 아니. 나는 너희한테 딱 하나만 요구해."
내 눈빛이 변했다. 사이비 교주의 아들 천이환이 아닌, 외상센터장 강진혁의 눈빛으로.
"살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돈 걱정, 삭감 걱정, 법적 책임 걱정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그냥 환자 심장만 뛰게 만들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까의 무거운 침묵과는 달랐다. 그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의사라면, 특히 생사를 다루는 외상 외과 의사라면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 무제한의 지원. 그것은 그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유토피아였으니까.
"......조건이 뭡니까." 정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건?"
"세상에 공짜는 없잖습니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 정체가 뭐예요?"
나는 씨익 웃었다. 정체를 밝히는 건 아직 이르다. 빙의라니 뭐니 해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내 취미 생활."
"네?"
"돈 많은 백수의 건전한 취미 생활. 사람 살리는 게 골프 치는 것보다 재밌을 것 같아서."
나는 그들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도장 찍어. 오늘부터 여기가 너희들의 새로운 직장, '천명 외상센터'니까."
그때, 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팀 빌딩(Team Building)] - 조건: 전문 의료진 3명 이상 영입 - 진행도: 3/3 (달성 임박) - 보상: 스킬 <통솔의 카리스마(C)> 개방
정혁이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품에서 볼펜을 꺼냈다. "미친 짓인 거 아는데... 이 장비들 보고 그냥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네요."
그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뒤이어 이지영과 박미선도 홀린 듯 도장을 찍었다.
[퀘스트 완료!] [보상 지급: <통솔의 카리스마(C)> 획득] [이제 당신의 말에 '무게감'이 실립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환영한다. 지옥... 아니, 천국에 온 걸."
그 순간, 김 장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성자님! 큰일 났습니다!"
"왜. 헬기 계약 파토났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지금 정문 앞에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경찰?"
"네! 실종 신고가 들어왔답니다. 어제 성자님이 데려오신 그 119 구급대원... 아니, 환자분 가족들이 납치 신고를 했다고...!"
아, 맞다. 어제 헬기 추락 사고 때 나랑 같이 이송되던 환자. 교단 병원으로 빼돌리느라 정식 절차를 안 밟았지.
나는 정혁과 팀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역시 납치범이었어!'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첫 출근부터 경찰서 구경이라니, 아주 스펙타클하네.
"김 장로." "예!" "변호사 불러. 그리고..."
나는 바닥에 놓인 가운을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쳤다. "내과 가서 그 환자 차트 가져와. 경찰이고 나발이고, 회진부터 돈다."
"예?"
"의사가 환자 보러 가는데 경찰이 뭔 상관이야. 막으면 다 썰어버려."
나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정혁이 헛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미친놈한테 제대로 걸렸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나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공범이었다. 생명을 살리는, 아주 비싼 공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