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한 열다섯번째 여행지 ㅣ #4. 캐나다 캘거리
여행지에서의 운전은 유독 긴장을 동반한다. 수년 전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를 경험했던 나는 트라우마로 장거리 운전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운전대를 잡는 것은 항상 매튜인 편이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늘 어깨를 단단히 움츠리고 있는 건 내 쪽이다.
"또 긴장했구나. 왜 이렇게 긴장해. 캐나다는 운전하기 정말 편한 곳이야. 편히 있어." 매튜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운전자 좌석이 반대인 것도 멜버른처럼 오직 그곳에서만 지켜야 하는 빙글턴 같은 법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길은 널찍하고 차량도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운전자가 양보 운전을 한다.
내비게이션이라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같은 길을 뱅뱅 도느라 반나절을 다 보냈을 우리는 길치 중에서도 매우 심한 길치에 속한다. 요즘은 구글맵이 있어 해외에 나와서도 "30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하는 구글이의 친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낯선 길 위에서 생소한 지명의 표지판들을 볼 때면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캘거리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은 이제 대자연의 로키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캘거리 시내만 해도 높이 솟은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20여 분만 도심을 벗어나도 전혀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자연이 빚은 지반에 정비한 도로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침엽수로 둘러싸인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는듯한 오름세의 길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다. 꼭 하늘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조금씩 로키의 심장부로 들어간다. 길을 가다 만나게 되는 동물들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도로를 달리다 차들이 줄지어 서 있으면 둘 중 하나다. 인생 사진을 건질만한 포토존이거나 산에서 내려온 동물친구들을 보기 위한 것. 한 번은 사슴 사진을 찍던 한 아저씨와 사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길을 가던 사람이 차를 멈추고 거리를 두라며 큰 소리로 경고를 한 적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 곳 캘거리의 동물들을 지키기 위한 오지랖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슴들이 놀라거나 다칠 수 있으니 거리를 두라는 것이었다. 대자연을 지키기 위한 이 곳 사람들의 의식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이후론 우리도 길을 가다 사슴이나 말 등 동물들을 만나면 더욱 숨을 죽이고 먼발치에서 지켜보곤 했다. 드라이브 중 문득 캘거리의 이런 풍경들이 멜버른의 자연과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연을 가로지르는 도로, 아스팔트 길 위를 활보하는 대자연의 주인들,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광활하게 뻗은 초록들이 그랬다. 한편, 닮은 듯 다른 부분들도 있었다. 캐나다의 로키는 완전한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면 멜버른의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울타리 앞에서 자연을 관망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캐나다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세 시간 가까이 재잘재잘 대던 서연이도 긴 드라이브에 잠이 든 사이 매튜가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너는 참 이타적인 사람이야. 모두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고 친구도 잘 사귀잖아. 어른이 되어서 그런 관계를 만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 "그래?" 갑작스러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뒷 말이 가관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나한테만 친절하지가 않지?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것 같은데. 아 또 있다. 엄마." 정곡을 콕 찔린 것 같은 맘에 당황스러워 한 차례 웃어젖히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거 어떻게 알았어? 언제부터 알았지?" "모르겠냐." 억울한 표정의 매튜가 말했다.
"근데 그거 왜 그런지 알아? 말해줄까?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그래. 난 항상 누군가를 리드하는 편이었잖아. 친구들 사이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그런데 당신한테만은 내가 기댈 수 있는 거야. 그래서 힘들면 힘든 대로 짜증 나면 짜증 나는 대로 꾸밈없이 나를 드러내게 되는 거야. 상대적으로 당신한테는 투정도 잘 부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것처럼 깊게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조금 미안할 때도 있는데 내가 그러려고 당신이랑 결혼한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조금 억지스러운 말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매튜는 이내 웃었다. "그래, 난 무슨 죄냐. 내 팔자야." 매일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조금씩 쌓아왔던 서운했던 마음들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이따금 가장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백미러에 담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어느새 꾸밈없는 자연 속 긴 시간을 달려 캔모아에 닿아 있었다.
글과 사진 | B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