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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구루 Jan 08. 2017

긴 터널의 끝

버려지는 경험은 없다



인생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나의 이십 대는 하향곡선 어디쯤 낮은 포물선에 얹혀있을 것이다. 이대로 놀기만 하면 무엇이 될까 두려움이 엄습하던 밤 처음으로 책을 펴고 낯선 단어들을 들여다본 것이 열아홉 봄이었다. 늦게 시작한 벼락치기로 대학 입학은 했지만 염치없이 너무 오래 또 많이 놀았던 것일까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보아야 했다.



"입학금은 엄마가 도와줄게 너희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다음 등록금부터는 스스로 마련해봐 그렇지만 힘들면 언제든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는 선전포고를 했고 나는 어떻게든 나의 이십 대를 스스로 헤쳐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고생한 엄마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그리고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학기 중에도 늘 3~4가지 알바를 병행해야 했다. 친구들이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가능했다. 동아리를 신문사로 선택하면서 신문이 발행될 때마다 기사별 일부의 원고료를 받았다. 공강 시간이면 중앙회관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에서 캐셔를 하며 감자튀김을 만들어냈고 수업 후엔 근처 마트의 의류매장에서 알바를 했다.



거기에 학기마다 턱걸이로 나오는 부분장학금까지 더하면 등록금은 물론 매월 생활비까지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비정기로 하는 교수님의 전공서적 번역이나 전문과외를 주업으로 하던 선배의 모의고사 출제작업 지원을 더하면 학생 신분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상당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너무 순진하고 천진했던 나의 10대에 약간의 죄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떤 목표도 계획도 세울 줄 몰랐던 10대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의 20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다이어리엔 항상 빽빽하게 한 주와 한 달의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고 머리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적어도 무엇도 되지 못했다는 말이 듣기 싫어 보란 듯이 무엇이라도 되어보겠다는 목표의식을 가졌던 때였다.



고장 난 기차처럼 열심히 질주하던 시기였다. 그나마 학기 중이면 수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스케줄 조율도 하고 틈틈이 친구들과의 시간도 즐길 수 있었지만 방학이 되면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메인 알바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무 살부터 알바를 시작했던 나는 그저 돈만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생각하면 너무 구차하고 슬플 것 같아 나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종류의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학기 중엔 학교 안에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기에 정기적으로 하던 신문사/학생회관의 패스트푸드점/교수님의 원고 번역과 같은 일은 예외로 하고 적어도 방학 중 하는 일은 매번 다른 종류의 것을 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졸업반이 되어 취업 준비를 위해 모든 알바에서 손을 놓기 전까지 실제로 그렇게 경험한 알바를 세어보니 스무 가지가 넘었다. 배스킨라빈스/간판가게 사무/무역회사 사무/VIPS재료공장/달력공장/휴대폰 대리점 판매/마트 사은품 판매/호프집 서빙 등 셀 수 없이 많은 일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무리하게 달려가던 어느 날은 어지러움에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이 오기도 했고 학교에서 혼자 머물며 방학 알바를 이어가던 어느 날은 '왜 나는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닐 수 없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했다.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자주 하던 시기였다. 스물두어 살에 불과했던 한껏 꽃을 피워 올릴 싱그러운 여대생이 하기에는 다소 무겁고 암울했던 문장들이었다.



방학 알바를 이어가던 어떤 하루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는 사는 게 재미가 없는 것 같아 너무 힘들고 너무 지치고 이렇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것일까 그냥 가끔은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어." 늘 씩씩한 모습에 투정 부릴 줄 몰랐던 딸이 수화기 너머로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그 길로 차를 몰아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는 너에게 알바를 강요한 적 없어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처음에 얘기했듯이 힘들면 언제라도 엄마한테 얘기했어야지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다 내려놓고 엄마랑 집에 가자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집에서 그냥 놀아." 그러나 당시 진행하던 알바가 있었던 나는 결국 엄마를 따라가지 않은 채 약속했던 기간 알바를 끝내고 학기로 복귀했다.



그해 여름 지독한 독감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나와 수화기 너머 엄마의 가슴을 베었을 칼 같은 나의 투정이 아스라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나의 이십 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긴 터널에도 끝은 있었다. 나의 화려한 알바 이력은 졸업하던 해 입사원서에 그대로 쓰여졌다. 날 것의 생생한 단어들은 수북하게 쌓인 원서들 가운데 반짝였을 것이었다.



면접에 들어가서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스무 가지가 넘는 알바를 경험하며 뻔뻔함을 장착한 이후였고 거짓말이 아니었던 나의 체험기는 어떤 질문에도 답해낼 수 있는 에피소드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졸업 후 가장 들어가고 싶었던 대기업의 합격 명단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어제였다. 긴 터널을 통과하며 나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며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웠다. 세상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과 비천하게 대우받을 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남의 돈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오롯이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절대 얻을 수 없음을 반드시 몸을 움직여 도전해야 하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아야만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난했던 나의 이십 대가 말해주었다. 세상에 버려지는 경험은 없다고.  






글과 사진 | B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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