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여행자의 시간 I : 겨울에 떠나는 미국 서부 로드 트립
피닉스의 호텔에서는 새벽까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 파티가 계속됐다. 건물을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에도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단잠을 잤다. 해가 밝아오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피닉스의 아침이 찾아왔다. 오늘은 우리의 미서부 로드 트립 대장정의 마지막 밤을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보낼 예정이었기에 서둘러 짐을 꾸려 체크아웃을 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는 캠핑카에서 마지막 밤을 머물기로 되어 있었기에 아이가 가장 기대했던 날이기도 했다.
조슈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워낙 커서 차를 타고 둘러보아도 하루가 모자랄 것 같은 광활한 대지를 갖고 있었다. 하늘 높이 뻗은 가지각색의 조슈아 트리로 가득 찬 광활한 사막, 다양한 모양을 한 선인장과 바위들이 들어찬 풍경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어서 더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공원 내부에서는 특별히 뷰포인트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쉽게 명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국립공원을 찾은 다른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고 따라 세우면 그곳에 항상 진귀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골바위나 키스뷰, 선셋 포인트까지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의 다양한 뷰포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다른 차량들을 따라 내린 한 뷰포인트에서 어김없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그곳에 꼭 밤송이처럼 생긴 선인장들이 땅에 가득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밤송이를 똑 닮은 선인장이 신기했는지 그중 하나를 발로 밟았는데 쉽게 떨어질 줄 알았던 선인장이 엄청난 접착력으로 신발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의 발에 붙은 선인장을 떼주려고 내 발을 갔다 데니 이번에는 밤송이 같은 선인장이 내 발로 옮겨 붙었다. 어찌나 힘이 세고 접착력이 강한지 가시가 신발 밑창을 뚫고 발바닥을 찔러 올 정도였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선인장 가시를 결국 손으로 하나하나 뽑아낸 후에야 가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밤송이처럼 생긴 선인장에 혼쭐이 난 후엔 마음이와 초코가 선인장을 밟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며 걸음을 옮겼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긴장을 놓고 늦장을 부리다 밤이 되어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따라 국립공원 근처에 정박된 캠핑카를 찾느라 애를 먹어야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캠핑카를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덩그러니 놓인 캠핑카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지만 조심스레 차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캠핑카 안은 바깥 온도와 다를 바가 없을 만큼 추웠고 씻을 수 있는 공간은 작은 세면대가 전부였다.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캠핑카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했는데 겨울밤의 캠핑카는 기대와 많이 달랐다. 그래도 아이는 처음 경험해보는 캠핑카가 좋은지 신이 나 보였다. 간단히 전기 포트로 물을 데워 컵라면을 먹고 양치를 한 뒤 바로 침낭을 펴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캠핑카 안은 너무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어 1월 1일이 되어 있었다. 아이도 덜덜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기에 새해 다짐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엄마의 새해 다짐을 먼저 들려 달라기에 나의 첫 번째 다짐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게 되는 것. 두 번째는 우리가 미국에서 보낼 시간들을 책으로 써서 출판하는 것. 세 번째는 가족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한 사람씩 새해 다짐을 이야기할 때마다 가족 모두가 침낭 속에서 두 팔을 꺼내 열심히 박수를 쳤다. 입을 열 때마다 입 속에선 하얗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모두의 새해 다짐 발표가 끝난 뒤 좁은 캠핑카 안에 사람 셋과 개 두 마리가 몸을 꼭 붙이고 나란히 누워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너무 추워 새벽에 몇 번이고 잠에서 깼지만 다행히 얼어 죽지 않고 아침을 맞이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호간이 나으냐 캠핑카가 나으냐로 갑록을박을 했다. 정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의 극한 체험이었다. 아이는 호간과 캠핑카 둘 다 너무 좋아서 어떤 것을 고를지 어렵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두 곳 모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여행은 다르게 적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