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하늘을 보는데 필요한 시간

아이와 함께한 일곱번째 여행지 | 호주 시드니 #3

by B구루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수시로 꺼내어보게 되는 순간들은 의외로 아주 사소한 시간들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오슬로 백야 대낮처럼 환한 밤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시던 맥주 한 잔이 그랬고 코펜하겐 시내에서 인어공주 동상까지 바람을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타던 시간이 그랬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에 올라 내려다보던 붉은 지붕들이 그랬고 로마의 좁은 골목에 앉아 먹던 천국 같았던 아이스크림 맛이 그랬다. 시드니에서는 하이드파크 공원에 누워 그림 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10분이 그랬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떠오르는 그래서 몇 번이고 되새기게 되는 장면은 다름 아닌 시드니의 하늘이었다.



시드니에서의 둘째 날 현지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시내 무료 투어를 하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시드니 사람들의 분주한 풍경 속에서 오늘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자로 그들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설레어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대학생처럼 보이는 풋풋한 얼굴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시드니 시내를 가이드해드릴 머뭄투어의 애덤입니다. 지금부터 시내를 거닐며 세 시간 정도를 함께 할 건데요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실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지만 시답잖은 농담도 곧잘 해가며 시내 곳곳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에게 익숙해질 즈음 세인트 대성당과 뉴사우스 웨일스 주립 미술관을 지나 울루물루 핫도그로 허기를 때우고 하이드파크에 다다랐을 때였다. 가이드 애덤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두 시간 넘게 걷느라 많이 힘드셨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소 하이드파크에 도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인데요. 잠시 신발을 벗어 보시겠어요? 여기서는 10분 정도 누워서 쉬어가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0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누워서 하늘 보시는 거예요~ 선곡은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해보겠습니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투어를 위해 모인 9명의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벗고 잔디에 누웠다. 다행히 아이가 유모차에서 잠이 든 때여서 매튜도 나도 그늘 한편에 유모차를 세워두고 다른 이들처럼 등을 누일 수 있었다. 곧이어 애덤이 선곡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모인 이들 모두가 하늘을 마주한 채 말없이 햇살을 누렸다.





시드니에 와서 처음 올려다본 하늘이었다. 아니 언제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랜만에 마주 보는 하늘이었다. 나른한 오후 딱 이만큼 따뜻했으면 싶은 햇살이 공원을 가득 비추고 있었고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호주로 날아오며 기대했던 것은 이런 여유였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느리게 걷는 시드니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빠르게 걷는 것은 우리들이었다. 여행지에서 조차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여유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





10분이면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을 보는 시간. 그런 여유를 부리는데 익숙지 못했던 우리였던 것이다. 몇 곡의 음악이 흘렀을까. 깜박 잠이든 이도 있었고 하늘을 보다 일어나 맨발로 공원 이 곳 저곳을 거닐어 보는 이도 있었다. 나도 그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나른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애덤이 말했다. "어떠셨어요~ 제가 가이드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이 있는데 이 곳에 오시는 분들께 꼭 이런 시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었어요. 한국은 너무 바쁘잖아요. 어려운 게 아닌데 이렇게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여행을 정말 풍성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자 이제 요 앞으로 걸어가 써큘러키 앞에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가이드를 해준 애덤에게 모두가 돌아가며 말했다. "정말 좋네요." 그 말을 들은 풋풋한 청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써큘러키에 다다라 일행과 헤어진 후 맨리 비치로 향하는 배 안에서 매튜에게 말했다. "정말 좋더라. 가끔 하늘을 봐야겠어. 그치?" 매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생각보다 정말 좋았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토록 사소한 10분이었을지도.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일상에서도 종종 하이드파크에서 바라본 하늘이 꿈처럼 문득문득 떠올랐다.





맨리비치에 도착해 잠에서 깬 아이에게 아이스크림 한 컵을 사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이 된다. 행복은 이토록 사소한 순간에 있었다.







글과 사진 | B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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