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속일지라도 누구보다 소중한 그대, 쉽게 절망하지 마시길
유쾌하고 신나는 전형적인 뮤지컬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는 순간순간 울컥한 감정이 밀고 들어왔다.
분명 등장인물들은 빠른 리듬에 맞춰 과장된 동작과 함께 목청껏 자신의 감정을 담은 노래를 하고 있는데,
윤복희의 <여러분>이 귀 근처를 맴돌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카드 뉴스 형식으로 자주 돌아다녀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구절이 계속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가 그렇듯 영화 <프롬> 역시 꿈과 희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지만, 영화 속 노래를 하는 이와 듣는 이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까지 그 어느 때보다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되었듯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에.
한 소녀에게 조금은 특별한 '프롬'을 만들어 주기 위해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애리조나로 무작정 향하는 여정의 중심에는 디 디 알렌(매릴 스트립 분)이 있다. 이미 그는 수많은 작품들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토니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브로드웨이 대표 스타이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조금씩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오랜 동료인 베리 (제임스 코든 분)와 야심 차게 준비한 새로운 작품에서 인격모독에 가까운 혹평까지 받기에 이른다. 화려한 불빛이 자신을 감싸는 것에만 익숙했던 디디였기에 자신을 향한 대중과 평단의 홀대가 참을 수 없었던 디디는 이미지 반전을 꾀 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되고, 그러던 중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졸업파티인 프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시골 소녀 에마(조 엘런 펠먼 분)의 이야기를 SNS를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된다.
유명 배우라는 위치가 가진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비교적 쉽게 에마에게 프롬을 찾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디디와 그의 동료들은 시작부터 생각보다 견고한 '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벽에 부딪힌다. 특히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뉴욕 브로드웨이 출신인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조건 옳아!'라는 과한 자기애적인 태도와 '그러니 무조건 수용해!'라는 막가파식 해결책은 보수적인 애리조나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더더군다나 조금은 불순했던 그들의 의도(에마를 도와 이미지 변신을 꾀하려 했던) 역시 영화의 중요한 갈등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디 디와 그의 동료들은 에마에게 잃어버린 프롬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아니 에마는 자신의 프롬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호기롭게 시작하였지만 사실 디디와 동료들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프롬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에마만큼이나 자신의 코가 석자인 상황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정상에서 내려오는 연습을 해야 하는 디디는 말할 것도 없고 베리 역시 아직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자신이 만족할 만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부모와 연을 끊고 살고 있다. 동료들 중 가장 합리적이며 적극적인 앤지(니콜 키드먼 분) 또한 여전히 코러스에만 머물며 자신이 가진 역량을 마음껏 뽐낼 기회 조치 얻지 못하고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 친구, 학교, 지역사회로부터 배척되고 있는 에마에게 포기하지 말라며 끊임없이 조금은 과할 정도로 격려 아닌 격려를 하고 있지만, 사실 디디와 그의 동료들 역시 에마 못지않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간절히 원했지만 마음껏 받지 못했던 위로만큼 에마에게 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좌절을 겪고 있는 여고생의 성장이 주된 줄거리인 이상 영화의 결말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프롬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미 정해진 결말로 향하는 그 과정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분명 영화의 시작은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에마의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스스로 프롬 원정대를 꾸려 떠나는 것이었지만 영화 후반부 극의 중심이 되어 '자리'를 찾는 이는 에마이다. 부모와 학교의 외면으로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에마는 스스로 자신이 서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맞는 설계 역시 직접 한다. 그 과정에서 디 디의 프롬 원정대는 에마와 한발 멀리 떨어져 에마가 오롯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판'만 마련해 줄 뿐이다. 결국 영화의 시작은 프롬 원정대였지만 영화의 완벽한 피날레를 만드는 것은 끝까지 절망하지 않은 에마 자신인 것이다.
에마를 도와주고 이미지 변신을 꾀하려 했던 프롬 원정대는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에마를 보면서 자신들의 삶을 반추한다. 억울하고 서러웠던 과거 그리고 여전히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풀리지 않은 난제들로 가득한 현재. 그럼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에마만큼이나 여전히 자신들의 미래에도 많은 가능성과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을 거라는 확신까지.
앞으로도 세상이 당신들을 끊임없이 속일지라도 지금처럼 그래 왔듯 앞으로도 쉽게 절망하지 마시길.
아직도 여전히 당신들은 이루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