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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주 Aug 22. 2023

no를 해도 되는데

나는 뭔가를 거절할 때, 그냥 거절하기 힘들어했다.

예를 들면, 먹고 싶지 않은 메뉴밖에 없는데, 이미 그 가게에 들어와 테이블을 잡고 앉아 버려서. 가끔은 주변 인간관계에서 나에게 뭔가를 기대해, 그 기대에 부응해 no를 말하지 않거나, 상대방이 심심해해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거나.아니면 거절을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왜 거절을 하는지, 상대방은 묻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에게 변명을 늘어놓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거절을 할 때 미안해서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는 결국 그 상대방에게 거절을 당하거나, 그 상대방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또한 나의 생각이고 짐작이며, 그것이 나의 과거, 어느 순간으로부터 생겨 키워온 두려움이더라도,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선택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좀 살아 그냥.

이 말은 어디선가 들어봤지만, 나에게는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여행을 하는 동안 파트너 장이 하는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고 지켜봐 왔다. 평소 사람 관찰하기 좋아하는데, 장은 세계보물급의 친화력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어딜 가도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들리고, 조금 요란스럽다. 해변가에 누워있으면 저 멀리 헤엄치러 들어간 장의 말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는 특히나 알아채기 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그와 있는 분위기에 편안해하고 재미있어한다.

그 친절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나는 무언가를 잘 권유하지도 못했다. 내가 대답하기 힘들어하니 상대방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그런데, 장을 통해서 보니 누군가에게 권유하는 것도 재미가 있어 보였다.


예를 들어, share dinner. 호주에서는 여러 명이 모여 여행하거나, 한 집에서 지낸 적이 많았는데, 그럴 때 우리는 다 같이 음식을 만들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자연스레 내가 만든 음식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권하고 나눠주는 순간이 생겼다. 가끔은 친구들이 다 내가 만든 음식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거절할 때, 그냥 no thank you라 하고,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더라.

상대방이 거절한다고 해서 괜히 상처받는 것도 아닌데 나는 늘 yes 하기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우리 애는 편식하지 않고, 뭐든 잘 먹어요 처럼 말이다.


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미 한 번 거절당해도, 나중에 웃으면서 한 번 또 권한다. 혹시 나중에라도 이 친구가 원할지도 모르니까. 아님 그냥 도전하는 건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의 권유가 참 멋있어서 배우고 싶었다.



최근에 발견한 나의 팁은 남들을 신경 쓰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 기울이는 습관들이 생겨났다. 뭔가를 하지 말아야지 하면 군것질을 많이 먹지 말아야지 처럼 생각보다 실천이 안 되고, 마음에 와닿지 않다고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왜 힘든지, 왜 어려운지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려 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게 나에게는 너무 큰 일이어서, 관계 속에서 쉽게 드러나곤 했다.


남의 판단에 앞서,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결정과 그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이를 위해서는 결국, 찾으려면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는 나의 자질들, 나의 관습들, 나의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찰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자신을 많은 성격과 유형으로 나누어서 남들과 스스로에게 설명해오곤 했다.

가령,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피곤해하는 성격이라서 자제해야지. 또는,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서 저녁에 일찍 자야지. 나는 전갈자리여서 남들한테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아 등등. 나를 무언가로 분류하는 버릇이 많았고, 이는 나의 과거로부터, 나의 기억이 쌓아 올린 관습이었다.


자꾸 나만의 기준과 판단을 키워가기만 했다. 너무 많은 것에 의미를 두고, 너무 많은 것에 완벽해지려다 보니까, 스스로에 대해 철저해짐과 동시에 남에게도 철저해졌고, 예민해졌으면서, 내 기준에 있는 ‘철저한 완벽주의자’로서 언제나 친절해야 했다.

사실, 조금 다르다고 해서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싫고 좋아함이 어디 옳다 나쁘다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이 세상,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순간이 교차하는데, 이를 하나하나 기준에 맞게 완벽해지려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누군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나는 뭔가를 놓치는 것도 아니고, 뭔가에 실패하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가 나 하나를 싫어하더라도, 세상은 너무나 잘 굴러가기만 한다.

여자친구로서, 누나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선생님으로서, 너무나 많은 ‘로서’의 기대감 아래,

우리는 잠깐 생각이 많아지는 게 아닐까.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한 선술집을 가게 되었다. 엄청 배고픈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배고픈 상태였고, 친구도 그러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집에 규칙이, 무조건 2개 이상 메뉴를 시켜야 된다길래, 그게 싫어서 단칼에 나갔다. 이상하게 예전에는 괜히 눈치 보면서, 마음이 딱히 끌리지 않는데도 거기 규율에 맞춰 선택했을 것 같다. 사람들 많은 테이블을 뚫고 짐을 들고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사소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 no의 순간이 좋아서.


Blue mountain, NSW, Australia.  잠옷만 입고, 신발도 없어 너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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