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알게 된 것
이사를 하고 집을 정리하다 보니 물건의 자리가 계속 바뀐다. 매일 한 구역씩 집중해서 정리하고 있다. 이번엔 부엌이었다. 하루 중 가장 자주 드나들고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이다 보니 동선에 맞게 잘 정리하고 싶었다.
다용도실 바로 옆 수납장 자리에 식기세척기를 두고, 그 위 상판에는 정수기를 올려놓았다. 곧 정수기 설치 기사님이 오시기로 한 터였다. 당연히 정수기는 그 자리라고 생각했기에 바로 위 수납장에는 컵과 텀블러를, 나머지 수납장에는 그릇과 접시, 반찬통을 차례로 배치해 두었다.
그런데 기사님이 오셔서 부엌을 한번 둘러보시더니 이곳에는 설치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 자리에 콘센트가 없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고민하다 결국 콘센트가 있는 반대쪽으로 옮겨 설치하기로 했다. 정수기를 설치하려면 상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야 했는데, 마침 인덕션 사용을 위해 가스 막음 조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베테랑 기사님은 가스 밸브를 잠그고 가스레인지와 배관을 들어낸 뒤, 그 자리를 활용해 정수관을 통과시키고 인덕션까지 설치해 주셨다.
내가 계획했던 배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지만, 그 덕에 부엌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정수기 자리에 놓여 있던 에어프라이어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들어갔고, 인덕션은 제자리를 찾았다. 식기세척기 위에는 여유 공간이 생겨 식기건조대를 두기에 딱 좋았다.
다른 이삿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사 오기 전 불필요한 물건은 많이 정리했지만, 한동안 쓰지 않았어도 다시 사용해 보고 싶어 데려온 물건들도 있었다. 이사업체에서 우리의 쓰임과 다른 곳에 물건을 두고 간 경우도 있었는데, 의외로 그 자리가 더 괜찮아 보여 그대로 사용하게 되는 일도 생겼다.
한 번에 제자리를 찾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생활하면서 불필요한 동선을 줄이기 위해 물건을 이리저리 옮겼다.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면 다른 물건의 쓰임을 조금 바꾸어 배치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정하다 보니 물건들은 결국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나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요즘 나는 삶의 확장과 재정렬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생활 패턴과 성향에 맞는 시간대에 할 일을 배치해 보고, 그것을 루틴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고 느껴질 때면 실패와 좌절감이 따라오기도 했다. 왜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꾸준히, 정해 둔 만큼을 해내지 못할까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귀한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고, 그 시간이 모여 보석 같은 결과가 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다 매일 집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물건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도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데, 나의 시간과 일도 저마다 맞는 자리를 찾는 과정에 있는 건 아닐까. 기록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 책을 읽는 시간, 집안일을 하는 시간. 그 모든 시간에도 각자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물건이 자리를 옮기다 결국 제자리를 찾듯, 삶도 그렇게 꼭 맞는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각자의 쓸모는 자연스럽게 빛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