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무진기행> 중 '무진기행', 김승옥, 민음사. (383쪽)
와!!! 첫 페이지에 무진을 그려주신 성옥 샘... 저 쓰러집니다.ㅎㅎ
김승옥의 <무진기행>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 6.25를 겪은 세대들의 엄청난 고통. 1941년생 김승옥 작가는 1964년에 <무진기행>을 발표했다. 어쩜 <무진기행> 속 주인공 윤희중은 김승옥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답답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 본능적 욕구에 대한 다단한 감정들을 이 짧은 단편에 뿌옇게 묘사했다. 소설 속 배경인 '서울'과 '무진'이라는 공간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갈등하는 청년의 심적공간을 대변한다. 무진은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안개가 유명하다. 무진은 윤희중의 고향이다. 윤희중은 서울에서 무진에 올 때는 반수면상태가 된다. 잠을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다.
윤희중은 제약회사 경리 일을 하면서 ‘희’와 동거를 했으나 헤어졌고, 제약회사 사장 딸과 결혼했다. 장인 회사에서 곧 전무로 승진할 예정에 있는 윤희중은 아내의 제안에 따라 잠깐 무진에 쉬러 간다. ‘안개’로 자욱한 무진에 4년 만에 온 윤희중은 무진기행을 시작한다. 자신이 자고 나란 고향이지만 무진을 제3자의 시선으로 여행한다. 관찰자의 시점을 바탕에 깔고 무진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더욱더 객관적으로 보이는 무진 사람들과 사물이 이질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기차를 타고 다시 무진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안에서 농사 관계 시찰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무진에는 명산물이 없다고. 반수면 상태로 이 이야기를 들은 윤희중은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라고 생각한다. 안개가 무진의 명산물이라니..
윤희중은 무진에서 중학교 동창이자 세무서장으로 근무하는 ‘조’와 모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 '박' 선생을 만난다. 또 음악선생인 '하인숙'과 술자리를 같이 한다. 하인숙은 세무서장의 요청으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고 후배 박 선생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술자리가 파하자 집으로 가는 길에 하 선생은 윤희중에게 무서우니 바래다 달라고 한다. 하 선생은 윤희중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 명랑한 목소리로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p.28)라고 말한다. 윤희중은 경험해 보니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고 알려주지만 하 선생은 막무가내로 내일 다시 만나자며 자신을 서울에 데려다 달란다.
세무서를 나온 윤희중은 하 선생과 약속한 바닷가 방죽으로 나간다. 하 선생과 방죽을 걷던 윤희중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하 선생과 하룻밤을 보낸다. 하 선생은 윤희중에게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p.38)라며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을 애원한다. 윤희중은 하 선생에게 반드시 서울로 데려가 준다고 약속하며 둘은 헤어진다. 이튿날 아침, 윤희중은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고 하 선생에게 “사랑하고 있습니다”(p.41)라며 서울에 준비되는 대로 무진을 떠나 자신에게 오라는 편지를 썼지만 찢어 버린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p.41)
윤희중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생각해 본다. 6.25 사변 때 천여 리 길을 걸어 고향에 온 윤희중은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처박혀 있어 의용군의 징발도, 국군의 징병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육체는 지켰지만 정신은 지키지 못했다. 윤희중은 마음의 빚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더라도 목숨을 다한 친구들에게 심한 패배자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남들이 징병될 때 자신은 골방에 숨어 있어야 했던 비겁함. 이 마음은 늘 자신을 옭아맸고 무진에 올 때마다 잊을 수 없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하인숙을 만나 서울로 데려다줄 것을 약속하고 하룻밤을 보냈지만 다음날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책임지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는 자신의 비겁함 또한 부끄럽다.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지켜줄 수 없는 속물적인 자신. 용기 없는 자신의 선택, 하인숙과 하룻밤의 유희를 보냈다는 행위가 심하게 부끄럽다.
서울과 무진이 대립적인 마음을 투영한다. 여기에서 ‘무진’은 권태와 무기력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자 공상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서울도 싫지만 무진도 싫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붕 뜬 상태, 반수면 상태인 윤희중.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 갈등하는 윤희중. 어두운 것도 아닌 밝은 것도 아닌 안개가 낀 몽롱하고 몽환적인 상황. 그것이 윤희중의 현실이다. ‘서울-무진-서울’이라는 여정을 통해 또 한 번 '부끄러움'의 한 줄을 긋고 떠나는 비겁함. 무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자 자신의 모습이다.
읽은 소감
-서늘한 감정선이 느꼈고, 단편에 최적화된 모형이라고 보인다.
-거칠고 세속적인 표현이 많았다.
-여자의 시체를 보고 생각하는 윤희중이 특이했다.
-'겨울 나그네' 생각도 났다.
-죄책감, 모욕감이 그려지는 소설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존재였다.
-시골 사람들은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다.
-순종적이고 적당한 비겁함이 우리의 모습 같다.
-생각이 많은 윤희중, 팔다리가 묶인 느낌이 들었다.
-무진과 안개. 여러 작품들에서 오마주 했다.
-무진에 오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무진에서 만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반추한다.
-가볍게 생각하고 읽었는데 내용이 묵직했다.
-천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무진기행>을 읽어야겠다는 오랫동안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
-한글로 된 소설 쓰기의 포문을 연 작가의 필력이 돋보인다.
-거친 표현들이 많았다.
-여성을 불편하게 하는 표현들이 있었다.
-2023년 김승옥 문학상에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이 수상해서 기뻤다.
-권여선 작품과 김승옥 작품과 잘 어울린다.
-무진과 서울. 두 개의 자아를 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무진이란 공간이 있지 않을까.
윤희중 캐릭터에 대해
-소심하다.
-자기주장이 없다.
-무진에 오면 해방감을 느끼는 인물 같다.
-자신의 환경에 대해 핑계가 많다.
-자기 뜻대로 살려고 했던 순간이 없어 보인다.
-자기애가 낮아 보인다.
-자기 긍정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체적으로 무엇을 하지 못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도 생각해 본다.
-돌 아이인가( ㅋ ㅋ)
-비겁하다.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물이다.
-무진에서 있을 때와 서울에 있을 때 달라지는 것 같다.
-무진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욕망도 있지만 순수함 면도 있다.
-거짓말을 한다.
리뷰를 쓰는데 안개가 자욱합니다.(2023.10.15)
하인숙 캐릭터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왜 혼자서는 서울에 갈 수 없는지 모르겠다.
-왜 윤희중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어장관리를 하는 것일까.
-그녀의 말들이 진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성악을 전공했다는 말을 제외하고 보면 이해가 되는 인물이다.
-서울에서 학교를 나왔는데 왜 무진까지 발령을 받았는지 개연성이 떨어진다.
-세무서장이 음악선생과 결혼하려고 뒷조사를 해봤는데 집안이 무척 허술하고 가난하다고 나온다.
-집안이 가난하다고 나오는데 어떻게 그 시대에 음악을 전공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윤희중에게 서울 가고 싶다고 하는 말은 떠보는 거 같다.
-윤희중이 서울에 가자고 했으면 안 따라갔을 거 같은 인물이다.
-신여성이다.
-굉장히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윤희중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윤희중은 모호하지만 하인숙은 선명하다.
-하인숙이 하는 행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서울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된다.
-당시 여성들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김승옥 작가가 하인숙 같은 여성을 그려준 게 대단했다.
-<어떤 갠 날>도 부를 수 있지만 술상 앞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를 수 있는 여자다.
-심심해서 온다는 말이 솔직하다.
-박 군의 연애편지를 세무서장에게 보여주는 하인숙의 태도는 무엇일까.
-세무서장에게 잘 보여 결혼하려는 마음도 보인다.
발췌
-무진에는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다. (p.10)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 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p.10)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전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 버리곤 하였었다. 내가 골방보다는 전선을 택하고 싶어 해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 쓴 나의 일기장들은, 그 후에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을 웃으며 견디는 내용들이었다.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 보십시오....”(p.15)
-“잘 되셨군요. 해방 후의 무진중학 출신 중에서 형님이 제일 출세하셨다고들 하고 있어요.” “내가?” 나는 웃었다. “예, 형님하고 형님 동기 중에서 조 형하고요.” “조라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애 말인가?” “예, 그 형이 재작년엔가 고등고시에 패스해서 지금 여기 세무서장으로 있거든요.” (p,19)
1988년 <무진기행>입니다. 출처: O순 샘~
-그 여자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윤곽은 갸름했고 눈이 컸고 얼굴은 노리끼리했다. 전체로 보아서 병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꺼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코와 입이 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었다.(p.21)
-여선생은 머뭇거렸다. “서울 손님도 오고 했으니까......그 지난번에 부르던 거 참 좋습디다.” 조는 재촉했다. “그럼 부릅니다.”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무서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갠 날」과 「목포의 눈물」사이에는 얼마큼의 유사성이 있을까?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써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p.21)
-“그 속물들 틈에 앉아서 유행가를 부르고 있는 게 좀 딱해 보였을 뿐이지요. 그래서 나와 버린 거죠.” 박은 분노를 누르고 있는 듯이 나직나직 말했다. “클래식을 부를 장소가 있고 유행가를 부를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뿐이겠지. 뭐 딱할 거까지야 있나?”나는 거짓말로써 그를 위로했다.(p.24)
-“서울에 가고 싶으신가요?” “네” “무진이 싫은가요?”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제 대학 동창들도 많고......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 “그렇지만 지금 같아선 가정을 갖는다고 해도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전 그 남자에게 여기서 도망하자고 조를 거예요.”
“그렇지만 내 경험으로서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도 않더군요. 책임, 책임뿐입니다.” “그렇지만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걸요. 하여튼 서울에 가고 싶어요. 절 데려가 주시겠어요.?” “생각해 봅시다” “꼭이에요 네?”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는 그 여자의 집 앞에 까지 왔다. (p.28)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을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p.32)
귀여운 무진기행: 출처(진O샘)
-우리가 바닷가에서 읍내로 돌아온 것은 저녁의 어둠이 밀려든 뒤였다. 읍내에 들어오기 조금 전에 우리는 방죽 위에서 키스했다. “전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헤어지면서 여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 힘이 더 세니까 별수 없이 내게 끌려서 서울까지 가게 될걸.” 내가 말했다.(p.39)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p.41)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를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p.41)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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