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샛별 Dec 09. 2023

2022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불장난> 리뷰

샛별BOOK연구소


<이상문학상 작품집> 중 '불장난' 손보미, 문학사상, 2022.

단편집 <사랑의 꿈>, 손보미, 문학동네, 2023. (391쪽 분량)



 45번째 2022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장작은 손보미 작가의 <불장난>이다. 6편의 우수작은 강화길 <복도>,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서이제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염승숙 <믿음의 도약>, 이장욱 <잠수종과 독>, 최은미 <고별>이다. 이번 현대문학토론 모임에서 손보미 <불장난>을 토론했다.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p.65)로 시작하는 <불장난>의 첫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 말은 화자의 새엄마가 하는 말인데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말일까. 내용상으로는 화자의 같은반 학생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새엄마는 아마도 자기 남편을 생각하며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새엄마를 '그녀'라고 칭한다. 그녀는 엄마와 구별되는 표현이다. '그녀'는 절대로 엄마가 될 수 없는 거리를 표시하는 호칭이다. 그녀는 아빠에게는 두 번째 아내지만 화자에게는 절대적인 타인이다.


 그녀가 내뱉은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라는 말이 살면서 자꾸 맴돈다. 저 말을 화자는 아빠에게도 전 남편에게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아빠는 바람이 나서  엄마와 이혼했다. 철없는 불장난이라니... 사랑이라는 말은 불장난과 비슷하다. 위험하고, 뜨겁고, 소멸한다. 


하루아침에 엄마 아빠가 이혼한 화자의 마음은 굳어버렸다. 겉으로 보기는 멀쩡해도 말이다. 엄마는 떠났고 그녀와 아빠랑 살아야 하는 화자는 외롭다. 마음 둘 곳이 없는 화자는 '그녀'에 대한 미움으로 단단해진다. 화를 낼 곳, 폭발할 지점이 필요하다.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은 같은 반 '양우정'에게 옮겨간다. 양우정에 관련된  불량한 소문은 사실이어야 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갈망은 양우정이 숙직실에서 은밀하게 무엇을 하는지 목격해야 했다. 화자는 양우정의 부도덕을 확인해야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화자는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아빠와 엄마와 미약한 촛불 앞에서 떡국떡을 구워 먹었던 시절. 엄마가 떡을 씹으며 행복하다고 울었던 장면. 이날만큼은 가족들이 똘똘 뭉쳤던 시간이다. 안정감을 느꼈던 이 장면을 기억하면 화자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이겨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화자가 낮잠을 자다 깼을 때 집에 아무도 없었다. 거실 소파아래에 작은 물체가 보였고, 끄집어낸다. 그건  아버지의 연두색 라이터였다. 라이터를 보자 화자는 ‘어떻게 그런 물건—내 앞에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물건—을 그렇게 쉽게 잃어버릴 수가 있는 걸까?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p.115) 생각하며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화자는 아버지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고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p.115) 딸 앞에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좋은 것만 보도록 지켜줬던 아버지였다. 라이터를 발견하게 둔 아버지를 생각하자 자신이 그 연두색 라이터가 된 거 같았다. 더 이상 화자를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는 아버지. 화자는 라이터를 들고 그녀가 적어놓은 메모를 태운다. 


  그리고 그 라이터의 쓰임은 계속된다. 불장난은 점점 더 대범해지고, 계획적으로 치러진다.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는 심정으로 23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불장난을 시작하는 화자는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수치심과 굴욕감도 느끼지 않고, 태울 수 있는 종이들을 태운다. 극적인 변화는 극적인 행동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화자의 '불장난'은 아버지와 그녀의 존재를 소멸하는 의식처럼 타올랐다. '불장난'으로 어린 시절의 아픔을 거듭거듭 위로받는다. 





샘들이 뽑은 문장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의 오후에 내가 열기에 열기를 더한 거라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허공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 그 장면은 내 눈앞에서 선명하고 집요하게 계속해서 다시 떠올랐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 소리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날아가며 타들어 가는 종이를 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화상 한번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불길은 절대 내 신체나 정신에 위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을 피우는 동안 나는 그 어디도 아프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나는 모든 것 – 수치심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 – 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 이것이 내가 무모하고 치명적이게 타들어 가는 종이를 보며 끝도 없이 머릿속으로 되뇐 말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그렇게 틈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불장난을 했다. (p.65-66)(문학동네)


전남편은 내가 그 모든 변화를 극적인 갈등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그건 ‘비정상적’이라고 표현했다). 부모님이 주말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고 이혼을 한 후, 내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놀라워했다. (이혼 전) 어머니가 지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아버지와 생활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출근 시간이 내 등교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빠른 아버지 때문에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빈 교실에 있어야 하는 것도, 하교 후에 집으로 와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점심을 먹고 이 학원 저 학원을 다니는 것도, 저녁에 혼자 숙제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도(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수업 일정표를 주며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모두 익숙했다. 물론, 나는 얼른 주말이 되기를,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바랐고 어머니는 한 번도 빠짐없이 돌아왔다. (p.84-85)(문학동네)


현대문학 단편 토론 모임(맛난 사과/빵 감사해요.)


상단에 작은 반투명 창이 달린 낡은 목재 문. 문은 (예상했다시피) 잠겨 있었다.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 어째서였을까?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말을 떠오른 것은. 그녀가 지칭한 ‘남자들’ 속에는 아버지도 포함돼 있을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는 내가 숙직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석같이 믿었다. 다만 친구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허점을 발견하면 애가 탔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양우정에 대한 소문들이 완전무결한 사실, 조금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 그래, 내가 바란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하늘에는 여름해가 높게 걸려 있었고, 저 멀리서 공에 맞아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중에는 양우정의 것도 있었으리라. (p.102-103)(문학동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다시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원고지에 쓰이지 않은 부분들을 즉흥적으로 채워넣으면서! (원래 글에는 없었던) 싱크대에서의 불장난과 이십오층까지 걸어올라가는 동안 비 오듯 쏟아지던 땀에 대해, 그 여름 줄어든 몸무게와 옥상의 자세한 풍경에 대해,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해. 선생은 놀란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내버려두었다. 글의 막바지에 나는 이런 문장을 추가했다. 정우맨션의 이십오층 옥상에 작은 소각로와 불탄 종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저분하고 난잡하게(물론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내가 떠올린 표현은 ‘지저분하게’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게 꼭 발각되기를 원한다고. 누군가 우리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불장난한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기를 바란다고. (p.129-130)(문학동네)


그녀와 아버지는 손님이 오기 전, 어떤 역할을 맡을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관심을 끌고, 아버지는 시종일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 준자. 아버지는 과묵하게 굴었지만 적절한 때 재치 있는 농담을 던질 줄 알았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아내는 내 진정한 대변인이야, 우리는 이심전심이야, 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어, 기타 등등.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녀는 양쪽으로 늘어뜨린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마치 아버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이라도 된다는 듯-아버지와 맞닿지 않은 어깨 쪽으로 모조리 넘겨 버리고는 아버지의 팔에 자신의 팔을 밀착시켰다. 나는 항상 그걸 못 본 척했다. (p.17)(문학사상)


아버지와 다른 관점이긴 했지만, 나도 어머니의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다. 직업을 버린다는 게 어떻게 삶을 버리는 것과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동시에, 바로 이게 (그녀가 운전하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의구심을 가졌던 이유였다. 그녀 자신이 바로 남자에 미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라면 남자애들에 대해 다른 식으로 말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리고 (드디어)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오직 의구심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p.38-39)(문학사상)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중략) 나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팔을 비비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장면을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중략) 내가 떠올린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잘 것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불경하다고 느껴졌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발설할 수 없는 장면을 품고 있는 게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조여드는 것 같았고 화가 났다. 누구에게? 왜? 알 수 없었다. (p.46-47)(문학사상)


"울어? 왜?“

아버지가 놀라서 묻자, 어머니가 여전히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래

그 말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 순간 행복했을 것이다. 어둠 속, 미약한 촛불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애써 숨긴 채로 떡을 씹으면서, 어머니는 가족의 유대감,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안정감을 느꼈을 것이다.(p.36)(문학사상)


짓누르고 있던 (말로 내뱉기도 싫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정전과 비바람과 천둥소리를 뚫고 자신에게 도달한 안도감과 해방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며 정해진 기간 이곳을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훗날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공간을 임시 거처가 아닌 '집'이라고 마침내 지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날을 어떤 식으로 떠올렸을까? 떠올리긴 했을까?(p.37)(문학사상)


가을밤 천안에서~


그날 저녁, 몸이 아프다고 말하고(이건 거짓말이었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운 나는 라이터가 소파 밑에 떨어져 있었던 이유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거기에 숨겨둔 것일까? 무언가를 숨기기에 소파 밑이 적당한 장소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아버지가 왜 자신의 집에서 라이터를 숨겨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숨긴 게 아니라 실수로 잃어버린 것일까? 어떻게 그런 물건—내 앞에서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물건—을 그렇게 쉽게 잃어버릴 수가 있는 걸까?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가능성을 다 따져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아버지가 말도 안 되게 허술했다는 것. 나는 아버지의 그 허술함 때문에, 나를 라이터에 노출시킨 그 무신경함 때문에 화가 났고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p.115)(문학동네) 


그렇다면, 그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에 불장난이 막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원래부터 가시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라이터의 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을 잃어갔고, 때로는 아무리 힘차게 부싯돌을 돌려도 불길은 화르르 치솟지 않게 되었다. 나는 라이터가 소모품이라는 사실, 가스가 닳아 없어진다는 사실,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사살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애가 탔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짜증이 났으며, 나중에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p.125)(문학동네)





작가의 이전글 [세계고전문학BOOK클럽]<나는 고양이로소이다>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