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샛별 May 19. 2021

도스또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샛별의 고독한 문장

 고독한 문장 7. 도스또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

도스토옙스키 <자하에서 쓴 수기>, 창비, (59쪽).
인간은 행복 하나만 사랑할까? 인간은 행복 못지않게 고통도 사랑하지 않을까?
(59쪽)


 이 문장을 읽고, 문학을 읽는 이유를 생각했다. 문학 속 주인공은 행복한 인간이 별로 없다. 대부분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들은 이상하고, 약하고, 가난하다. 때론 찌질하고, 한심하고, 추악하다. 또, 잔인하다. 그렇다면 문학 속 주인공 중에 반듯하고, 이성적이며, 품위 있고, 바른 사람은 없냐고 물을 수 있다. 있지만 드물다. 특히, 세계고전문학 속 주인공들은 거의 비이성적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인물들은 살인까지 저지른다. 괴기스럽고, 광기에 서려 있다. 문학 속 인물들은 탐욕적이며, 비도덕적이며, 중독에 절어 있다. 한마디로 본받을 만한 주인공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상한 사람들 투성이인 문학을 읽을까?


  현실에서 만났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인간들이지만 문학 속 주인공들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독자들은 그들 처지에 감정 이입하고, 안타까워한다. 인물들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끼며, 인간의 한계를 직면한다. 책을 덮으며 '인간적 보편성'을 운운한다. 인간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비슷하거나 같구나라고 정리한다. 결국 문학 속 인물도 우리와 같다는 말이 된다. 독자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자신을 발견하거나, 잠재된 욕망이 들키거나,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나도 그들과 별 차이 없음에 위안을 느낀다.


  왜 주인공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낄까. 그들은 가면이 없다. 솔직하다. 문학이 자서전과 다른 이유다. 자서전은 어쨌든 포장이 가미되어 있다.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미화시키기도 한다. 문학은 그렇지 않다. 1인칭 시점이건 3인칭 시점이건 그들의 심리나 행동을 독자는 전지적 시점에서 들여다본다. 소설적 구조상 그들은 독자에게 민낯을 보일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 놓인 배우처럼 독자는 다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가면을 써도 들키고 만다.


  게다가 인물들에게는 공통된 포인트가 있다. 문학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존재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행복한 인물이 없다. 악조건과 끊임없이 사투한다.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주인공도 많다. 그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다. 너무나 행복에 겨운 주인공이 없다. 모두가 완벽하고, 역경을 헤쳐나가고, 성공하고, 반듯하다면 문학의 생명은 어떻게 됐을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게 어렵다는 걸 안다. 삶은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이다. 태어나고 일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진리만 보더라도 인간은 행복의 조건과 거리가 멀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한. 나의 죽음 타인의 죽음 모두 고통스럽다.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감내해야 한다. 심지어 껴안아야 한다. 고통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살아간다.


  "인간은 행복 하나만 사랑할까? 인간은 행복 못지않게 고통도 사랑하지 않을까?"(59쪽)


  독자는 문학에서 그들의 '고통'을 읽는다. 그리고 그 고통을 사랑한다. 인생에는 행복 못지않게 고통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간접 체험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다. 타자를 이해하고, 나를 직면하게 된다. 찌질한 주인공들의 고통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가면을 수없이 쓰고 산다. 가면을 벗긴다면 주인공들의 심리와 비슷한 부분도 상당하다. 이번 도스토옙스키 소설 <지하에서 쓴 수기> 주인공도 요상하다. 한 번 보자.


  <지하에서 쓴 수기>(1865)는 주인공이 지하에서 수기를 쓰는 내용이다. 지하에서 그는 영웅이 된다. 글로 자기 세계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지상 밖의 일들을 회상하며 친구들을 욕하고, 배은망덕한 존재라고 치부하고, 묵혔던 말들을 거침없이 글로 하이킥한다. 하고 싶은 말을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인다. 아무 맥락 없이 자기 멋대로 떠든다. 한 번 터진 말은 콸콸콸 봇물처럼 쏟아진다. 지하생활자는 자의적인 언어로 자기가 설정해 놓은 '당신들'과 언쟁도 벌인다. 자신이 지상에서 했던 행동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가 하는 말은 언뜻 보면 괴기하지만 그 안에 자신만의 하고픈 말이 있다. 그 말은 이성적 사회에 비판이기도 하다. 또 지상에서 하찮았던 자기변명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인간들에게 대놓고는 못 했던 말들을 지하에서 궁시렁거린다. 분노도 표출하고, 죄의식도 치른다.


  키도 작고 삐쩍 마른 주인공은 8급 공무원으로 관청에 근무하다 먼 친척이 상속해 준 6000 루블 받고 사표를 제출하고 지하로 들어간다. 지하라는 공간ㅡ 그만의 아지트, 동굴, 대피공간, 영혼의 은신처이다. 지하는 외부 세계의 단절이자 내면의 심연, 무의식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어쩜 지하는 가면을 벗은 공간이기도 하다. 지상 밖에서는 가면을 쓰고 다니다 지하로 오면 민낯이 된다. 화자는 지하작업실에서 수기를 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수기를 썼을까?


  그는 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수기를 썼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지상에서 못한 말들을 지하에 숨어 비겁하게 토로라도 해야 했을까. 그가 세계를 향해 말하고 싶은 부분은 1부에 기록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이 2x2=4라고 말할 때 그는 2x2=5도 멋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여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정상적이고 실증적인 것 만이 행복은 아니고, 고통도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묻기도 한다. 지하세계에서 쓰는 수기는 그의 사상이 된다. 마음에 묵혔던 말들을 토로하며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 수기는 가벼움을 의미한다. 수기를 통해 속죄도 가능하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일들을 꺼내면서 그는 억눌렸던 짐을 덜어낸다. 2부는 '젖은 눈에 얽힌 이야기'는 이에 해당된다.


  어느 날 눈이 내린다. 지하생활자는 젖은 눈을 맞고 성가셨던 에피소드 하나를 꺼낸다. 지나가는 장교가 주인공의 어깨를 부딪혀놓고 사과를 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주인공은 장교에게 파리 취급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 장교에게 어깨를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냥 지나가냐고 말할 수 있는데 주인공은 이런 말을 못 한다.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자 장교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할까, 장교를 비판하는 풍자적인 글을 써볼까 하며 뒷조사를 시작한다. 왜 자기만 항상 길을 비켜줘야 하는지 분노하면서. 또 장교와 마주치자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장교랑 어깨를 맞부딪혔다며 완벽한 복수라고 자부한다. 소심한 그의 성격이 단적으로 보인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친구들 송별회 모임에 끼어 모멸감을 느꼈을 당시의 일들을 회상한다. 친구들도 주인공을 벌레 취급한다. 약속 시간도 잘못 알려주고, 적은 월급으로 이런 레스토랑에 올 수 있냐고 비아냥 거린다. 주인공은 남의 돈이 아닌 내 돈 내고 왔다고(내 돈 내산 ㅎㅎ)말하자 친구들은 자기 돈 안 내고 먹는 사람도 있냐고 키득거린다.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주인공을 왕따 취급한다. 자괴감이 온몸을 짓누른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지만 화자는 화도 내지 못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받은 화를 풀러 매춘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리자라는 매춘부를 만나고, 주인공은 그녀의 직업에 대해 모욕한다. 이런 직업을 갖고 살면 행복해질 수도 없고, 곧 폐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훌륭한 남편을 만나 아기 낳고 알콩달콩 살라고 조언한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우쭐해진다. 리자에게 조언하는 자신이 신사라도 된 양 성취감에 휩싸인다. 리자에게 자기를 찾아오라고 주소까지 적어준다. 다음날 리자를 두고 한바탕 연극을 펼친 주인공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는 '기만'이라는 가면을 썼던 것이다.


  리자가 집으로 찾아오면 화자는 또 가면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리자에게는 자신을 근사하게 비쳐야 하지만 현실은 보잘것없는 가난뱅이다. 이런 처지가 구역질 나게 혐오스럽다.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일말의 양심은 있다. 그는 결국 지하로 숨는다. 이 에피소드를 쓰면서 화자는 얼굴을 화끈거린다. 다시 생각해도 리자를 기만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수기를 두고 '이 글은 문학이라기보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는 글이다.'(p.211)라고 했다. 그는 수기를 통해 속죄한다.


  지금도 화자는 지하 골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수기를 쓰고 있을 것이다. 다른 문학 주인공들처럼 이 인간도 아주 비정상적이다. 소심하기 짝이 없다. 뒤끝 작렬이다. 그럼에도 그는 고백한다. 지하로 이탈하여 소심한 자신을 질타한다. 그는 행복보다 고통을 선택한다. 행복은 그에게 머나먼 이야기이다. 차라리 방구석에서 유쾌하지 못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수기를 쓰는ㅡ삶이 편하다. "인간의 본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있는 힘을 다해 작동하고 오류를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다."(p.50) 그에게 있는 힘은 '지하에서 수기'를 쓰는 행위였다.


  지나온 나의 삶도 오류투성이였다. 주인공은 지하에서 나는 지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가면은 못 벗었지만 언젠가 나도 가면을 벗고 일기라도 쓰지 않을까. 기괴한 지하생활자를 보면서 간접적인 '고통'을 느낀다. 너무나 행복한 주인공보다 이런 주인공을 만날 때 문학은 위안을 준다. 그의 비겁함에서 나의 비겁함을 대면한다. 그의 찌질함에서 나의 찌질함을 위로받는다. 그의 고통에서 나의 행복을 본다. 문학을 읽는 이유ㅡ이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