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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Apr 05. 2021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3권

고독한 문장 1.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3권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3권, 428쪽


  안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기차에 몸을 던진다. 죽기로 마음먹었어도 죽는 그 순간에는 찰나적인 공포와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3권 428쪽에 나오는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몸이 굳어졌다. 톨스토이는 비정하다. 안나를 죽는 순간까지 몰아붙인다. 차라리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까지만 쓰거나 '무자비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꽝하고 떠받고 그 등을 할퀴어 질질 끌어갔다.' 여기까지만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쩌자고 톨스토이는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는 문장을 넣어 한 독자를 이토록 고통에 빠트리는지 모르겠다. 묵중한 기차는 아랑곳없이 안나를 향해 돌진한다. 기차를 정면으로 마주한 미약한 육체 앞에서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니.... 그러나 늦었다. 슬프게도 말이다.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기엔 기차는 무지막지하다. 자신의 죽음조차 온전한 선택을 하지 못한 안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했던 생각은 기차 바퀴에서 나오려고 했다는 진실뿐이다. 그녀는 계속 죽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모든 고통을 끝내려면 죽음 밖엔 없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안나의 자살은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살을 실행하는 순간 안나는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며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니... 공포와 후회로 뒤범벅이 된 안나는 결국 죽음의 쇠바퀴에 파멸되고 만다. 인간의 선택은 사랑도 죽음도 이처럼 확신 없고 불안하며 나약할 뿐이다.


  소설 속 안나는 기차역에서 등장해 기차역에서 사라진다. 그녀의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공간. 기차역이다. 안나에게 기차역은 브론스키를 만났던 공간이자 벌할 장소가 된다. 안나는 기차역에서 브론스키를 단죄하며 두 아이를 버린 채 비극을 맞는다. 누군가를 사랑한 최후는 참담하다. 결혼한 여자의 '다른 사랑'은 죄가 된다. 특히 자식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그녀의 행동에 도덕적 잣대를 피할 수 없다.  


  안나는 고모의 소개로 스무 살이나 많은 남편(카레닌)과 정략결혼을 했다. 남편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에 몰두하며 자신의 테두리 밖에 안나를 배치한다. 안나는 아들(세료쥐아)에게 몰입하며 '나름 나름' 가정을 꾸렸다. 8년 만의 첫 외출. 안나가 올케(돌리)를 만나러 가는 기차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 운명이 얄궂다.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스침'에 불길함을 느끼고 그를 피하려고 애쓴다. 여행 일정까지 변경하며 집으로 왔건만 브론스키의 열정적인 구애에 안나는 무너진다.


  유부녀가 하지 말하야할 금단의 세계를 넘어 버린 것이다. 안나는 사랑을 '알고' 말았다. 그녀는 더 이상 껍데기뿐인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안나에게 브론스키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된다. 안나는 숨 막히는 행복, 타는 듯한 열정을 느끼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사랑의 속성일까. 사랑은 잠깐의 '희열'만을 선물할 뿐이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살면 행복이 완성되리라 믿었지만 산다는 건 일상의 반복인지 미처 몰랐다.


 브론스키의 딸(안나)까지 낳은 안나. 한 남자의 사랑에 전부를 걸었던 그녀다.  모든 걸 버리고 왔는데 안나는 행복하지가 않다. 사교계 부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전 남편(카레닌)에겐 경멸당하고, 아들에겐 (셰로쥐아)외면받는다. 올케언니 돌리와 돌리의 여동생 키티는 안나에게 적의를 보이며, 브론스키 엄마에겐 모욕을 당한다. 그녀의 '사랑'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죄'가 된다. '죄'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성적으로, 사회적인 통념상 그렇다. 그녀는 추락한 자신의 모습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는 망가지고 무너진다. 누구 하나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딱 한 번 안나의 올케(돌리)가 저택을 방문했지만 안나를 불편해하며 떠난다. 젊은 장교와 바람난 유부녀라는 인식은 사회와 단절된 채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안나는 사교계에 출입도, 오페라 극장도 금지당한다. 안나는 사회에서 '악의 꽃'이 돼버린다.  


  그녀의 숨통은 오로지  '브론스키'뿐이었다. 브론스키만이 죄여 오는 고통을 틔울 수 있는 탈출구였다. 안나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 브론스키. 사랑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남편, 아들, 명예, 귀족부인, 집, 재산 등 모든 걸 버리고 온 안나에게 브론스키의 말과 행동은 거칠고, 불안하게 다가온다. '그가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부터 시작해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까지 의심하는 안나. 안나는 브론스키 저택에서 콕 박혀 불행의 씨앗을 키운다. 브론스키를 향한 질투는 걷잡을 수 없이 자라 안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자주 다투고, 브론스키의 사랑을 불신하며 죽음으로 복수하겠다는 섬뜩한 마음까지 품는다.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한 남자에게만 매몰되어 사랑을 갈구하고, 눈물 흘리고, 행복을 거세한다. 안나는 나름대로 책도 주문해 열심히 읽고, 글도 쓰고, 동화도 펴내며, 자신의 생활을 꾸리고, 딸 안나를 키우며 살아보려 했지만 '사랑'에 전부를 건 안나는 이성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안나의 내면세계는 불구덩이가 된다. 계속된 브론스키와의 언쟁에 안나는 아편을 몇 방울 마시고 모르핀 없이 잠들지 못하는 지경까지 되고 만다. 그녀는 브론스키의 모든 행동이 불만족스러워진다.   


  나는 안나에게 도덕적 비난을 멈추고 싶다. 1600쪽을 안나와 함께 한 독자로서 이제는 그녀를 품어주고 싶다. 소설 속에서 안나는 충분히 질타와 멸시를 받았다. 지칠 대로 지친 안나에게 마음을 보태주고 싶다. 안나는 외롭다. 안나에겐 오로지 브론스키 밖에 없다. 안나의 마음을 알아줄 거 같았던 올케언니 돌리도 결국 외면했다. 안나가 기차역으로 향하는 순간까지 누구 하나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살을 하러 가는 기차역 플랫폼에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안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더러운 여자'라고 수근덕거리기 바빴다. 마지막 최후까지 안나는 사람들의 모멸을 감당하며 자신의 몸을 숨겨야 했다. 나는 읽는 내내 두 아이를 두고 떠나는 어미의 비정함이 슬펐다. 사랑하는 브론스키에게 복수하겠다며 기차에 뛰어드는 그녀의 심정을 번번이 헤아려보지만 실패한다. 나는 자신까지 파괴하며 지키고 싶었던 안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비극 지점까지 몰고 가야 했었냐고 안나를 탓할 수도 없다. 모든 건 안나만이 알 것이다. 죽는 순간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안나를 떠올려본다. 그녀의 선택이 슬프다.



밑줄 긋는 모든 문장은 슬프고 고독하다
-샛별-





고독한 문장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책에 밑줄을 마구마구 쭉쭉~ 치는 버릇이 있는데요, 그중 한 문장씩 가져와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아마 즐겁고 밝은 문장보다 우울하고 아프고 슬픈 문장들이 많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 '고독한 문장'이라 지었어요. 1편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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