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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Dec 22. 2021

편혜영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

샛별의 고독한 문장

샛별의 고독한 문장 13.  편혜영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229쪽 분량)


편혜영의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은 표제작을 선두로 <호텔 창문>, <홀리데이 홈>, <리코더>, <플리즈 콜 미>, <후견>, <좋은 날이 되었네>, <미래의 끝>까지 총 8편의 단편이 있다. 이 중 <어쩌면 스무 번>은 누가 뭐래도 '편혜영스러운' 작품이다.

편혜영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229쪽 분량.


'올여름은 옥수수를 많이 먹게 될 것 같다'(p.9)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아니, 이제 옥수수는 질렸어."(p.33)로 끝나면서 한 시즌이 지났음을 암시한다. 옥수수 몇 개쯤 서리를 해도 티 나지 않을 정도의 넓은 옥수수밭 옆으로 이사를 온 화자. 이삿짐을 풀던 날 밤, 동네 찜질방 주인은 옥수수를 삶아 들고 온다.


'옥수수'는 여름철 대표 농작물이다. 찜질방 주인이 쪄온 옥수수는 단내가 폴폴 났고, 이사를 왜 왔냐고 묻는다. 아내는 옥수수를 먹으며 친정아버지 병 때문이라고 답한다. 도입 부분만 보면 따뜻하고 서정적일 거 같은 내용을 풍기는데 웬걸 소설 속 세계는 어지간히도 황망하고 절망적이다.


  화자는 CCTV처럼 아내를 관찰한다. 아내뿐만이 아니라 장인어른도 이웃들도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화자는 날카로운 내면을 가졌지만 기능적인 면에선 무력하다. 그는 회사에서 잘렸다. 느닷없이 비명을 질러 사무실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사무실 상사는 아내에게 전화해 "두 번 다시"(p.20) 화자를 출근시키지 못하게 했다. 화자는 왜 비명을 질렀을까. 화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p.21)고 한다. 비명이란 자신의 내면에 솟구치는 무언가가 해결되지 않을 때 뿜어져 나오는 분노의 목소리다. 비명은 위험한 상황, 다급한 경우,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나온다. 화자의 비명은 사회적 동물의 역할을 방해했고, 정신과 약을 먹는 신세로 전락한다.


  아내는 친정아버지도 돌보는 처지다. 그러니까 아내는 한 집에서 두 명의 환자를 본다. '아내는 돈과 식구 때문에 생기는 여러 일을 겪으며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 게 되었다.'(p.25) 이 문장만 봐도 그녀의 고생이 어떨지 짐작된다. 아내는 치매에 걸린 친정아버지를 모시는 조건으로 열 살 많은 언니와 로펌에 다니는 오빠에게 돈을 받는다. 그 푼돈은 이들 부부의 생활비가 됐다. 아버지를 미끼로 살아가는 신세다. 아내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면 간병비를 받을 수 없으니 이런 선택을 한다. 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녹록지 않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치매인 아버지를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등은 한없이 무거워 보인다.


  처음부터 아내가 장인에게 수면제를 먹인 건 아니다. 처음에 아내는 장인어른의 ‘장난을 받아주고 오물을 씻기고 엄청난 양의 음식’(p.26)까지 챙기고 보살폈다. 하나 아내는 돈도 벌어야 했기에 장인에게 수면제를 주고 동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장인은 '잘 잤고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좋아 보였다.'(p.26) 수면제 투여와 동시에 아내는 장인을 학대했다. 장인이 난폭하게 괴성을 지르거나 집을 나가가는 걸 방지하려면 아내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이 사나워질수록 아내는 더 사납게 굴었다. 아파트에서 아버지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돌자 아내는 시골로 이사를 결정한다. 시골로 내려와서도 아내는 장인에게 수면제를 충분히 먹였고, 장인이 자고 있으면 둘은 마당 파라솔에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길을 걸어 사찰의 보리수나무를 보고 읍내 구경도 갔다.


"약을 충분히 먹였는데도 간혹 장인이 일찍 깨어날 때도 있었다. 잠이 깨면 장인은 암막 커튼이 쳐진 불 꺼진 방의 어둠에 놀라 괴성을 지르며 울었다. 여러 번 가르쳤지만 불 켜는 법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도 문을 두드려 주먹이 까지고 몸을 때려 멍이 들었다. 장인이 갈수록 사나워졌다. 수월하게 달래기 힘들어졌다. 할 수 없이 아내는 장인보다 더 사납게 굴었다. 아파트에서는 옆집을 의식해 참았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p.27)


고독한 문장_ <어쩌면 스무 번> 단편, 28쪽.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28쪽)

  화자는 아내가 장인에게 사납게 굴 때마다 옥수수밭으로 도피한다. 담장보다 높은 옥수숫대를 헤치고 들어가 무릎을 감싸고 앉아 하늘을 본다. 옥수수밭은 아내가 장인과 괴물처럼 사투하는 장면을 외면할 수 있는 곳이다. 시끄러운 상황을 회피하고 고요한 옥수수밭에 숨어 보름달을 본다. 화자에게 옥수수밭은 도피처이자 일말의 안온한 공간이다. 화자는 둥근달을 볼 수 있는 날을 세어본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p.28) 우리는 보름달을 보면 소원을 빈다. 화자도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작은 희망을 품었을까.


  자신은 정신질환을 앓아 회사도 잘렸다. 아내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피폐해져 갔다. 장인어른은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괴성을 지른다. 화자는 형제들 돈에 빌붙어 살아가지만 보름달만큼은 자신을 환하게 비춘다. '어쩌면 스무 번'이라는 가정은 불안의 증표다. 스무 번은 기껏해야 2년도 채 못 되는 기간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스무 번 정도 보름달을 보고 생이 끝난다면... 아내의 다음 타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을까. 장인어른처럼 자신에게도 수면제를 먹일까.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눈가가 시큰해진다. 그는 울지도 못하고 옥수수를 따서 아내에게 받친다. 화자에게 '어쩌면 스무 번'은 절대고독을 안고 있다.


  화자의 집에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시골집은 담장이 낮아 주거공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 쉽다. 시골 주택은 원치도 않아도 외부인들이 들이닥친다.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다. 첫날 찾아온 찜질방 주인도 ‘손님 없는 거대한 찜질방을 버리지도 팔지도 삶아 먹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p.10) 했다. 며칠 후에는 옥황상제를 섬기는 전도사들이 찾아와 “이렇게 좋은 집을 가진 걸 보니 황제께서 복을 많이 내리셨습니다.”(p.13)며 책자를 두고 갔다. 또 며칠이 지나서 보안업체에서 왔다며 남자와 여자가 명함을 내민다.


"이삿짐을 풀던 날 밤, 찜질방 주인이 옥수수를 가지고 왔다. 중국 음식점에 배달을 부탁했는데 멀다고 거절당해서 난감하던 차였다. 사람을 들이기 마땅치 않았지만 아내는 잠깐이면 되겠다 싶었는지 문을 열어주었다. 방금 삶은 옥수수 단내에 혹해서였다. 우리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p.9)


"며칠 후 점심을 먹고 막 치우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따분하게 차려입은 여자 둘이 대문가에 서 있었다. 마당으로 나서는 나를 보더니 두 사람은 곧장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찜질방 주인이 조심하라던 전도사들 같았다. 길짐승을 쫓듯 저리 가라고 크게 손짓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p.12)


"며칠 지나서 이번에는 남자와 여자가 나타났다. 옷차림이 단조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작은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얼핏 성경책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종교 전도사가 방문한 줄 알았다. 그들은 보안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멀뚱히 쳐다보자 남자가 울타리 쪽으로 다가와 아내에게 명함을 내밀었다."(p.14)


  이렇게 주기적으로 부부는 불청객의 습격을 받는다. 특히 보안업체 직원인 남자와 여자는 부부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며 무인경비 계약에 무리한 사인을 요구한다. 사인을 거부하면 위협을 가할 태세다. 결국 부부의 약점을 잡아챈 남자 직원은 계약서를 내민다. 아내는 사인을 한다. 이미 보안업체 직원들은 아내가 아버지를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내가 꽁꽁 숨기고 싶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들켜버렸다. 아내는 겁에 질려 울어버린다. '깊고 고된 흐느낌'(p.32)으로. 덩달아 화자도 비명을 지른다. 이를 본 경비업체 남자는 웃으며 "사나운 개는 결국 뭐든 물어요. 강도를 물면 다행이지만 아마도 식구부터 물 겁니다. 그때 소리를 지르세요. 우리가 올 테니까요."(p.33) 한다.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장인은 기척이 없었다. 깨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오늘따라 지나치게 오래 잔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방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어둑해진 거실 소파에 주저 앉았다. 나는 거기서 누군가 죽었다고, 육만칠천원 때문에 칼에 찔렸다고 중얼거렸다.(...) 아내가 물었다. 나는 얘기하고 싶었다. 칼에 찔리고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은 노인이 아니라, 장인이 어째서 내내 잠잠한지, 요즘 장인이 약을 한 번에 몇 알이나 먹는지에 대해서. "(p.33)


  인물들은 평범하고 보편적이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같지만 그 실상을 파헤치면 대단히 폭력적이다. 무례하게 침입하는 방문객들, 공포를 자아내 계약을 하게 만든 보안업체 직원, 모든 걸 예리하게 주시하면서도 방관하는 화자, 아내의 가학적 행위까지. 이들에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 도덕성은 돈과 밀접하다. 모두들 돈이 부족해 부도덕한 사람들이 됐다. 돈은 도덕성마저 갉아먹었다. 옥수수 땅 주인은 육만칠원원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돈이 없어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덕성은 안개 낀 보름달처럼 희미할 뿐이다.


  하나같이 양심도 없는 사람들 같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행위는 타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번아웃이 온 아내 또한 병자와 다름없다. 우리도 상황에 따라 아내나 화자처럼 비명을 지를지 모를 노릇이다. 삶이 순탄치 않을 때 양심을 장담할 수는 없다. 소설은 굉장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정말 어디에서 본 것 같은 인물들,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것이 이들 부부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소설을 쓰는 동안 써야 할 장면보다 쓰지 않을 장면을 자주 생각했다."라는 편혜영 작가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스무 번>에서 독자는 작가가 쓰지 않는 장면을 찾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언의 공간들, 알 수 없는 인물들의 내면을 확대해야 한다. 말하지 못한 그들의 심정을 읽고, 숨은 행위를 곱씹어야 한다. 그래야 편혜영의 서늘한 세계에 입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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