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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Feb 04. 2022

루리 글/그림 <긴긴밤>

샛별의 고독한 문장 14. 

동화책 <긴긴밤> (루리 글/그림, 문학동네, 2021) 144쪽 분량.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작품


  문학에서 '복수심' 가득한 인물을 고르라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꼽는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복수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고뇌하더니 죽느냐 사느냐까지 고민한 인물이다. '복수심'을 갖고 생을 산다는 건 고통이다. 살아있지만 사는 게 아니다.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루리 글, 그림의 <긴긴밤>은 햄릿처럼 복수심을 안고 살아가는 흰바위코뿔소의 이야기다. 복수 대상은 인간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고난이 올 때가 있다. 고난을 누구는 극복하기도 하지만 누구는 주저앉고 만다. 이때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그 고통은 다소 줄어들 것이다. 고통을 받는 자에게 도움의 손길은 꼭 필요하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같이 동행해 줄 때 그들은 지구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다. 동화책 <긴긴밤>은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어린 펭귄이 등장한다. 흰바위코뿔소의 이름은 노든이다. 노든에게 고난은 계속 찾아온다. 그는 어떻게 그 고통을 견뎌내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세상은 각자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데 말이다. 고통은 개인의 몫일뿐이다.

  노든의 고난은 태생부터 시작됐다. 노든은 부모님을 잃고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다. 태어나 보니 옆에는 코뿔소가 아닌 코끼리 무리들이 있었다. 노든은 엄마, 아빠의 얼굴도 모른다. 아마 노든의 부모님도 무사하지 못했나 보다. 노든은 코끼리 코에 둘러싸여 자랐다. 노든은 자신도 코끼리처럼 코가 길어지고 귀가 커져 펄럭일 줄 알았는데 코에서 뿔이 자랐다. 코끼리와 다른 모습을 보며 노든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신이 코뿔소인지 코끼리인지 도통 모르겠는 상황이다.


  노든은 자신과 닮은 코뿔소들은 어디에 사는지 궁금했다. 노든은 선택해야 했다. 코끼리 고아원에 남을 것인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코뿔소 무리에서 살 것인지.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기가 무서웠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건 무모한 선택이라며 머뭇거리자 할머니 코끼리가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p.15) 라며 용기를 내라고 한다.



 선택은 늘 두렵다. 노든은 코끼리들의 곁을 떠나는 게 무섭지만 할머니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라는 말에 흔들렸을까. 노든이 선택한 바깥세상은 고아원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자유가 있었다. 바깥세상은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노든은 광활한 자연을 바라봤고 자신과 닮은 코뿔소들을 찾았다. 노든은 아내 코뿔소를 만났고 딸이 태어났다. 아내는 ‘먹을 것이 많은 방향을 찾는 방법도, 마실 물을 찾는 방법도, 위험을 감지하는 방법도, 포근한 잠자리를 찾는 방법도 전부를’(p.22) 노든한테 가르쳐줬다. 아내는 훌륭했기에 노든이 초원에서 잘 적응도록 도와줬다. 이때가 노든의 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긴긴밤 중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다. 어떤 삶도 이 비율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거 같다. 노든에게도 긴긴밤이 찾아왔다. 인간들은 코뿔소의 뿔을 자르기 위해 아내 코뿔소와 딸을 죽였다. 노든은 죽은 아내와 딸 옆에서 긴긴밤을 보냈다. 사람들은 노든을 '파라다이스 동물원'으로 옮겨 총알을 빼주고 영양주사를 놔줬다. 노든을 구조해 준 것 또한 인간이다. 노든은 삶을 포기했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달빛은 힘없이 누워 있는 아내와 딸을 비추고 있었다. 진흙 구덩이는 코뿔소의 피로 가득했다. 노든의 딸은 몸 여기저기 총알이 박힌 채 진흙 속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노든이 얼굴로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지만 딸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든은 아내에게로 갔다. 아내는 뿔이 깊게 잘려 나간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노든은 아내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댄다. 노든의 코에 피가 묻었다. 밤보다 길고 어두운 암흑이 찾아왔다.'(p.26)


  고통을 겪는 노든 옆에 앙가부가 등장한다. 앙가부는 파라다이스 동물원에서 평생을 지낸 코뿔소다. 앙가부는 노든이 반가웠다. 계속 악몽을 꾸는 노든에게 앙가부는 친구가 되어준다. 앙가부는 노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란다. 노든은 슬픔에 빠져있지만 이상하게 앙가부에게 '코끼리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p.30) 말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건 축복이다. 노든은 매 순간 화가 났고, 분노했지만 다행히 앙가부가 있었다. 노든의 응어리를 앙가부는 묵묵히 들어줬다.



  어느 날, 노든에게 고난이 또 찾아왔다. 앙가부도 노든의 아내처럼 뿔이 잘렸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게 된다. 뿔 사냥꾼들이 앙가부의 뿔을 자르고 도망친 것이다. 노든은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여기를 탈출해서 아내와 딸, 앙가부를 죽인 인간들을 다 죽이고 싶었다. 노든의 몸은 복수심으로 꽉꽉 찼다.


  한편 파라다이스 동물원에는 펭귄들도 살았다. 치쿠와 윔보 펭귄은 '주인이 없는 알'(p.43), 버려진 알을 발견한다. 치쿠와 윔보는 누군가의 아빠가 되기로 선택한다. 자신들이 버려진 알을 품지 않으면 알은 온기가 식어 부화하지 못할 게 뻔했다. 치쿠와 윔보는 자기 알이 아닌데도 각별하게 알을 돌봤다.


  노든에게 기회가 왔다.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불이 났고 많은 동물들이 죽었다. 윔보도 철봉에 깔려 죽는다. 치쿠는 양동이에 알을 담아 동물원을 탈출한다. 치쿠는 단짝 친구 윔보를 방금 잃었다. 치쿠에게도 긴긴밤이 시작됐다. 동물원에 난 불길을 피해다 노든과 치쿠는 만난다. 아픔이 있는 노든과 치쿠는 함께 긴긴밤을 보내며 의지한다. 둘은 먹을 것을 찾으러 사막을 걸어 다녔고, 알을 보살폈다. 초원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노든은 치쿠를 도왔다.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이때 알았다. 노든은 아빠가 되려는 치쿠를 보살펴줬다. 그러나 노든은 복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잠깐 보류했을 뿐이다. 바다를 찾는 치쿠와 알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에.


 

 노든에게 또 고난이 찾아왔다. 알을 돌보느라 기진맥진한 치쿠는 결국 노든의 옆에서 죽었다. 알을 남긴 채. 이제 노든이 알을 품을 차례다. 노든은 치쿠가 죽어 슬펐지만 알을 보살펴야 했다. 알이 부화했고 새끼 펭귄이 태어났다. 그림책의 화자가 드디어 등장한다. 화자는 아기 펭귄이었다. 아기 펭귄이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아빠는 노든이다. 펭귄에게 노든은 전부였고 절대자였다. '노든은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다. 우리는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노든도 보았고, 내가 있는 풍경 속에는 언제나 노든이 있었다.’(p.83) 노든은 윔보와 치쿠를 대신해 아기 펭귄을 정성껏 키웠다. 노든은 치쿠와 했던 약속, 아기펭귄을 바다에 데려가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잠들기 직전이었다. 말이 없는 노든이었지만 잠들기 전에는 꼭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리 와, 안아 줄게.”

노든이 나지막하게 부르면 나는 노든의 품으로 쏙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노든은 주로 치쿠와 윔보의 얘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서는 늘 너는 바다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p.84)


 아기 펭귄은 바다에 간 다음에 “그럼 노든은 무얼 할 거예요?”(p.86)라고 묻자 노든은 복수를 할 거라고 말한다. 노든은 “인간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서, 트럭은 들이받아 버리고, 총은 부수고, 사람들은 던져 버릴 거라고”(p.86) 아기 펭귄은 놀란다.

'내게 노든의 복수는 터무니없는 얘기로만 들렸다.

“하지만 노든, 생각해 봐요. 노든 같은 코뿔소는 엄청 많았을 텐데, 그런 코뿔소들을 노든만 빼고 다 죽였다는 건, 인간들이 엄청엄청 힘이 세다는 거잖아요. 그런 인간들을 노든이 어떻게 이겨요?”(...)

“그까짓 복수가 뭐라고”

“뭐라고?”

“복수를 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난 복수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복수를 하러 가면 노든은 죽을 거예요.”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있어. 이제 나는 뿔이 간질간질할 때 그 기분을 나눌 코뿔소가 없어. 너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지, 다른 펭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겠지만 나는 그런 기대 없이 매일 아침 눈을 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p.87)


  펭귄들을 만나 복수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졌지만 복수의 마음을 놓은 건 아니다. 노든은 계속 인간들을 찾아 '복수' 해야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노든은 복수의 순간을 위해 인간의 냄새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드디어 그 기억하는 인간들의 냄새가 스쳤다. 트럭을 타고 가는 인간들을 향해 노든은 돌진했다. 새끼 펭귄은 노든을 불렀다. "노든! 노든"(p.101). 펭귄은 노든마저 잃는 게 두려웠다. 노든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펭귄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든을 목청껏 부른 것뿐이었다. 다행히 펭귄 덕분에 노든은 인간들의 총구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펭귄이 노든을 살린 것이다. 노든은 펭귄과 지내면서 불행한 마음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실의에 빠진 노든은 펭귄을 보살피며 힘을 얻었다. 펭귄은 노든의 긴긴밤을 함께 보내줬다.



노든, 복수하지 말아요. 
그냥 나랑 같이 살아요.(104쪽)

  노든은 펭귄의 말에 눈물이 났다. 자신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복수심 때문이었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인간들에 대한 냄새였다. 그 냄새를 잊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노든은 자기가 죽는 것보다 저 인간들을 죽이는 게 더 중요했다. 노든은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펭귄이 울부짖는다. 복수하지 말라고. 펭귄의 말에 노든은 소리 없이 운다. 노든도 삶이 서럽다. 인간들에게 코뿔소 뿔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노든은 모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동족들 모두 죽였다. 자신은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이다. 펭귄은 복수는 바보 같은 짓이라며 노든은 살아야 남아야 한다고 운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p.104)


  아기 펭귄도 노든처럼 선택의 순간이 왔다. 노든이 코끼리 무리를 떠났던 것처럼 펭귄도 노든 곁에 남을지 바다로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펭귄은 노든과 헤어지는 게 슬펐지만 펭귄은 바다에서 살아야 했다.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아기펭귄은 노든없이 혼자 망망대해 앞에 서야 한다. 노든이 코끼리 무리에서 나와 초원에 살았던 것처럼 펭귄도 노든 없이 바다에서 살아야 한다. 둘은 작별인사를 한다. 누구보다 같이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각자마다의 길이 있다. 그 길을 함께 잠깐 갈 수는 있어도 영원히 할 수는 없다. 혼자 걷는 길은 고독하지만 떠날 땐 떠나야 한다. 새끼가 어미의 품을 떠나듯 펭귄도 자신의 몫을 다하며 험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아기 펭귄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치쿠, 윔보, 노든. 아기 펭귄에게 아버지는 셋이다. 아버지들은 이름도 없는 아기 펭귄, 누군지도 모르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름은 없지만 우리는 그 펭귄을 위해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 주위엔 이름 없는 수많은 존재가 있다. 나와 다른 종이거나 나의 새끼가 아니더라도 이름 없는 존재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름이 없어도 노든은 아기 펭귄을 만나면 알아볼 것이다. 엉망투성이인 긴긴밤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냄새, 말투, 걸음걸이, 눈빛을 함께 나눴기에.


  아기 펭귄도 아버지들의 사랑을 기억한다. 노든이 그랬던 것처럼 펭귄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줄 것이다. 자기가 받은 사랑과 희생을 아기 펭귄은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 고난을 겪고 긴긴밤을 보내고 있다면 아기 펭귄도 그를 위해 모든 걸 걸고 함께해 줄 것이다. 노든, 치쿠, 윔보가 그랬던 것처럼. 긴긴밤은 혼자 버티긴 어렵다는 걸 펭귄은 잘 알고 있다. 산다는 건 '긴긴밤'이다.


참고자료


중국과 베트남에선 코뿔소 뿔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한다. 이 탓에, 야생동물 암시장에서는 검정 코뿔소의 뿔에 대한 수요가 많다. 현재 지구 위에 존재하는 검정 코뿔소의 수는 단 5000마리로, 검정 코뿔소는 무분별한 밀렵 탓에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했다. (조선일보)


코뿔소가 목숨을 잃는 이유는 허무하리만큼 어리석다. 코뿔소 뿔이 해열부터 항암작용까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낭설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과 중국 암시장에서 코뿔소 뿔이 약재로 거래된다. 최근 중국에서는 코뿔소 뿔 가루를 술 마시기 전에 복용하면 쉽게 취하지 않고, 숙취가 없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젊은 부유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뿔소 뿔의 성분은 각질(角質)이라고 부르는 케라틴(Keratin)이다. 케라틴은 우리의 머리카락, 손톱, 피부 등 상피구조의 기본을 형성하는 단백질이다. 코뿔소 뿔은 1킬로그램 당 7000만 원 상당의 가격에 거래된다. 24K 금보다도 더 비싼 가격이다. 즉 금값을 주고 이런 저런 효능을 기대하며 코뿔소의 뿔을 복용해봤자, 결국에는 자기 손톱을 뜯어먹는 것 이상의 효과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중동 지역에서는 높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코뿔소 뿔로 단검의 손잡이를 만들기도 한다.(오마이뉴스)


[CBC뉴스] 남아프리카의 야생동물 공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에 거의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코뿔소 밀렵이 올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그간 코뿔소의 코가 약재로 쓰이는 곳이 있어 남아프리카에서는 코뿔소 밀렵이 성행해왔다. 이에 당국은 코뿔소 밀렵을 막기 위해 코뿔소의 뿔을 자르는 극약 처방을 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는 코뿔소 밀렵꾼들을 향해 밀렵 방지를 촉구하고 있다.


출처 : CBC뉴스(http://www.cbci.co.kr)


발췌


노든에게도 선택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든은 늘 선택의 날이 오면 고아원에 남는 쪽을 택하리라고 생각해 왔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새로 들어오는 어린 코끼리들은 도와주면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가 없었다.(p.14)


그는 코끼리답게, 지혜롭게 현명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뇌었다. 마음을 다잡은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에게 고아원에 남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코끼리가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p.15)


탕, 하는 소리가 진흙 구덩이 주변을 흔들었고 새들이 날아갔다. 아내는 훌륭한 코끼리가 아닌, 훌륭한 코뿔소였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노든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아내는 벌써 저 앞에서 트럭과 인간들에게 위협적으로 뿔을 휘두르고 있었다. 머리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인간들 쪽에서 작은 돌멩이 같은 것들이 날아와 아내의 몸에 박혔다. 아내가 휘청거렸다. 노든 뒤에 숨어 있던 딸이 엄마를 향해 뛰어나갔다.(p.25)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p.125)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는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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