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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Oct 14. 2022

편혜영 외 <술과 농담> BOOK리뷰

샛별BOOK연구소


말들의 흐름 7. <술과 농담>(Drinks and Jokes),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 씀.  시간의 흐름, 2021. (199쪽 분량) 에세이.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취하라> 샤를 보들레르/ <술과 농담> (p.67)


 첫 음주의 기억을 이 날로 하고 싶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여름밤이었다. 봄에 친구들과 사고(노코멘트 ㅎㅎ)를 쳐 여름방학 때 인형공장에서 빡세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했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왔다. 엄마한테는 독서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공장에서 우리가 할 일은 거의 완성된 인형에 조금만 손을 보면 되는 쉬운 작업이었다. 인형은 모두 수출품이었고, 매번 새로운 인형들을 보는 즐거움이 컸다. 작은 인형에 옷을 입혔고, 글로건으로 모자를 씌우거나 발바닥에 스티커를 붙였다. 공장에는 공장장이 있다는 걸 이때 알았고,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오빠들도 있었다. 그때는 대학생들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닌 거 같기도 하다.


 여튼, 오빠들은 우리를 데리고 맥줏집을 갔다. 여름밤은 더위로 후끈했고, 맥주와 튀긴 통닭을 시켜 먹었다. 처음 와 본 호프집은 이상했고,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호프집 TV에서 강변가요제가 나왔고, 이상은의 '담다디'가 울러 펴졌다. 키가 큰 그녀는 탬버린을 들고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첫 호프를 마신 날을 기억하는 건지 이날 한바탕 웃고 즐거웠던 날을 기억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밤하늘 풍경, 맥주 마시는 소리, 담다디 노래는 지금도 선명하다.


 <술과 농담>은 술을 마셨던 각자의 경험을 모은 글이다. 어떤 작가는 술과 자신의 관계를 솔직하게 적었고, 어떤 글은 관념적인 글만 늘어놓기도 했다. 어떤 작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농인지 진실인지 애매하게 썼다. 가장 좋았던 챕터는 조해진 작가의 '조금씩, 행복해지기 위하여'였다. 솔직한 글은 늘 감동이 세게 온다. 


<술과 농담>에 나오는 술의 종류는 맥주, 소주, 와인, 보드카, 위스키 등이다. 술은 관계에서 윤활유가 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도 한다. 홀로 편의점 의자에 앉아 맥주캔을 딸 수도 있다.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도 술자리는 좋아한다.  술을 마시면 진실도 농담도 나온다. 눈물도 웃음도 나온다. 과하면 구토까지. 알코올은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어색한 관계도 친하게 만드는 묘약이다.


책은 첫 음주의 경험, 술에 관한 추억과 기억들을 생기 시키게 만든다. 술에 파괴되기도 하지만 간절한 염원을 담기도 한다.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가 좋을 책이다. 

발췌


폔혜영 _ '몰' 


그 무렵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유별난 조갈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혼자 아이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지쳤는지, 날마다 자라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당시의 나는 한번도 헤아려보지 않았다. 길가에 앉아 바쁘거나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등을 땀으로 적시는 손자의 무게를 견디며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맥주를 마시는 동안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모른다는 게, 지금도 종종 마음을 아프게 한다. (p.24)


중독자란 허약하고 우울한 심약자가 아니라 일찌감치 그 사실을 깨닫고 마음과 몸을 무엇에 의지할 것인지 간파해버린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 번도 뭔가에 깊이 빠져본 적 없고 별 기대 없는 미래를 내팽개쳐 본 적 없는 나로서는, 판에 박힌 동일한 나날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수행해온 나로서는, 자신을 망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빠져드는 충동과 마음의 쓸모를 영영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채로 결국은 아무것도 아닐 게 자명한 삶을, 이미 망친 듯한 삶을 지나치게 제정신으로 혹독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p.35)


조해진_ '조금씩, 행복해지기 위하여' 


이틀에 한 병씩 와인을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등단하고 7,8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간절하게 원하던 대로 소설을 읽고 쓰면서 삶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기별 없이 찾아온 슬럼프는 그동안 애써 쌓아온 내 내부의 어떤 질서들, 돌탑 같기도 하고 계단 같기도 한 그 규칙적인 질서들을 무너뜨렸다. 실은 삼십대 내내 우울하긴 했다. 등단 초기엔 (작가로) 불러주는 이가 없어서, 등단하고 몇 년이 흐른 뒤엔 마감하느라 늘 너무 바빠서...... 상반된 이유로 우울했던 셈인데, 사실 그 이면에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똑같은 분량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그 욕망이 작품 발표라는 기회와 교접하지 못했을 땐 불안이 됐고 내 능력 부족으로 만족할 만한 작푸믕로 출력되지 못했을 땐 불만이 됐던 것이다. 욕망은 때로 아름답지만 필요 이상 부풀어오르면 탄내를 풍기며 터지고 만다. 그 시절 좋은 소설에 대한 욕망이 나를 살게 했지만 대신 다른 구체적인 삶의 감각을 나는 상실해가고 있었고, 그 감각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아무도 곁에 없다는 절박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내게 슬럼프의 다른 이름은 외로움이었다. 와인 반병, 외로울 때 그 와인 반병은 내게는 항우울제이자 수면제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 슬럼프의 증상과 심각성을 주변에 알리거나 상담을 시도하지도 않은 채 그저 와인 반병을 마시는 것으로 견딘 것이다, 조금은 무식하게......(p.52)


알면서도, 금주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까짓 맥주 한두 캔'이어서 지레 투항한 건 아니다. 맥주를 안 마시면 손이 떨린다든지 잠을 못 자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 시간이 좋아서다. 책상 위 전등을 켜고 노트북을 열어 전원 버튼을 누르고 진공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맥주 캔 뚜껑을 열 때, 딱 소리와 함게 맥주 향이 맡아질 때, 투명한 유리컵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차올랐다가 꺼지는 모양을 지켜볼 때,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켠 뒤 화면이 켜진 노트북에서 작업 중인 파일을 불러올 때 나는 행복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에 대한 욕망이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이긴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p.56)


김나영_ '술과 농담의 시간'


 세상 모든 술이 축배처럼 느껴지던 시간을 지나와 엄마가 된 이후 내게 술은 말 그대로 기호식품이 되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한 잔, 아기를 재워두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한 잔. 일상적으로 한 잔 또 한 잔을 거듭하면서 이상하게 더욱 갈증이 생겨버린 것 같다. 술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려서 정말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싶을 때나 약간의 취기를 빌려서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관대하게 바라보고 싶을 때 그 바람이 잘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술이 내게 주는 일상적인 기분과 기운이 나쁘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게 오는 어떤 행운에 감사하고 마음껏 기뻐하고 싶을 때, 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한 번쯤은 겪게 될 불운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금방 잊고 싶을 때, 그때에도 술은 지금처럼 그 모든 일들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해주겠지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인 듯 누릴 때 행운은 배가 되고, 그것이 일상인 듯 누릴 때 불운은 사소해질 것이다. (p.78)


어느덧 28개월째 육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육퇴 후의 맥주 한 캔이 지상최대의 행복과 안식이었던 때가 있다. 과거형으로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시기를 보내며 복부지방이 눈에 띄게 늘어버려서 지금은 '육퇴후 맥주타임'을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자지 않으려고 버티는 아기와 어떻게든 재우려는 나의, 육체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전쟁이 막을 내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해지고 우울감과 갑갑함이 밀려든다. 아니 파도가 밀려오듯 오는 게 아니라 그런 기분은 해일처럼 덮쳐온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그렇게 뭔가 좋지 않은 상태에 처하게 되면 나를 위로해주는 남편의 어떤 말과 행동도 해변의 모래알, 조개껍데기와 돌멩이처럼 느껴질 뿐이다. 좋아하는 감자 과자 한 봉지를 뜯고 선물 받은 유리컵에 시원한 맥주를 따른다. 식탁 등을 켜고 그 아래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들을 흡입하다보면 금세 모든 것이 바로 보이는 시간이 온다. 캄캄하게 나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던,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운 것으로부터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끼면 그제야 커다랗고 선명하게 보이는 예쁜 돌멩이와 빛나는 모래알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 돌멩이 곁에 가 스스르 누워본다. (p.96)


한유주_ '단 한 번 본' 


한때는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가끔 가는 곳이 있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가서 위스키 석 잔을 마셨다. 왜 늘 석잔이냐고, 주인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석 잔 정도라면 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석 잔 정도라면 취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한번은 반병 정도를 마셨다. 그 바에는 주인과 직원 두 사람이 일했다. 그중 한 사람이 언니와 함께 가나 대통령 경호원으로 취직했다며 위스키 한 병을 샀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일하는 중이었으므로 결국 내가 가장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5층 건물의 5층에 살고 있었다. 계단을 한참 올라 마침내 현관문을 열었는데, 집이 아니라 밤이 있었다. 검고 맑은 밤하늘에 별빛이 가득했다. 나는 문고리를 붙들고 한참 서 있었다. 왜 밤하늘이지. 어째서 서울의 밤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은 거지. 꿈일까.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옥상 출입문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틀거리며 한 층을 내려와 현관문을 열자 밤이 아니라 어둠이 있었다. (p.105)


취해서 길에 누운 자들이 보일 때마다 경찰에 신고했다. 어찌된 일인지 모두 남자들이었다. 여름밤, 겨울밤. 경찰들은 대개 친절하게 말했고 더욱 친절하게도 경과를 문자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언젠가 내가 길 위에 눕게 된다면, 누가 나를 경찰에 신고하게 될까? 나는 그에게 스타벅스 커피쿠폰이라도 미리 보내주고 싶다. 혹은 발베니21년산 한 병을. 나는 단 한 번 단 한 잔 그 술을 마신 적이 있고 그대로 죽고 싶었다. (p.127)


이주란_ '서울의 저녁' 


이 잔 너무 예쁘다.

그치.

테두리가 골드인 것도 좋고.

몇 달 고민하다가 간신히 샀어.

얼만데.

12만 원.

비싸네.

만약 아직 같이 살았다면 분명 보라는 그 잔을 발견하자마자 살지 말지 나에게 먼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잔이 이미 보라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 보라라는 사람은 결국엔 살 거란 걸 알아챘고 단박에 "더 빨리 기쁘려면 지금 당장 사"라고 했을 것이다. 보라는 좀 돌아가더라도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p.141)


그러던 어느 날인가. 빨래 돌리는 소리가 나기에 집에 있는가보다 하고 퇴근길에 사 온 빵을 주러 옆집엘 갔어. 얼굴을 마주친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노크를 하고서도 한참을 나오지 않기에 그냥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렸어. 그 사람이 울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여니까 세탁기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어. 나는 소포지 같은 봉투에 든 빵을 내밀었어. 이거 드세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는데 그 여자가 말했어. 매일 우는 건 아니라고. 네, 하고서 집에 돌아왔는데 꼭 매일 울 것만 같더라. 아니 매일 우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싶었던 것 같아. 옆집에 살 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p.164)


이장욱_ '술과 농담과 장미의 나날'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 나오는 흔한 러시아식 농담은 이런 것이다.

"아빠, 술에 잔뜩 취한다는 게 어떤 거야?"

"여기 잔이 두 개 있지? 이게 네 개로 보이기 시작하면 잔뜩 취한 게 되는 거야."

"아빠, 거기 잔이 하나밖에 없는데?" (p.183)


-알려져 있듯이 압생트에는 만만찮은 문학적 후광이 둘러져 있다. 이 신비로운 초록빛 술은 랭보와 베를렌에게는 사랑과 증오의 술이었는데, 베를렌이 그의 사랑하는 소년 랭보에게 총을 쏘았을 때도 그는 압생트에 취한 상태였다. 고흐의 그림에 노란색이 많은 이유도 압생트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 술때문에 눈에 황시증이 생겨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고흐의 노란색 해바라기가 압생트의 산물이라는 과격한 농담까지 가능하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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