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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Feb 03. 2023

샛별의 고독한 문장 <농담> 밀란 쿤데라

샛별BOOK연구소


장편소설 <농담>, 밀란 쿤데라, 민음사. (532쪽 분량)


이제 우리에겐 조직된 연주회만을 위해 연주하는 습관(어리석은 습관)이 생겼는데그런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농담>(p.52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작가.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을 고전문학BOOK클럽에서 토론했다. 총 7부로 각 장마다 루드비크,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헬레나 등 4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다시점 소설이다. <농담>을 읽다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요 명제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무거움, 가벼움을 느낀다. 제마네크의 가벼움, 루드비크의 무거움을 찾을 수 있고, 헬레나가 나무변기에 앉아 사투하는 모습에서 '키치'적 요소가 발견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의 적은 키치라고 했던 '사비나'가 떠올랐다. '키치'는 독일어로 똥에 대한 본질적 부정을 의미한다. 똥을 누면서 누지 않은 척. 바로 '척'하는 태도를 혐오하는 것이 키치이다. '키치'는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표현하는 가치다. 정치인들이 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며 상인들을 이해하는 척, 어려운 이웃들과 손을 잡고 연출하는 모습 등이 키치이다. 이것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대중들인데 그 순간만을 보기 때문이다. 이념 또한 마찬가지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 등은 하나의 키치가 될 수 있다. 


  <농담>의 첫 문장은 카뮈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만큼 주목해서 읽어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그렇게 고향에 다시 와 있었다'(p.9)로 시작된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왜 1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까. 고향에 돌아와 3일(금토일)간 펼쳐지는 여정은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복기한다. 22살 대학생 때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엽서에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p.59)라는 농담을 적어 보낸 흔적으로 그의 인생은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남자친구(루드비크)의 사상을 의심하고 밀고하는 여자친구(마르게타). 이념은 사랑을 뛰어넘는다. 전체주의에서 사랑은 도구에 불과하고 의심되는 사상은 처벌한다는 맹목적인 신념. 사랑이라는 공간에 농담하나 끼어들기 어려운 이념이다. '트로츠키 만세'라니. 스탈린 시대에 이런 말을 엽서에 적어 보낸 남자친구를 그녀는 용서할 수 없다. 이 사건으로 루드비크는 제적당하고 군에 입대해 탄광 노동에 던져진다. 이 한마디 농담은 결정적 실수(?)가 되며 그의 인생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고 삶의 무거움에 시달린다. 


  병영생활에서 만난 두 번째 여인 루치에(19세). 루드비크가 편지를 하면 루치에는 답장이 아닌 꽃다발로 대신한다. 그녀가 6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루드비크는 루치에에게 처녀성을 기대하며 정복하려 한다. 루치에는 자신의 과거를 루드비크에게 말하기 어렵다. 루드비크는 위험을 감수하며 그녀를 만나러 와서 껴안고 옷을 벗으라고 간청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못하겠다고 다음에 하자고 몸을 빼버린다. 이유를 모르는 루드비크는 루치에를 거칠게 대하다 결국 관계는 파괴된다. 


  루드비크에게 우연히 다가온 세 번째 여인은 '헬레나'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헬레나가 제마네크의 부인이라는 걸 아는 순간 억눌렀던 원한은 복수계획으로 바뀐다. 15년 전 엽서 사건 당시 루드비크는 차기위원장이자 친구인 제마네크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조직의 이름으로 당에서'축출하자고 제안하며 앞장섰다. 백여명의 교수와 학생들은 동시에 손을 들어 찬성을 표했고 이 장면은 루드비크의 기억에 각인되어 15년을 괴롭혔다. 작은 실수가 일파만파 확대되어 재해석 됐고, 청춘과 미래를 잃어버린 루드비크는 제마네크 부인인 헬레나를 이용해 통쾌한 복수를 꿈꾼다. 


  37살이 되어 돌아온 고향 '모라비아'엔 아는 사람도 없고 만나고 싶은 친구도 없다. 빨리 목적을 달성하고 떠날 예정이다. 루드비크는 코스트가의 방을 빌리고 그곳에서 헬레나를 유혹한다. 루드비크가 남편친구인지 모르는 헬레나는 그와의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린다. 루드비크와 헬레나의 섹스는 가학적이고 약탈적이며 난장판이다. 섹스가 끝나고 헬레나는 관능과 쾌락과 폭력에 압도당하며 만난 지 팔일 된 그를 구원자로 착각한다. 남편에게 받은 굴욕은 루드비크를 만나 긍지로 바뀐다. 이제 루드비크는 헬레나의 미래다. 


  헬레나와의 관계 후 '왕들의 기마행렬' 축제 현장에서 우연이 제마네크를 만난다. 제마네크는 교수가 됐고 그 옆에 애인인 학생 브로조바(22세)가 딱 붙어있다. 저렇게 멋진 여성이 애인이라니. 제마네크의 안중에도 없던 헬레나와 자신은 지금 무슨 짓을 했던 거지. 복수가 패배로 바뀌는 순간이다. '굴욕과 수치로 숨이 막혀 왔다'(p.475) 자신의 복수가 제마네크에겐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 아이러니, 농담. 모든 것을 삭제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투성이. 루드비크는 또 한 번의 절망을 느끼며 이런 상황이 참을 수 없다. 


  광장은 '왕들의 기마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도 북적거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제마네크를 복수하기 위해 온 고향 거리에서 그는 완전히 패배했다. 빨리 헬레나를 지우고 싶은 마음은 속전속결로 헤어질 결심을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루드비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헬레나는 구원의 빛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가 왜 사는 것인지, 더 이상 버텨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p.479) 자문하며 헬레나는 마지막 유서를 쓴다. “내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 마지막 안녕…….”(p.498)


  인드라(헬레나의 동료)로부터 헬레나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받은 루드비크는 부랴부랴 헬레네가 있는 숙소라 달려가 진통제 약통을 발견한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헬레나를 생각하며 루드비크는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헬레나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나무변기에 앉아 뒤틀린 창자와 사투중이다. 화들짝 놀란 헬레나는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보이고 싶지 않은 최악의 장면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보였다. 얄궂은 아이러니. 헬레나가 먹은 진통제는 사실 인드라의 변비약이었다. 인드라는 변비에 걸린 게 창피해 진통제 통에 넣어두고 먹었던 것. 그걸 몰랐던 헬레나. 죽음의 문턱에서조차도 삶은 농담을 보낸다. 인드라의 수치심이 헬레나를 구했다. 


  역사는 농담의 속성을 지닌다. 철회 불가능한 역사들이 지나고 보면 농담처럼 무의미하다. 이를 쿤데라는 '초라한 세계'라 지칭했다. 15년 만에 복수를 위해 귀향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루드비크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의 안식처럼. 친구 야로슬로프에게 부탁해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루드비크. 야로슬로프는 이제 당을 위해, 이념을 위해, 고객을 위해 연주하지 말고 우리를 위해 연주하자고 한다. 옛날처럼 들판에 나가서 말이다. 곧 석양이 질테니 별들을 보며 연주하자고. 당이나 이념, 타자를 위해 조직된 연주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루드비크는 악단들과 연주하며 뜨거운 연대감을 느낀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그래, 루치에,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뷰느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았다.'(p.529)


  루드비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슬픔, 웃음, 사랑, 증오심, 행복, 절망, 사랑, 고통의 가치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의 본질을 깨닫는다. 제마네크를 복수하기 위해 고향에 온 3일간의 여정은 자신과의 화해로 거듭난다. '나'를 유린했다고 믿는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를 느끼게 된 루드비크. 응급환자를 태울 구급차의 환한 불처럼, 루드비크의 앞날도 밝게 빛나길. 루드비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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