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중편소설, 다산책방, 2023. (98쪽 분량)
남색 바지와 파란 셔츠를 입은 소녀
<맡겨진 소녀>는 주인공 소녀가 엄마의 출산으로 킨셀라 부부 집에 맡겨지면서 일어나는 여정을 담았다. 소녀는 뜻밖에 킨셀라 댁에서 지내는 경험을 한다. 경험은 성장과정에 큰 변화를 준다. 소녀의 집과 맡겨진 집의 환경은 정반대다. 소녀의 집은 형제가 많아 늘 시끄럽고 가난해 모든 게 부족했지만 맡겨진 집은 조용하고 음식도 넉넉하고 충분한 보살핌을 받았다.
맡겨진 집에서 소녀는 안정감을 경험한다. 그 경험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지만 소녀에게는 우주적 체감으로 다가온다. 소녀는 아주머니의 몸짓에서 따스함을 느낀다. 아주머니는 소녀의 귀지를 파주고 손톱의 때를 빼주고 욕조에 물을 충분히 받아 씻겨준다. 소녀는 매트리스에 오줌을 눠도 혼나지 않을뿐더러 부끄럽지 않게 처리해 준다. 소녀는 아주머니의 마음 씀을 본다. 아주머니는 이 집에 비밀은 없다고 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비밀은 괜찮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다. 이 집에 올 때 집시 같았던 소녀는 아주머니 덕분에 깔끔한 소녀로 변신했다.
킨셀라 아저씨는 소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한몫한다. 소녀의 목청을 칭찬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긴 다리를 독려한다. 그렇다고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천사로만 그려지진 않는다. 아주머니는 소녀의 말버릇을 고쳐주는데 "'예'가 아니야. '네'라고 해야지. 뭐라고?"(p.27)한다. 이럴 때마다 소녀는 집에 가고 싶어진다.
소녀의 입장에선 두 집을 경험하며 한 뼘 성장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킨셀라 부부에 더 주목해서 읽었다. 아이를 잃은 집에 아이를 맡기는 상황은 괜찮을까. 아들을 잃고 킨셀라 부부는 어떻게 견디며 살고 있었던 걸까. 자신이 키우는 개를 냉랭하게 대하는 게 이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직 아들방 벽지도 그대로고 아이 옷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아들의 옷을 소녀에게 입혀 볼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세상에, 아빠가 네 짐도 안 내려주고 가벼렸구나!(21쪽)
나는 이 설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아이를 맡기며 옷 가방을 주지 않아 벌어진 장면인데, 정말 아이 짐을 두고 가는 걸 아버지가 잊어버렸는지, 처음부터 옷가방 같은 건 없었던 건지, 아주머니는 아이를 맡으며 짐가방은 없는지 묻지 않는다. 소녀도 챙길 법한데 모른다. 이렇게 아빠, 아주머니, 소녀는 짐가방을 모두 잊거나 모른다. 그러니 처음부터 짐가방 같은 건 없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에는 아주머니 대사로 아빠가 덤벙거려 두고 갔다고 하지만.
그래서 소녀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소년의 옷을 입게 된다는 설정은 참으로 기막히지만 슬프다. 소년의 옷을 입을 때 소녀는 잠깐 '소년'이 된다. 아들 옷을 입은 소녀가 킨셀라 부부에겐 아들로 보인다. 킨셀라 부부는 아들 옷을 입은 소녀가 집안을 돌아다닐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들이 살아돌아왔다는 착각은 아닐지라도 살아있던 아들의 모습이 잠깐 재현되었을까. 킨셀라 부부에게 찾아온 불행의 꼭지는 소녀로 하여금 잠깐 정지됐다. 그래서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잃은 아들을 잠깐 소환하는 치유의 시간이 된다.
킨셀라 부부가 소녀에게 대하는 태도, 말 등을 유심히 보면 마치 아들을 대했던 태도로 유추된다. 아들을 훈육하듯 소녀에게, 아들을 사랑하듯 소녀에게. 킨세라 아저씨는 편지가 올 때마다 아들에게 뛰어갔다 오게 하고 시간을 쟀을 것이다. 아들이 매트리스에 오줌을 눴다면 킨세라 아주머니는 민망하지 않게 방에 습기가 차서 그랬다며 모른척하며 매트리스를 빨았을 것이다. 셋은 원래 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이 안온한 질서는 곧 깨진다. 소녀가 아들의 옷을 벗으며 환상은 끝난다. 부부는 소녀에게 아들의 옷을 입혀 교회에 데려갔을지 모르겠다. 아저씨가 이번 주 미사에는 소녀의 새 옷을 사서 입혀야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깨끗하고 단정하지 않아?"(p.50)라고 말한다. 아저씨는 "무슨 말인지 알잖아, 에드나"(p.50) 한다. 미사에 소녀가 입고 간 옷은 무엇이었을까. 소녀가 집에서부터 입고 온 옷이 깨끗하고 단정하지는 않았을 거 같고, 아마도 아들 옷을 입혀 미사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싶다. 남색 바지와 파란 셔츠를 입고 있는 소녀에게 부부는 시내에 가서 새 원피스를 사준다. 이는 소년에서 소녀로 분리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분리는 둘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자각하게 된다. 소녀는 아들이 아님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그래서 둘은 슬프다. 그 감정은 행동으로 반응한다. 아저씨는 옷을 사러 나가기 전 발끝으로 의자를 툭 치더니 소녀에게 손이랑 얼굴을 씻으라며 "아빠가 그 정도도 안 가르쳐줬니?" (p.51) 말해 소녀를 얼어붙게 만든다. 소녀는 아저씨 말을 듣고 씻으러 욕실에 가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 욕실 안에서 아주머니는 울고 있다. 그러더니 체념한 듯 "네 옷이 생기면 정말 좋을 거야."(p.51) 말하는 아주머니.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인지 몰랐던 소녀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된다. 이 집안에 머물던 비극을...
아저씨 아주머니는 최선을 다해 맡겨진 아이를 보살폈다. 얼핏 보면 책은 <빨간 머리 앤>을 생각나게 한다. 앤이 오고 이 집에 활기가 생겼듯. 맡겨진 소녀가 오고 킨셀라 부부는 새로운 나날을 보낸다. 소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사주고, 쿠키를 구워주고, 물을 길어오고, 시내로 외출을 하면서 셋은 꼭 가족처럼 지낸다. 앤이 초록지붕에 살며 아줌마의 일손을 돕듯 맡겨진 소녀도 킨셀라 아주머니를 도우며 지낸다. 다만 다른 건 킨셀라 아저씨는 매슈처럼 뚱하지 않고, 에드나 아주머니는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침묵하지 않고, 소녀는 앤처럼 재잘거리지 않는다. 이들은 서두르지 않고, 안온하게 24시간을 보낸다.
셋의 일상이 조용하고 목가적으로 비치지만, 내재된 슬픔은 엄청나다. 소녀와 부부는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받는다. 소녀의 엄마가 출산했고 이제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킨셀라 부부가 아이를 잃고 살아가는 슬픔을 소녀도 조금 알았다. 마지막 대사는 "아빠"(p.98)이다. 소녀는 아저씨 품에 안겨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라고 부르다니.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아저씨를 위해 불렀다는 생각 든다. 아저씨가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말 '아빠'. 아들을 대신해 불렀거나 당신이 나의 아빠같다고 인정해 주는 말. 이 집에 머물면서 소녀가 알게 된 위대한 사실은 '부재에 대한 고통'이다. 그러니 소녀는 아저씨를 위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다. 당신이 듣고 싶은 말, 간절히 원했던 말을 소녀는 해준다. 소녀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만든 부부도, 이 말을 하는 소녀도 아름답다. 시처럼 쓴 얇은 소설. 위대하다!.
좋았던 문장들
주전자가 부글부글 끓으며 김을 피워 올리자 철제 뚜껑이 달각거린다. (17쪽)
잠시 후 타르트를 자른다. 뜨거운 페이스트리 위로 크림을 붓자 웅덩이처럼 고인다. (19쪽)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들, 버터 만들기, 저녁 식사, 씻기고 깨워서 성당이나 학교에 갈 채비시키기,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 밭을 갈고 일굴 일꾼 부르기, 돈 아껴 쓰기, 알람 맞추기,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19쪽)
아주머니가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욕조 마개를 막은 다음 수돗물을 제일 세게 튼다. (23쪽)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깊이 담그고 목욕하는 건 처음이다. (24쪽)
-젖소들이 뿌리만 남기고 풀을 뜯는 소리가 들린다.(28쪽)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30쪽)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고 침대에 아주머니의 무게가 느껴진다. (33쪽)
"저리 가!" 아주머니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36쪽)
우리는 매트리스를 세제와 뜨거운 물로 문질러 씻은 다음 그대로 두고 햇볕에 말린다.(36쪽)
나는 텃밭으로 달려 나가 파를 뽑아서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 집에 불이 나서 나한테 물을 퍼 오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37쪽)
아빠의 말들.
-애들 먹이는 게 골치예요. 애들이 식성은 제일 좋잖아요. 애도 마찬가지고요. (18쪽)
-애가 말썽을 안 피워야 할 텐데요. (21쪽)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 (21쪽)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36쪽)
"이번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넌 순록처럼 달리게 될 거야. 긴 손잡이가 달린 그물이랑 경주용 자전거 없이 널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우리 교구에서 한 명도 없을 거다. "(42쪽)
"발가락이 길고 멋지구나." 아주머니가 말한다. "멋진 발이야." (43쪽)
밑줄 긋는 모든 문장은 슬프고 고독하다.
샛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