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멜리에>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아멜리에가 생마르탱 운하에서 물수제비를 뜬다.
달콤한 파이를 깨뜨려 한 숟갈 푸는 순간의 쾌감,
여름날 푸른 강물 위로 물수제비를 띄우는 재미,
한 줌 쥔 곡식이 손아귀를 스르르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느낌...
삶은 작지만 무해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상자와
같다고 영화 속 주인공 아멜리에의 깜빡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이다.
그녀는 르누아르의 그림만 모사하는 고집불통 유리
노인을 돌본다,
고약한 채소가게 주인을 골탕 먹이고,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외로운 중년의
남녀를 이어준다.
아버지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오고,
파리 리옹역을 오가며 사진 속 남자의 사연을
풀어내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내리며 첫눈에 심장을 뛰게
한 남자를 만난다.
젊은 날 버림받은 일층 여자의 남편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쓰고,
거리에서 만난 맹인 할아버지를 부축해 길안내도
한다.
현실에서라면 수주일이 걸려도 어려울 일들을
아멜리에는 척척 해낸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뚝딱 결말을
끌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드라마틱할까.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아멜리에가 오가던 파리 시내와 낯선 동네 어디든
팔딱팔딱 뛰어서 한 바퀴 휘 돌아보고 싶다.
우리는 하루를 그냥 보내주지 못한다.
그 하루가 의미 있기를 강요하고 자주 묻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는지,
이 시간들이 언젠가 설명 가능한 삶으로 쌓이고
있는지, 의미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처럼.
그래야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처럼 의미를
찾아내는 삶을 죽는 날까지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수십 년 오래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찾아온다.
둘러보면 나를 비롯한 모두가 무언가를 찾듯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이상해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상태가 온다.
속도는 빨라지고 숨은 차오르지만, 왜 달리고
있는지는 점점 흐릿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열정도, 기대도, 확신도 소리 없이 조금씩 몸과
마음에서 빠져나간다.
시시하고 시들해진다.
중요했던 것들이 의미를 놓고 서서히 달아난다.
그럴때 아멜리에를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아멜리에는 때때로 눈을 감는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와 공기와 온도를 더 정확히 느끼기 위해서.
그녀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하루에 아주 작은 개입을 남긴다.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주고,
외로운 삶에 장난 같은 사건을 끼워 넣는다.
그 사소한 행동들은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녀 자신을 삶 쪽으로 조금 더 이동시킨다.
행복이란 성취가 아니라 아직 반응할 수 있다는
증거라는 듯이.
<아멜리에>와 다른 지점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가 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밀란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 민음사, p.147.
이 책에는 뚜렷한 사건도, 극적인 변화도 없다.
인물들은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삶을 개선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묻는다.
왜 우리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무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쿤데라에게 의미란 구원의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피로하게 만드는 구조다.
삶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비극 때문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설명 가능하게 만들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는 삶의 본질이 위대함이 아니라 하찮음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하찮음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간은 삶
대신 의미에 매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아멜리에의 세계가 사소한 감각을 끝까지 붙잡는
태도라면,
<무의미의 축제>의 세계는
그 감각조차 집착으로 변질될 위험을 경고한다.
과하게 반응하는 삶과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삶.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아멜리에처럼 경쾌하게 뛰어들 만큼 가볍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을 만큼 냉소적이지도 않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들에 반응하고,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해야 할 일들에 몸과 마음에
쓰인다.
아직 불필요하게 의미를 부여 중이고, 다행히도
완전히 무감각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 예전만큼 쉽게 설레지도 않는다.
느리게 마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요즘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아직 감각을 잃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으로.
삶의 의미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처럼 거창한
목표나 설명 가능한 서사가 아니며,
<아멜리에>처럼 나를 무디게 만들지 않는 어떤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게 하는 힘,
산책로를 한 바퀴 더 돌게 만드는 마음,
망설이다가도 안부를 묻게 되는 태도.
그리고 끝내 나는 이렇게 남겨둔다.
아멜리에처럼 감각을 포기하지 않되,
쿤데라처럼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신호를 알아차리며
오늘을 건너가는 태도,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가장 단단한 삶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무뎌지는 감각이 일순간 일어나면,
느닷없이 생마르탱 운하 위에서 나도 물수제비를
뜨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