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위화, 소설 <원청>

by 뭉클


교토 청수사에서 오미쿠지를 뽑았을 때, 종이 위에는 '대길(大吉)'이라 적혀 있었다.

앞날을 묻고 싶다기보다, 지금의 시간을 자꾸 의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방향이 맞는지, 이 속도가 지나치게 느린 건 아닌지,
오랫동안 애써 지켜온 일들이 결국 설명되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여행지에서조차 굳이 점괘를 뽑은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길(大吉)
손에 태양을 쥔다.
동쪽에서 오래된 가지가 다시 싹튼다.
모종은 자라 꽃과 열매를 맺는다.
구름 위의 사다리를 다시 오른다.
서두르지 말 것.
지금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사람을 믿되, 자신을 잃지 말라.
병은 차차 낫고,
여행은 길하며,
인연은 늦게 이루어지나 마침내 좋다.

오미쿠지의 말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도,
앞날이 환해질 것이라는 선언도 없었다.

대신 적혀 있던 문장들은
지금의 수고를 의심하지 말라는 말,
서두르지 말라는 당부,
때가 오면 다시 오를 수 있다는 믿음에 가까웠다.

그것은 미래를 보장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도 된다는 허락처럼 읽혔다.

사람들은 왜 여행지에서조차 점괘를 뽑는 걸까.

아마도 운명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운명을 혼자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불완전한 인생에 기대어 잠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말 하나를
곁에 두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 끝에 떠올린 소설이 있다.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원청>이다.

이 소설에는 끝내 도착할 수 없는 도시가 등장한다.
린샹푸는 그 도시의 이름을 믿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원청’이 아니라,
그저 머물 수밖에 없는 한 마을이다.

이야기에서 인상적인 순간은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아니라,
알고 난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지점이다.

그는 더 이상 확인하지 않는다.
도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자신이 속았는지,
지금 이 삶이 잘못된 방향은 아닌지.

대신 그는 그 마을을 원청이라 부르기로 한다.
거짓에서 시작된 이름이지만,
그 이름 아래에서 아이를 키우고,
사람들과 계절을 건너며,
하루를 하루로 살아낸다.

<원청>이 묻는 것은
그 도시가 실제로 있었는가가 아니다.
그 이름을 붙들고 걷는 동안
사람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시간을 통과하는가이다.


이 소설에는 혁명도, 이념도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옳은 선택을 하기보다
그날을 넘기는 쪽을 택한다.

린샹푸와 마을 사람들의 삶은
결단의 연속이 아니라, 견딤의 축적에 가깝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떠날 수 없었고,
믿기로 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 채
그 자리에 남는다.

그래서 원청은 희망의 이름이라기보다,

견딤의 이름에 가깝다.

이 소설은 말한다.
사람은 언제나 분명한 목적지를 알고 걷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이름 하나, 이야기 하나가 있다면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는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는가.

대부분의 하루는 결단이 아니라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이해하지 못한 채 견디고,
설명하지 못한 채 다음 날로 넘어간다.

의미를 찾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잡는 말들이 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거창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끝까지 버티는 기술에 가깝다.

많은 경우 사람은 신념보다 이야기로 산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 고단함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라는 말,
지금의 삶이 언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서사.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오늘을 넘기게 한다면
사람은 그 문장을 곁에 둔다.

청수사의 오미쿠지처럼,
원청이라는 이름처럼.

인간은 삶이라는 역사를

언제나 거대한 의미로 살아내지 않는다.
오늘을 견디게 하는 말 한 줄로도
충분히 살아간다.

때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싶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