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 답설야중거
부사수는 사수를 닮는다.
연구실의 인원이 점점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수-부사수 제도가 도입되었다.
부사수의 가장 큰 임무는 단순한 업무 보조가 아니라,
사수의 졸업을 책임지는 중대한 임무까지 포함되었다.
한마디로 사수가 졸업하기 전까지 부사수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필자가 연구실에 있던 시절,
연구실 잡무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었다.
* 작업대 관리
* 도서 및 자료 정리
* 총무 업무 (예산 관리 및 연구실 운영)
* 공구 관리 (장비 유지보수)
* 청소 및 집기 관리
* 서버 관리 (연구실 서버 유지 및 보안)
이렇게 나뉜 업무에 따라 연구실 구성원들도 자연스럽게 사수-부사수 관계로 묶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역할 분담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닮아가는 사수와 부사수
부사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수를 점점 닮아갔다.
연구실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수의 사고방식과 업무 스타일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준수였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주변에서 조금만 우겨도 "그랬나?"라며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타입이었다.
덕분에 연구실에서는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캐릭터였다.
이 전염성 강한(?) 특징은 똘똘했던 재은이에게도 옮겨갔다.
처음에는 꼼꼼하고 논리적인 재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준수처럼 "그랬던 것 같기도...?"라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역할에 따른 성격 변화
이렇게 연구실에서의 역할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비슷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 총무를 맡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꼼꼼하고 계산적이었다.
* 서버 관리를 맡은 사람들은 늘 보안과 오류 해결에 집착했다.
* 공구 관리를 맡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재주가 좋고 깔끔했다.
사람들은 연구실에서의 역할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격이 형성되고,
업무 스타일이 닮아갔다.
함께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연구실 생활은 고되고 잡무도 많았지만,
모두가 끈끈하게 서로 도우며 공부하고, 함께 성장했던 시절이었다.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는 단순한 업무 파트너가 아니라,
연구실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서로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닮아가며 만들어진 추억들은, 지금도 연구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회사도 사수.부사수 제도를 운영하는 곳이 많다.
직장인으로 대기업과 같이 신입사원에 대한 교육을 통해
전사적인 업무 방식과 문화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기업들에서는 처음 입사해서 팀장이나, 자신의 사수의 업무 방식을 많이 배우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각 기업에서는 팀장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업무 방식이, 후임들에게 많이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나중에 또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백법 김구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고 인생의 좌우면으로 삼았던 시가 생각난다.
야설(野雪)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 1771~1853)
(서산대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임연당의 한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墳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는,
어지러히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이
뒤다라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 것이다.
후기:
그동안 많이 아프셨던, 필자의 자형이 67년의 생을 마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삼가 자형의 편안한 영면과 명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