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진반 친구들(6)

by 신화창조

무슨 과외 활동이든 제대로 하려면

재정적인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촬영, 전시회 등 모든 활동에는 돈이 필요했다.

당연히(?) 학교로부터 지원은 없었고

우리들의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는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모두 우리 용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수입원은,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전교생이 학교에 증명사진을 제출해야 했는데,

외부에서 만들어 오면 2000원 정도 비용이 들지만,

우리 사진반에서 찍으면 4분의 1 정도로 가능했으니까(심지어 에누리도 됨)

전교생의 반 정도는 우리를 찾았다.

(7~800명은 고객이 되어주었지 않나 싶다.)


스튜디오가 아닌 성당 벽에 흰 종이를 붙이고 찍는 사진이니까

사진의 질은 보장할 수 없으나(질에 신경 쓰는 애들은 하나도 없었음.)

저렴하게 찍을 수는 있었으니 많이들 이용했다.

3월 한 달, 열심히 돈을 벌었다.

또 수학여행이나 소풍도 주요 수입원이었다.

사진반 완장 차고 아이들 가운데를 누비고 다니며

‘철거덕 철거덕’신나게 찍어댔다.

특히 학급 단체 사진의 이윤이 짭짤했다.

찍고 뽑고 수금 다니고……. 이것도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교복.jpg

아무튼, 열심히 끌어모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전시회 준비 비용을 다 마련할 수는 없었다.

우선 전시장 임대료가 비쌌고

필름 값, 인화지 값, 현상액, 액자 등등 끝이 없었다.

우리들의 호주머니는 항상 비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6월로 전시회를 계획했는데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단 3개월에 해치워야 했는데 정말 벅찼다.

모자라는 경비는 개인적으로 할당했다.

알아서 준비해오라고 할당을 하고 나니

이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신천 지구 아파트 어린이 축구팀 때도,

권투에 몸이 달아 신문을 돌리던 때도,

돈이 없어서 포기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했지 않았던가.

역시, 경험은 큰 선생님이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냈다.


학원비 내라고 주신 돈을 우선 ‘삥’해서 회비로 내 버리고

바로 어머니께 자수했다.

어떤 꾸중도 감당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의외로 별로 야단치지 않으셨다.

너무 기가 막히셨을까.

나중 이야기지만 전시회장에도 다녀가시고 약간 내려놓으신 분위기?

대신 이후로는 학원비든 공납금이든

절대 내 손에 쥐여 주시지는 않으셨다.

뭐 전시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처분도 감수해야지 싶었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 구구한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세월이 수십 년 지나도록 서로 물어보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직 아무도 모른다.

각자의 가슴 속에 예쁘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얘들아! 애썼다!!’


돈 이야기는 여기까지!


7부에서는 전시회 준비 과정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카메라.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눈과의 앙상블